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석의 ‘실수’
괜한 짓을 했다고 자책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새누리당 비대위원으로 화려하게 정치 무대에 데뷔했던 이준석에게 이번 일은 꽤나 괴로운 경험이 될 것 같다. 물론 전국적인 이슈가 되지도 않을 것이고, 대부분의 사람은 이런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고 넘어가겠지만.
지금 트위터에서는 이준석의 주간경향 기고, ‘막연한 거부감과 절박함의 대립’이라는 글을 둘러싼 논쟁이 뜨겁다.
이 글에서 이준석 씨는 영화 제작자이자 감독인 김조광수 씨의 동성 결혼 발표에 즈음하여, 동성애와 동성혼에 대한 본인의 의견을 간략히 쓰고 있다. 그는 “민주주의 하에서 충분한 다수의 행복 추구의 갈망을 막아내기에는 성서를 자의적으로 해석한 창조질서라는 개념만으로는 부족”하며, 동성애에 대한 거부감이 “‘막연함’에 근거해 있다면, 역사의 필연은 동성애에 대한 개방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지적한다.
동성애와 동성혼에 대한 논의가 서구 뿐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비교적 활발해진 오늘날, 이 글의 내용은 그다지 특이할 게 없어 보인다. 이준석의 석 자 이름이 없었다면 그냥 인터넷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흔한 글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하필 첫 문장에서 영 괴이한 ‘뻘타’를 쳤다.
“우선 필자는 동성애에 매우 비판적이다.”
오, 신이시여.
이준석의 ‘잘못’
이성애와 동성애를 비롯한 성적 지향은 선천적인가, 후천적인가? 사실 이에 대한 답은 아직까지도 나오지 않았다. 결정적인 증거가 없기 때문이다. 유전적인 원인이 있다는 설도 있고, 태내 환경이 원인이라는 말도 있으며, 호르몬이 원인이라는 주장도 있고, 사회 환경이 원인이라는 얘기도 있다. 이들 모두가 복합적인 영향을 끼칠 것이라는 말도 있다.
다만 이것이 보수 일각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동성애 드라마를 보면 동성애자가 된다거나 하는 가능성까지 시사하는 것은 아니다. 현재 정신의학 및 심리학계는 성적 지향은 적어도 유아기에 확립되어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으로 보고 있으며, 이를 의식 가능한 ‘선택’의 문제로 보지 않는다.
물론 부모의 성적 지향 등이 자녀의 성적 지향에 영향을 미친다는 주장에도 부정적이다. 그런 근거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특히 동성애를 치료할 수 있다는 교계 일각의 주장에 대해서는 대단히 부정적이며 다른 정신과 질환을 일으킬 수 있는 극히 위험한 시도라고 지적하고 있다.
과학적으로 말하자면 선천적인지 후천적인지에 대한 답이 아직 불분명하다고 말하는 게 맞다. 하지만 이런 측면에서 볼 때는, 관례적으로 ‘후천적’이라는 말이 ‘선택 가능한’ ‘학습 가능한’ 등의 의미로 여겨진다는 점에서, 성적 지향은 선천적인 문제라 말해도 어폐는 없을 것이다.
동성애는 같은 성(性)을 가진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성인간의 합의된 관계는 물론, 그 사랑이라는 감정을 ‘비판’한다는 것은 오지랖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질 수가 없다. 그건 “나는 리승환이 헬로비너스를 사랑하는 것을 비판한다”는 것만큼이나 무의미한 문장이다. 물론 아동성애라든가, 스토킹이라든가 하는, 성인간의 합의된 관계를 전제하지 않는 경우라면 더 깊은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설령 타인의 사랑과 성인간의 합의된 관계에 비판적일 수 있다는 오지랖 넘치는 입장을 취하더라도, 동성애는 그 사람이 선택 가능한 특질이 아니라는 점에서 더더욱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이것은 여성스러움을 비판한다거나 장애를 비판한다거나 하는 것만큼이나 몰지각한 단어 선택이다.
‘비판’이라는 단어를 선택한 것이 단순한 실수이며, 막연한 거부감을 드러낸 것이라 해도 문제다. 공공연히 타인에 대한 거부감을 드러내는 것은 그리 단순한 일이 아니다. 설령 누군가가 주간경향에 “나는 새누리당이 막연하게 싫다”는 문장을 썼더라도 비판의 대상이 되었을 것인데, 하물며 개인이 선택할 수 없는 특질을 이유로 그들에게 막연한 거부감을 공공연히 드러내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할 수 있겠는가. 특히 그들이 그 특질로 인하여 그들의 존재를 숨기고 차별받아야 하는 소수자라면.
이준석의 ‘트인낭’
이런 관계로 이준석의 글은 큰 비판에 부딪혔다. 특히 트위터에서 이런 논란이 거셌는데, 이준석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대응하면서 일을 키웠다. 이준석이 트위터에 올린 멘션 중 몇 가지 이야기를 인용해보자.
