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전 글: 자기 미움의 숨은 심리: 왜곡된 자기 사랑
‘자기 미움’이라는 심리 기제
너무나 당연하게도 자기 미움은 부정적 심리이다. 또한 자신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여러 가지 해를 끼치며 차라리 없는 것이 더 좋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강하냐 약하냐의 차이가 있을 뿐 자기 스스로를 미워하거나, 부정하거나, 부인하는 저마다의 자기 미움 심리를 가지게 된다.
왜 그럴까? 어쩔 수 없이 이대로 가야 할까? 아니면 이 심리 기제를 해결해서 삶을 좀 더 행복하게 만들 수는 없을까?
브런치에서의 필자의 세 가지 매거진 중 ‘자기 미움’은 바로 이 문제를 함께 고찰해 보고 또 해결해 보고자 하는 공동의 시도이다. 여기서는 우리의 ‘자기 미움’의 심리 기제가 주제이다. 그동안 37편의 글을 통해 우리가 가지는 자기 미움의 심리를 직접, 간접적으로 파악하고 또 여러 해결책들을 제시해 왔다.
본 글에서는, 이제 이 자기 미움에 대한 또 하나의 심층적인 원인과 구조를 함께 살펴보려 한다.
물론 인간의 심리란 물리적인 대상들처럼 한 가지 양태와 설명, 그리고 분석만이 존재하는 영역은 아니다. 그러므로 얼마든지 다른 해석, 분석도 가능하다. 어떤 경우든 핵심은, 그 해석과 분석을 통해 얼마나 ‘실제적인 도움’을 얻을 수 있는가이다. 즉 실용성이다.
정밀하고 정확한 통찰은 실용적인 해결 방안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해 주는 장점이 있다. 때로는 통찰 자체가 곧 해결책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통찰 후에 구체적인 해결책들이 시간 차이를 두고 자연스럽게 떠오르기도 한다. 어느 편이든 모두 도움이 된다.
그러므로 이 글을 통해 우리가 왜 자신을 괴롭히고 고통스럽게 하며 삶의 의욕을 뺏는 자기 미움을 계속 반복하고 있는지를 이해하는데 조금이라도 더 도움이 되길 바라며, 그 이해를 통해 ‘그렇다면 무의미하고 부정적인 자기 미움을 어떻게 넘어서고 멈출 것인가?’하는 해결로 자연스럽게 연결되기를 바란다.
선택과 활용은 독자의 몫이다.
자기 미움 심리 기제의 핵심 구조
이 글에서 집중해서 밝혀 보는 자기 미움 심리 기제의 핵심 구조는 아래와 같다.
- 타인과 외부의 부정적 영향
- 그 외부 영향과 내부 반응을 자기의 고유한 생각으로 여김
- 그 생각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그 결과 부정적 자아상을 고수함
조금 풀이해 쓰면,
1. 먼저 타인과 외부 세상에서 주입하고 학습시키는 ‘자기 부정’의 내용들을 받아들인다.
2. 어느 순간부터 그 외부에서 받아들인 ‘자기 부정’의 내용들과 그에 대한 내부 반응이 자기 생각이 되기 시작한다. 그런데 그것을 자신의 ‘고유한’ 생각으로 여기고 믿는다.
3. 이제 생겨난 자신의 생각을 자기 자신과 동일시한다. 치명적 문제는 생각을 부정하는 것이 자기를 부정하는 것이라 여기는 부분이다. 즉 자신에게 좋지 않은 부정적 생각들조차도 자신의 ‘고유한’ 생각이며 자기 자신이기에, 자기가 그런 생각을 하고 믿음을 가지는 것은 타당하고 합리적이라 스스로 믿는다. 그래서 그 생각을 계속 고수하고 고집하려 한다. 마치 자기 자신을 지키듯이 자신의 생각(심지어 부정적인)을 지키려 한다.
더 이상한 것은 누군가가 자신의 ‘부정적 자아상’ 등을 비판하거나 그에 대한 조언이나 충고를 하면, 그게 자신을 위한 것임에도 자기가 거부된다고 느껴서 기분 나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스스로 행하고 있는 자기 부정을 계속 고수하고 시키려 한다. 부정적 자기가 곧 ‘자기 자신’이라 믿고 있으므로. (예로, 스스로 부정적인 어떤 이에게 친구가 “아니야. 너 괜찮아. 너 좋은 사람이야. 너 잘 하고 있어.”라고 이야기하면 친구의 그 말에 오히려 저항하고 거부하는 심리가 생기는 것이다.)
