건너오는 글 : 이준석의 ‘동성애 비판’? 그것은 궤변일 뿐이다
원래 지난 글에서 하고자 했던 이야기를 충분하고도 넘치게 했기 때문에, 특별히 더 많은 이야기를 하진 않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페이스북 페이지의 댓글에서 이준석 씨 본인을 비롯해 많은 독자들이 다양한 의견을 적어 주신 터라, 이에 대해 끝까지 입을 닫고 있기도 무리라는 생각이 들어 사이트를 빌어 간단한 보론을 쓰기로 한다. 계속해서 이준석 씨의 글, ‘막연한 거부감과 절박함의 대립’에 대한 글이다.
이는 이준석 씨의 입장 변화를 요구하기 위한 글은 아니다. 다만 댓글 등을 통해 남겨주신 피드백을 읽어보며 앞선 글에 다소 미진한 부분이 있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논란이 되고 있는 부분에 대해 더 명확한 입장을 쓸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하나. 이준석은 호모포비아이며, 이준석의 주간경향 기고는 동성애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드러내고 있는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건너오는 글의 초입에서 밝힌 것처럼, 이준석이 주간경향 기고에서 전달하는 주제는 글 말미의 “(동성애에 대한 비판이) ‘막연함’에 근거해 있다면, 역사의 필연은 동성애에 대한 개방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문장으로 갈음할 수 있을 것이다.
지난 글의 비판은 글 전체에 대한 것이 아니며, 이준석을 호모포비아라 규정한 바도 없다. 그 글은 한 문장에 관한 것이다. 그럼에도 이준석의 글을 여는 문장 – “나는 동성애에 매우 비판적이다” – 이 명백한 실수라는 것이다. 그리고 동성애라는 것이 개인이 ‘선택’할 수 없는 개인의 정체라는 점에서, 이는 또한 어떤 사람들에겐 명백한 잘못이기도 하다.
둘. 그 실수는 이준석의 글의 방향을 해칠 정도로 명백했는가?
역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첫 문장의 실수는 글의 내용을 그리 크게 해치지 않는다. 글이 산만해지는 바가 없지는 않지만, 그런 막연한 비판이 동성애에 대한 개방을 막지는 못할 것이라는 주제는 비교적 뚜렷하게 전달된다.
다만 읽기에 따라서는 충분히 글의 방향을 해칠 수 있다. 예를 들어, “동성애에 대한 사회적 거부감이 ‘막연함’에 근거해 있다면 역사의 필연은 동성애에 대한 개방으로 이어질 것이므로, 더 합리적인 동성애에 대한 비판 근거를 찾아가야 한다”는 식으로도 읽을 수 있는 것이다.
만일 이준석이 첫 문장의 실수를 인정하거나, 혹 인정하지 않더라도 그에 대한 명확한 견해를 밝혔다면 더 문제 삼을 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준석은 그렇게 하지 않았으며, 그것이 건너오는 글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이준석의 트인낭’ 부분에서 다룬 내용이었다. (다시 한 번 링크한다.)
셋. 트위터에서 이준석이 어떤 행보를 보였길래 문제가 되는가?
이준석은 다각도로 쏟아지는 지적에 대해 여러 해명을 내놓았는데, 이 해명은 어지러울 뿐 아니라, 이슈에 대한 얕은 이해를 보여주었다. 여기에서 일종의 불을 질렀다고 봐도 좋을 것 같다.
1) “PC를 엄격하게 인식하는 분들은 거기에 꽂혀 뒤 내용을 다르게 해석할 이유가 없는 것”이라는 트윗은 상대의 의도를 재단하는 문제가 있다. 글 전체를 동성애 혐오적인 것으로 읽은 사람이 없지는 않겠지만, 이준석의 글을 비판한 모든 사람이 그렇게 글을 곡해한 것은 아니다. 건너오는 글 역시, 글 전체가 아니라 다만 “동성애에 비판적”이라는 말의 어폐를 지적했을 뿐이다.
2) 그는 ‘특정 인종, 지역, 성별에 매우 비판적이다’ 같은 말은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받기도 했다. 이는 인종, 성별과 같이 개인이 선택 불가능한 개인의 정체에 대해서는 함부로 ‘비판적’이라는 말을 쓸 수 없으며, 성적 지향 역시 그렇다는 지적이었다. 그런데 이에 대해 이준석은 “동성애를 inborn으로 보길 강요하는 건 폭력”이라고 대답한다.
이는 맥락에 어긋날뿐더러 문제에 대한 이해가 부족함을 보여준다. 동성애가 선천적인가 후천적인가에 대한 다양한 논의가 있으나, 이는 말 그대로 그것이 오롯이 유전적인 문제인가에 대한 논의일 뿐이다. 성적 지향은 개인이 선택하거나 학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혹 어떤 학설이 성적 지향을 선천적인 것으로 보지 않는다고 해서 이런 사실까지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3) 그는 ‘동성애자’를 비판하는 것과 ‘동성애’를 비판하는 것이 다르다고 주장한다. 전자가 동성애라는 것이 사람의 특성에 해당하는 선천적인 것이라는 얘기라면, 후자는 행위를 의미하는 것으로 비판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미 2)에서 얘기했던바, 이는 여전히 그가 용어를 잘못 사용하고 있으며 학술적 논의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함을 보여준다.
넷. 그는 구글 독스에서 “동성혼(의 법제화)에 대해 비판적이라고 얘기하는 것”이라는 해명을 남겼다. 이는 어떠한가?