그냥 전체 맥락에서 “비판”이라는 단어에 대해서 대해서 동성애 관련 PC를 엄격하게 인식하는 분들이 “동성애가 비판의 대상이냐” 라고 한거죠뭐. 그걸 엄격하게 인식하는 분들은 거기에 꽂혀서 뒤 내용은 다르게 해석할 이유가 없는거고.
이는 이준석이 이번 일을 바라보는 시선을 비교적 잘 보여준다. 다른 사람들이 곡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글의 내용을 정확히 이해하더라도, 동성애에 비판적이라는 그 문장은 최대한 이준석에게 호의적으로 해석해도 잘못이다.
사실 이준석은 동성애 문제에 대해 이해가 매우 부족한 상태에서 함부로 글을 쓴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도 드는데, 아래의 멘션이 그런 의심을 불러일으키는 것 중 하나다.
질문자 : “나는 특정 인종(지역, 성별)에 매우 비판적이다”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이준석 : 동성애를 inborn으로 보느냐 아니면 후천적인 것으로 보느냐는 매우 대립이 있는 주제지요. 거기서 부터 동성애를 inborn으로 보길 강요하는 건 폭력적이지요.
이 질문자는 이미 위에서 논의한 것처럼 성적 지향이 인종이나 지역, 성별처럼 개인이 선택 가능한 특질이 아니라는 것, 따라서 비판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지적한 것이다.
이에 대해 이준석은 동성애가 선천적인지 후천적인지 하는 문제가 대립이 있는 주제이며, 이를 선천적으로 보기를 강요하는 것은 폭력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아마 이준석은 여기에서 선천적이라는 말과 후천적이라는 말을 관례적으로 쓰이는 의미, 즉 후천적으로 ‘선택’하고 ‘학습’하는 것으로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성적 지향이 선천적인지 후천적인지 불분명하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과학적 개념, 즉 그 특질이 유전적인 원인에 의해 결정되는 것인가, 아니면 착상 후, 또는 생후의 다양한 요인들에 의해 결정되는 것인가 하는 문제가 논쟁거리라는 뜻이다. 학계는 그것을 개인이 선택 가능한 문제로 여기지 않는다. 이준석의 멘션은 맥락을 한참 벗어난 것이다.
한편 궤변에 가까운 멘션도 있었다.
똑같은 얘기지만, “동성애자”를 비판하는 것과 “동성애”를 비판하는 것이 다르죠. 첫번째는 동성애라는 것이 사람의 특성에 해당하는 선천적인 것이라는 얘기고, 후자는 행위거든요. 행위는 당연히 비판가능하고요.
이쯤 되면 무슨 말을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싶을 지경이다. 아마 이준석은 ‘동성애’를 동성 간의 성행위나 최소한 실제 연애, 스킨십 등으로 정의하고 이런 멘션을 쓴 것 같은데, 동성애는 그런 뜻이 아니다. 그의 정의대로라면 이성애는 이성 간의 성행위를 의미하는 것이며, 가족애는 가족 간의(……) 그냥 본인이 단어를 잘못 쓰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가 가톨릭 교회의 입장을 받아들인 것이라면 이해의 여지가 있겠다. 동성애자도 정절을 지킴으로써 신의 구원을 받는 게 가능하다는. 동성을 사랑하지 않고 정절을 지키는 동성애자라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나마 그럴 듯한 해명은 그가 구글 독스를 통해 정리한 긴 글에서 뒤늦게 나왔다. 동성애가 아니라, 동성혼이나 동성간의 사실혼 관계 인정 등에 대해 비판적이라고 말하려는 것이었다는 얘기다.
하지만 사실 그마저도 문제의 여지가 있다. 사회적으로 첨예한, 시민으로서의 권리에 대한 논쟁에 대해 비판한다면서 그 이유는 ‘딱히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무래도 사려깊지 못하다. 애당초 비판이라는 건 이유 없이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굳이 이런 얘기를 하고 싶었다면, 비판이 아니라 ‘거부감’이나 ‘혐오’ 정도로 표현했어야 옳다.
또한 이런 해명에 따르면, ‘동성애에 비판적’이라는 – 그의 글의 서두를 연 문장은 분명히 잘못이었다. 또한 그에 대해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트위터에서 남긴 멘션도 하나같이 뻘타였다.
그러나 그는 그 이후로도 태도를 바꾸지 않는다. 여전히 그가 그의 잘못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의심이 든다.
긴 해명을 구글 독스에 남기기에 앞서, 이준석은 트위터에 이런 멘션을 남겼다.
“창조질서 얘기로 동성애를 막으려 한다면 사회는 알아서 동성혼을 허용하는 방향으로 진화할 것이다.” 라는 주장이 매도될 정도면, 우리나라에서 앞으로 동성애 자체에 대해 글쓰는 것 자체를 사람들이 두려워 하겠죠.”
실제로 이번 주간경향 컬럼에 동성애 관련을 실어달라고 여기저기 부탁했는데, 거절해서 저한테까지 왔죠. 그게 사람들이 동성애에 거부감을 느껴서 거절한걸까요 아니면 이런 반응이 피곤해서 였을까요. 저는 이제 후자입니다.