다음에서 이 세 단계를 더욱 상세히 들어다 보자.
1. 타인과 외부의 부정적 영향
어릴 때는 주로 타인과 외부에서 정보를 수집하고 주입한다. 그러다 어느 정도 이상의 나이가 되면 스스로 자기 내부에서 여러 생각을 만들어 내기 시작한다. 물론 어떤 경우든 외부에서 들어오는 정보와 내부에서 생겨나는 정보는 항상 동시적으로 일어날 것이다. 항상 쌍방향적이며, 순수하게 일방적인 경우는 없다. 그런데 인간이 아무리 스스로 뭔가를 생각해 내고 또 떠올린다고 해도 결국 그 출발은 외부에서 들어온 정보가 기반이 된다. 이것을 선명히 알아채는 게 중요하다. 즉, 내 안에 있는 대부분의 것들은 외부에서 들어온 것이다.
이런 기제를 인간의 자기상 혹은 자아상과 연결시켜 보자.
한 개인은 자신의 자아상을 결코 스스로 만들지 못한다. 혹은 그 개인 혼자만으로 만들어지진 않는다고 할 수도 있다. 어릴 적부터 부모와 가족 그리고 타인과 세계가 자신에게 주는 정보로 형성이 된다. 이렇게 외부에서 들어온 것에 더해서 그 개인의 기질이나 성향, 사유의 패턴 등이 가미될 것이다. 즉 외부와 내부의 요소들이 합쳐지는 것이다. 어느 요소의 영향이 더 큰지는 개인의 성향이나 특성에 따라 조금씩 다를 순 있다.
이러한 형성 과정 자체는 아무 문제가 아니다. 이건 본래 그런 것이다. 사람의 자아상은 모두 이런 식으로 형성 된다. 문제는 ‘부정적 자아상’이다. 혹은 자기 미움 혹은 자기 부정의 경향성이다. 자기도 모르게 형성되고 또 계속 영향을 받는 것이다. 한 개인이 자신에 대해 가지는 부정적 자아상은 결코 그에게 이롭게 작용하지 않으며 불필요한 고통과 고민을 준다. 삶의 에너지와 의욕을 잃게 만든다.
자신에게 손해가 되는 부정적 자아상도, 앞서 말한 흐름에 따른다면 결국 처음엔 외부에서 주입된 것이다. 사람에 의해서든 혹은 외부 환경과 사회에 의해서든 말이다. 때때로 외부의 주입과는 별개로 스스로의 부정적, 염세적 성향 등에 의해서 형성이 되는 부분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외부의 영향과 주입이 우선이라 봐야 한다.
성장 과정에서 나의 자아상에 대한 외부의 주입이 일어나는 시기는 대개 어린 시절이며 주입되는 정보의 취사 여부를 능동적으로 결정하지 못한다. 대부분은 그냥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내가 거부하고 싶은 부정적 정보들마저도 의식적으론 거부하지만 무의식적으론 어느 새 ‘그렇다’라며 받아들여진 경우가 많다. 가장 큰 영향은 부모이며 그리고 자라면서 만나게 되는 여러 주변 인물들(선생, 친척, 친구, 지인 등)이 있다.
어린아이에게 주어지는 타인과 세상의 자아상은 유감스럽게도 긍정적인 내용보다는 부정적인 내용이 많다. 물론 이것은 해당 사회와 그 구성원들의 성숙도에 따라 다르게 되는데, 즉 북구 유럽 등 비교적 성숙한 사회에서는 교육에나 문화에서 아이들에게 부정적 영향을 최소화 하는 경향이 많이 발전되어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 사회나 미처 그런 부분을 신경쓰지 못하는 사회에서는 아무래도 부정적 영향이 여전히 많다.
여하튼 삶의 초기에 우리는 주입되는 ‘부정적 자아상’을 많이 받아들이게 된다. 그 부정적 자아상들은 주로 개인의 능력에 대한 것이라든가 혹은 상태에 대한 것일 수 있다. 잘 할 수 있는 게 없다느니, 무능력하다느니, 게으르다느니 하는. 혹은 외모나 가치에 대한 것일 수도 있다. 못생겼다느니, 너는 별로 가치 있는 사람이 아니다라느니 하는.