이 해명을 믿더라도, 동성혼을 동성애로 잘못 쓴 것은 그냥 비문으로 여기고 넘어가기 어려운 문제다. 동성애와 동성혼이 글을 구성하는 수많은 단어 중 하나일 뿐이라면 모르겠지만, 이는 글의 가장 핵심적인 단어다. 그것을 잘못 쓴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이는 글을 쓴 사람의 명백한 잘못으로, 타인의 곡해를 지적할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이준석은 이 해명을 남긴 이후에도 트위터와 페이스북 등을 통해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는 대신 계속해서 타인의 곡해만 지적하고 있다. 심지어 위키피디아를 링크하며 ‘모순어법이라는 것이다, 이런 걸 내가 설명하고 있어야 하나’ 등의 글을 남기기도 하는데, 핵심 단어를 잘못 선택한 사람이 할 말로는 대단히 부적절했다.
또한 이 해명은 트위터에서 그동안 그가 비판자들과 나눈 멘션 대화와도 궤를 달리한다. 트위터에 남긴 ‘동성애는 비판 가능’하다는 등의 언급과, 사실 동성혼을 비판하고자 한 것이었다는 추후의 해명은 그가 진짜 하고 싶은 해명이 어떤 것인지를 궁금하게 한다. 트위터가 워낙 ‘즉각적인’ 반응을 일으키기 쉬운 도구이다 보니 다소 어지러운 이야기가 나올 수 있음을 인정하더라도, 긴 글을 통해 본인의 생각을 정리한 이후에도 여전히 타인의 곡해만을 지적하는 등의 태도를 보이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
다섯. 모순어법을 썼을 뿐이라는 이준석의 해명은 어떠한가?
어느 정도 인정할 수 있다. 그는 글 말미에 동성애에 대한 사회적 거부감이 막연함에 기대고 있다고 쓰는 등, 이런 비판이 진정한 비판으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우선 필자는 동성애에 매우 비판적이다”라는 문장을 변호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그 모순의 주인공도, 종국에 그것이 모순임을 지적하는 이도 바로 필자 자신이기 때문이다. 글이 분열적으로 느껴진다. 나는 종국에 필자 본인이 그것을 모순으로 지적했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고 읽었으나, 필자 본인이 모순된 시각을 가지고 있다는 데 집중해 읽더라도 그것을 곡해라 할 순 없다.
만일 그런 모순어법이 제대로 전달되려면 저 첫 문장이 결국은 헛소리라는 것이 좀 더 명확하게 쓰였어야 했겠으나, 애당초 글은 그렇게 쓰이지 못했다. 게다가 이후 트위터와 페이스북 등에서 남긴 그의 공격적인 해명은, 그것이 모순어법일 뿐이라는 그의 해명을 더욱 빛바래게 한다. 모순어법이라는 해명대로라면, 그는 저 첫 문장이 잘못된 것이라는 지적에 대해 “동성애는 비판할 수 있는 것”이라고 반응할 게 아니라, 오히려 “바로 맞췄다”고 반응했어야 했다.
여섯. 개인적 소견과 역사의 필연은 명확히 분리될 수 있는가?
첫 문장의 임팩트를 살려 이 글을 요약하자면, 결국 자신은 동성애에 비판적이지만, 이런 비판은 사실 막연한 것이며, 동성애에 대한 개방이라는 역사적 흐름을 막을 순 없을 것이라는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다. 여느 요약이 그렇듯 요약이 다소 부적절할 수도 있으니, 만일 부적절한 요약이라고 생각하신다면 이준석의 글 본문을 직접 봐도 무방하다.
이준석은 이준석 개인이 동성애에 매우 비판적이라는 소견과, 그럼에도 그것이 막연한 것이며 역사의 필연을 막을 수 없다는 어떤 객관적인 합리성을 억지로 분리해낸다. 그러나 이 글은 결국 이준석의 글이다. 그것이 역사의 필연이리라는 것도 결국 이준석의 말이며, 동성애에 매우 비판적이라는 것도 결국 이준석의 말이다. 그것은 명백히 분리되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그가 역사적 필연 뒤로 숨더라도, 그 개인의 소견이 “동성애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것임이 무게를 완전히 잃어버리지는 못한다. 덕분에 글은 매우 어지러운 모습을 띠게 되는데, 그는 동성애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면서도 비판이 막연함을 인정하고 있고, 역사적으로 자신의 비판이 인정받지 못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동성애에 대해 비판적이었으나, 이것이 잘못된 것임을 알았다 – 는 식의 구성도 아니다. 이 어지러운 주장들은 ‘동시에’ 펼쳐지고 있다.
일곱. 글 전체의 주제가 그러하다면, 첫 문장에만 초점을 맞추어 비판하는 것은 과민한 것이 아닌가?
그렇게 볼 수 없다. 소속그룹에 기반을 둔 부정적 편견을 공개적으로 말하는 것을 이미 차별로 간주할 수 있다. 같은 논지로 “나는 여성스러움에 매우 비판적”이라거나 “나는 장애에 매우 비판적” “나는 작은 키에 매우 비판적” 같은 말로 서두를 열었다면 어땠을지를 생각해보라. 이미 그 시점에서 그 당사자들에게는 차별적인 언사로 들릴 수밖에 없다. 필자 자신을 바보로 설정하고 그 어리석음에 대한 풍자를 노렸다면 가능한 표현이겠지만, 역시 트위터 등에서 내놓은 이준석의 항변으로 볼 때 그럴 가능성은 별로 없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