BGLT에 대한 사회적 제도의 변화는 (BGLT 적극적 옹호론자 + 거부할 이유를 못찾은 소극적 관망자)의 수가 BGLT를 목숨걸고 거부하는 사람들의 수보다 많을 때 이루어 집니다. 가운데를 방어적으로 대하면 요원하겠죠.
그리고 긴 해명을 남긴 이후에는 이런 멘션을 남겼다.
하여간 오늘 저의 결론은 우리 JS선생님이 얘기한 것 처럼 앞으로 동성애 문제에 대해서 NCND를 가져가는 거라서, (물론 논쟁을 본 분들중 상당수도 그리 생각할 수 있을…)
비판론자들이 괜히 ‘피곤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는 인식은 변하지 않은 것 같다. 심지어 아래와 같은 멘션까지 있었다.
이건 조심스러운 얘기기는 하지만 오해 이상으로 방어적인 반응들이 나오니까 개당황. 반동성애=보수=새누리당=이준석 정도의 등식이 작용한 부분도 없지는 않을거라고 생각하는 부분은 있지요.
비판자들의 의견을 진영 논리에 갇힌 것으로 의심하는 것이다. 다시 한 번 그(HIM)를 부를 순간이다. 오, 신이시여.
이준석의 ‘동지’
왜 사람들은 이준석의 글에 이토록 비판적이었을까? 단순히 말실수로 보고 넘길 수는 없었을까?
이준석은 이를 성 소수자들의 과민반응인 양 치부했지만, 이건 그렇게 볼 수 없는 문제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이준석과 비슷한 말을 하고 있다. 바로 “나는 동성애에 반대하지만, 동성애자가 비판받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는 말이다.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민주당의 당대표이며 차별금지법 발의자이기도 했던 의원 김한길이다. 그의 발언을 들어보자.
저 개인적으로는 동성애를 찬성하지 않는다. 동성애가 조장되고 확산되는 것에 반대한다 (…)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차별받아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제가 싫어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해서 그들을 차별하는 것은 옳지 않기 때문.
이미 앞서 논의했듯 동성애는 찬반의 대상이 될 수도 없는 것이며, 조장되고 확산될 수 있는 성질의 것 또한 전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지어 차별금지법을 발의했다는 야당의 당대표가 저런 말을 하는 것이 한국의 실정이다. 차별해선 안 된다는 말은 좋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성애를 나쁜 것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차별금지법의 발의자조차도 성 소수자 문제에 대해 이해가 부족하다는 사실을 방증한다.
누군가가 “여성스러움에 찬성하지 않으며 여성스러움이 조장되는 것에 반대하지만, 그것 때문에 당신을 차별해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고 말한다면? “작은 키에 찬성하지 않으며 작은 키가 조장되는 것에 반대하지만, 그것 때문에 당신을 차별해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고 말한다면?
이것을 차별을 하지는 않으므로 올바른 태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저 정도면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발언이라고, 여성이나 키 작은 사람에게 가서 말할 수 있겠는가.
성 소수자들이 실제 처해 있는 현실이 그렇다. 그나마 성 소수자에 대해 친화적이라는 의원조차도 저런 잘못을 공공연히 저지르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 또 한 사람의 영향력 있는 정치권 인사 이준석이 비슷한 발언을 내뱉고서는 사람들이 비판하자, 이를 민감한 반응으로 치부하고 심지어 진영논리로 몰아가기까지 한 것이다.
이준석에 대한 ‘실망’
처음 범한 잘못도 잘못이지만, 그에 대해 사람들이 비판적인 의견을 내놓자 이준석이 보인 반응은 대단히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심지어 ‘단어를 잘못 썼다’고 인정하고서도 그런 대응은 여전했다.
올해는 육우당의 자살 10주기다. 그는 시인을 꿈꾸던 열 아홉 고등학생이었다. 그러나 그는 동성애자라는 하나의 정체성으로 인해 차별받아야 했다. 가톨릭 신자였지만, 그와 같은 신을 믿는다는 한기총이란 단체는 그의 사랑을 유황불로 심판받아야 할 것이라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자신의 죽음이 세상에 깨달음을 줄 수 있기를 기도하며 스스로 삶을 마감했다. 그는 여전히 열 아홉 고등학생이다.
십 년 전에 비해, 세상은 많이 변했다. 한 연예인의 용감한 커밍아웃을 선정적인 보도 경쟁에 써먹고, “나는 호모다” 같은 제목을 대문짝만하게 달아놓던 세상은, 이제 그 연예인이 TV에 나와 자신의 성적 지향을 개그의 소재로 쓸 수 있을 정도로 나아졌다.
하지만 여전히 변하지 않은 것도 있다. 그들을 차별해선 안 된다고 말하면서도 어쨌든 싫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심지어 국회에서조차. 나름 진보적이라는 인터넷 커뮤니티가 게이를 두고 ‘역겹다’는 단어를 아무렇지도 않게 쓴다.
이준석의 그 한 문장 역시 그랬다. 그는 그 말이 얼마나 무겁게 타인을 찌를 수 있는지 모르는 것 같다. 심지어, 수많은 사람들의 지적 후에도, 여전히 모르는 것 같다. 실망스럽다. 대단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