그렇게 되는 주된 이유는, 우리를 혹은 아이들을 키우는 어른 세대, 부모 세대들 자신이 그렇게 양육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성장해서 그러한 자아상을 가지고 있고. 그러므로 자기 아이들에게도 그렇게 해 줄 수밖에 없다. 자신들에게 그것이 자연스러우므로. 그래서 그 어른들이 만드는 교육과 문화에도 그런 요소가 강하게 작동하는 것이다. 여기에 한국 사회 특유의 발전 지향, 경쟁 지향, 승부 지향, 성장 지향의 시대적 문화 요소들이 더해진다. 그래서 이기는 것, 결과, 성취, 목표 등을 우선시하면서 그 여파로 개인의 자아상에 대해서는 어떤 고유성이나 긍정성 대신 획일성, 부정성, 억압성 등이 두드러지게 되는 것이다.
2. 그 외부 영향과 내부 반응을 자기의 고유한 생각으로 여김
문제는 이 부분이다. 이제 어느 순간부터 그렇게 주입된 타인과 세상의 관점을 ‘나의 고유한 생각’으로 착각하기 시작한다. 모든 생각이 그렇지만 여기서는 부정적 자아상과 그에 의해서 발생하는 자기 미움과 자기 부정의 요소를 우선 보자.
이것을 눈치채는 이들이 많지 않다. 왜냐하면 외부의 생각을 받아들인 후에 ‘나 스스로 만든 나의 고유한 생각’이라는 느낌과 믿음이 생기면 더 이상 그게 외부에서 들어온 것이라 여기지 못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처음에는 거부했던 내용들조차도 그렇게 된다. 의식적으론 거부하지만 무의식적으론 들어와 버렸던 것이다.
어떻게 보면 ‘외부의 생각’과 ‘내부의 생각’은 우리가 여기는 것만큼 그렇게 선명하게 구분되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즉 우리가 그렇게 여기고 이름을 붙일 뿐이지 사실은 내부와 외부의 구분 없이 그냥 ‘생각’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래서 쉽게 착각이 일어날 수도 있다. 외부의 생각을 나 자신의 내부의 생각으로 여기는 착각 말이다.
여하튼 중요한 것은, 실제 여부와는 상관없이 우리 인간들은 이미 외부의 생각들과 내부의 생각들을 서로 다른 것이라 분별하고 있으며, 그 분별에 바탕해서 외부에서 들어온 생각을 어느 순간엔가 내 내부의 생각으로 여기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앞서 ‘외부에서 들어온 생각에 의해 자아상이 형성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처럼, 외부에서 들어온 생각들을 나의 고유한 생각으로 여기는 이 기제도 사실 그렇게 크게 문제는 되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이 다른 동물들과는 다르게 ‘언어 사용 능력’을 통해 인간종 특유의 복잡하고 심층적인 ‘사유 능력’을 발전시키면서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하나의 기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냥 하나의 도구인 것이다.
물론 이러한 과정의 구조와 프로세스 자체는 선명히 구분하고 눈치챌 수 있어야 한다. 모르면 계속 무의식적으로 반복하게 된다.
3. 그 생각을 자신과 동일시하고, 그 결과 부정적 자아상을 고수함
진짜 문제는 다음의 마지막 단계에서 발생한다. 문제는 부정적 생각, 부정적 정보, 부정적 자아상들이다. 우리는 여기서 부정적 자아상을 중점적으로 이야기해 보자.
외부에서 주입된 것이든 내부에서 만들어진 것이든 나를 괴롭게 하고 힘들게 하고 힘을 빼앗는 부정적 자아상들은, 만약 여건만 된다면 어느 때든 버리거나 무시하거나 혹은 멈추는 것이 답이다. 혹은 반대의 긍정적, 적극적 것들로 바꾸는 것이다. 그게 나에게 이롭다.
그런데 놀랍게도(혹은 당연하게도?) 우리는 그러한 부정적 자아상들 바꾸거나 놓거나 무시하지 못한다. 앞서 말했듯이 타인들이 나에게 “야, 너 충분히 멋있어. 훌륭해. 잘 하고 있어. 너 멋진 사람이야.”라고 말을 해 주어도 오히려 그것을 부정한다. 겉으론 “응, 그래 고마워. 나도 잘 알고 있어.”라고 고개를 끄덕이며 반응을 하지만 속에선 그렇지 않다.
내가 느끼는, 내가 인정하는, 내가 받아들이는 나는 여전히 못나고, 무능력하고, 멋없고, 가치와 의미가 없게 여겨진다. 마음속에선 여전히 내가 지금까지 가지고 온 나 자신에 대한 부정적 상과 그에서 발생하는 자기 미움, 자기 부정이 작동한다. ‘아, 이게 싫다. 바꾸고 싶다’고 하면서도 계속된다.
왜 그럴까? 우리는 분명 진정 자신을 위하는 이기적인 본능을 가진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이 부분에서는 왜 정작 실제로 자기에게 이롭게 되는 것을 선택하지 못하고 오히려 해롭게 되는 것을 선택하는 것일까? 이 모순은 왜 발생할까? 사실은 이 모순의 비밀을 알아채기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계속 반복하게 되는 것이다. 즉 모르기 때문에 일어나는 반응이며, 제대로 선명하게 알아채면 저절로 사라지는 반응인 것이다.
모순은 ‘자기 생각’과 ‘자기 자신’의 동일시 기제다
그런 ‘동일시’ 기제 같은 건 이미 알고 있다고? 아니다. 만약 정말 선명하게 눈치채고 알아챘다면 바뀐다. 뭔가가 선명히 인식되고 또 자연스레 여러 가지가 바뀐다. 아무리 머리로, 이론적으로, 앎으로, 지식으로 안다고 해도 실제 ‘알아채고, 눈치채고, 자각하고, 각성한’ 것이 아니면 그건 솔직히 ‘모른다’고 해야 한다. 자신은 아직 모르는 것임을 알아야 하고 인정해야 한다. 여전히 모르는데 안다고 스스로 착각하고 또 그렇게 여기고 있으면 진짜 제대로 알게 되는 탐구의 기회를 스스로 박탈하는 것이다. 탐구와 모색은 멈추게 되고, 우리는 항상 제자리를 맴돌게 된다. 이 부분이 아주 중요하다.
이 부분에 대해선 이론적으로 그리고 지식적으로 아는 건 크게 소용없으며 실제로 눈치를 채야한다. 혹은 자각해야 한다. 그래서 더 이상 그 자동적인 동일시가 일어나지 않게 되어야 한다. 혹은 동일시를 동일시로 알아채서 더 이상 무의식적으로 휩쓸리거나 매몰되지 않아야 한다. 어떤 애씀과 노력으로 그런 동일시를 멈추거나 없애는 것이 아니다. 혹은 무시하거나 억압하는 것이 아니다. 알아채고 눈치챔으로써 저절로 멈추는 것이다.
고수하거나 집착하지 않으면, 바뀔 수 있다
다른 말로 하면, 더 이상 ‘고집’을 부리지 않는 것이다. 고수하지 않는 것이다. 혹은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나의 생각’을 ‘나 자신’으로 동일시하는 그 의식적 행위를 말이다. 혹은 나의 생각을 절대시 하지 않는 것이다. 전부로 여기지 않는 것이다. 필요할 땐 어느 정도 이상으로 강하게 주장하고 사용하고 할 것이지만 필요 없을 땐 가볍게 넘기거나 보내는 것이다.
이렇게 말을 들어도 여전히 그렇게 부정적으로 되고 있는데 어떻게 하냐고? 그게 쉽게 되겠냐고? 그래서 ‘고집’이라고 칭한 것이다. 몰라서 여전히 그러고 있는 것이 아니다. 누구라도 어느 정도는 다 알거나 느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생각들이 곧 나 자신’이라는 이 믿음 혹은 정신적 습관을 놓기가 싫은 것이다. 물론 이 ‘놓기 싫음’도 다분히 무의식적일 수 있다. 심지어 많은 경우엔, ‘나도 놓고 싶어~!’라고 하면서도 놓아지지 않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결국엔 스스로 놓고 있지 않는 것이다. 이걸 알아차리고, 이걸 인정해야 한다.
외부에서 주입된 것이든 내부에서 일어난 것이든, ‘생각’은 단지 생각일 뿐이다. 생각은 ‘나’가 아니다. 그런데 생각을 나라고 여기면, 이제 내가 나의 존재성을 지키려는 본능으로 나의 생각도 지키려는 오류가 일어나게 된다.
주의가 간다고 실제 중요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누구나 ‘나의 존재성을 지키려는 본능’을 가지고 있다. 육체적으로 나의 안전과 생명을 보호하려는 것과 그리고 정신적, 심리적으로 나의 존재성을 지키려는 것 두 가지이다. 육체의 존재성을 유지하기 위해 우리는 부지런히 먹을 것을 먹고, 몸을 보호하고 유지하기 위한 여러 행동을 취한다. 그리고 정신적, 심리적 존재성을 유지하기 위해 나 자신과 타인들의 인정도 욕구하게 된다. 모두 자연스러운 본능이고 아무 이상 없는 행위들이다.
문제는 그럴 필요가 없을 때에 굳이 그것을 지키려 하는 경우이다. 즉 육체적이거나 정신적인 내 존재성, 그것을 지키고 유지하는 것과 본질적으로 상관없는 경우에조차도 애써서 시키려 하고 유지시키려 할 때 여러 고통과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그 중에 하나가 내가 이미 가지게 된 부정적 생각들이며, 특히 부정적 자아상인 것이다.
물론 부정적 생각이나 부정적 자아상들도 나름의 역할은 있을 수 있다. 사실 인간은 긍정적인 것보다는 부정적인 것에 더 신경을 쓰고 중요도를 부여하게 진화되어 왔다. 왜냐하면 좋고, 괜찮고, 긍정적인 것들은 굳이 더 이상 신경을 쓰고 주의를 주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그것에 주의를 주면서 의도적으로 챙기지 않아도 아무런 해가 없고 좋고 괜찮은 것이다. 그래서 그냥 내버려둔다. 즉 무시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효율성의 문제이기도 하다.
하지만 부정적인 것들은 그냥 내버려두면 안 된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언제 우리에게 해를 끼치고 고통을 주고 문제를 일으킬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불안한 놈들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의식과 우리의 주의는 부정적인 것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그래야 내가 더 안전해지고 나를 보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일종의 ‘자기보호 본능’에 따라 우리는 부정적인 것들에 더 주의깊게 되는 것이다.
문제는 이 ‘주의 깊게 되는 것’을 그만 ‘중요한 것’으로 착각하게 되는 것이다. 혹은 ‘그게 더 사실이고 그게 더 맞다’고 오해하기 되는 것이다. 실제는 필요에 의해 그냥 주의만 더 주는 것일 뿐인데 우리는 ‘그게 중요하고, 사실이고, 맞기 때문’에 그렇다고 착오를 일으키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더해지는 또 하나의 의식 패턴은, ‘내가 맞다’라는 자가 확신의 심리이다. 우리 인간은 어쨌든 ‘내가 맞다’는 기본 심리를 항상 저변에 깔고 살아가게 된다. 이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의 동물적 본능에 가깝다. 어떤 존재이든 그의 내면에는 ‘내가 하고 있는 게 맞다. 나는 제대로 하고 있다’는 본능적 느낌이 있어야 제대로 움직이고 활동하게 된다. 만약 이 본능적 느낌이 없다면 항상 안절부절못하고 허둥지둥 댈 것이다. 그래서 자동적으로 가지게 되는 자가 확신의 이 느낌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문제는, 스스로 이 ‘자가 확신’ 즉 ‘내가 옳다. 내가 맞다’는 이 느낌의 적용을 조절해야 할 때에 조절하지 못하고 획일적으로 적용하는 경우이다. 즉 객관적으로 봐서 내가 틀릴 수 있거나 혹은 뭔가 수정을 해야 할 때조차도 여전히 ‘내가 옳다. 내가 맞다’는 그 느낌에 매몰되어 고집하고 집착하는 경우이다. 그런데 상황에 따라 내가 틀리게 되거나 혹은 상황에 맞지 않게 될 때가 분명 있다. 그런 경우에 ‘내가 맞음’의 고수는 오히려 나에게 손해를 끼치게 된다.
위의 세 가지 기제가 합쳐지면서 최종적인 오류는 아주 강력해지는 것이다. 즉 ‘나의 생각’과 ‘나 자신’을 동일시하는데, 거기에다 ‘부정적 생각, 부정적 자아상이 사실이고, 중요하고, 맞다’가 더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가 맞다’와 연결된다.
오히려 실제의 나를 해치게 됨에도 불구하고 ‘나를 시킨다. 나를 유지한다. 나를 보호한다’는 본능의 잘못된 사용으로, ‘내가 맞다. 내가 옳다’는 본능의 잘못된 적용으로 부정적 자아상과 자기 미움을 고수하게 된다는 것이다. 슬픈 착오이다.
구체적으로 해야 할 일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내가 나를 괴롭히는 자기 부정, 자기 미움의 기제가 이렇듯 무의식적이고 어쩔 수 없는 것이라면 아무 방법 없이 계속 나는 나를 미워하고, 부정하기만 해야 한다는 말인가?
결코 아니다. 당연히 방법이 있다.
우선은, 위에서 말한 자기 미움의 이 숨은 기제를 더욱더 선명히 자각하는 것이다. 알아채고 눈치채는 것이다. 그냥 머리로만 혹은 지식으로만, 이론으로만 아는 게 아니라 일상에서도 계속 정말 선명하게 말이다.
그리고 ‘무의식을 의식화하는 과정’을 만들어야 한다. 이제까지는 위와 같은 기제와 반응이 일어나도 무의식적으로만 일어났고, 정작 당사자인 나도 그저 무의식적으로 그리고 자동적으로 반복했다면, 이제는 위 과정이 일어나면 의식적으로 비춰보는 것이다. 인식하고 자각하고 알아채는 것이다. ‘아, 이게 이러 이러해서 이런 것이지.’라며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의식화하는 것이다. 의식화가 없다면 우린 사실상 모르는 것이다.
기존에는 그냥 내가 하는 것과 나에게 일어나는 것이 당연히 모두 맞고 또 좋은 것이겠거니라고 여겼다면, 이제는 정말 냉철하게 살펴보고 판별하는 것이다. 이것이 정말 맞고 또 나에게 좋은 것인지, 아니면 단지 의식적 본능과 습관에 의해 반복되는 해로운 것인지를 말이다.
그래서 ‘고유한 내 생각’이 아니라 ‘외부에서 주입된 생각’들임을 알아야 한다. 자아상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현재 가진 자아상의 상당 부분은 외부에서 주입된 것들일 수 있음을 눈치채야 한다. 현재의 자아상 모두를 부정하거나 틀린 것으로 여기라는 말이 아니라, 자아상 중에서 그런 부분이 어떤 부분들인지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것을 나의 고유한 자아상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을 눈치채야 한다.
마지막으로, ‘나의 생각’을 ‘나 자신’으로 여기기를 멈추어야 한다. 생각은 생각일 뿐 내가 아니다. 생각을 멈추거나 부정하거나 수정하는 것은 생각을 그렇게 하는 것이지 ‘나 자신’을 어떻게 하는 것이 아니다. 누가 내 생각을 부정한다고 해서 나를 부정한다고 느끼는 것은 순전히 나의 믿음이고 착각일 뿐이다.
특히 ‘부정적인 것들’을 무의식적으로 ‘사실이고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을 멈추고, 그리고 ‘내가 맞다. 내가 옳다’의 무분별한 적용을 또한 멈춘다. 억압이나 무시가 아니라 알아채고 눈치채는 것이다. 그 자각이 선명하면 선명할수록 저절로 멈추어진다. 이것은 이론과 지식으로 하는 게 아니라 실제 받아들임으로 되는 것이다. 그럴 듯 하지만 실제로는 나에게 해를 끼치는 불필요한 정신적 고집과 고수, 집착을 멈추는 것이다. 나 자신을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필요할 때면 당연히 내 생각을 고수해야 하고, 지켜야 하고 또 상대방과 세상에 나의 주장도 강하게 전달하고, 또 실현도 시켜야 한다. 나의 자아상도 마찬가지이다. 선명히 만들고 또 타인과 세상에 보여 주어야 한다. 그것은 기본이고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핵심은 그럴 필요가 없을 때이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을 때는 상황에 따라 가장 적절한 선택을 하면 된다.
‘진짜 이기적’으로 되기
사실은 아주 간단하다. 위와 같이 하는 것이 진짜 이기적인 것이다. 나의 이익에 가장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 어정쩡하게 이기적이고 말고 진짜 이기적이 되어 보자. 습관에 따라 그냥 흘러가면서 나에게 손해가 되게 하지 말고 제대로, 의식적으로 당당하게 생각과 반응의 흐름을 조절해서 나에게 가장 이익이 되게 만들어 보자. 이것이 우리가 살면서 가장해볼 만한 시도가 아닐까.
원문: 필로 이경희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