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언론의 품격>이라는 책이 있다. 문화일보 기자, 조선일보 기자, SBS 기자 등 관록 있는 기자 출신 교수 혹은 현 기자들이 쓰고, 중견언론인들의 모임인 관훈클럽에서 만든 책이다.
<저널리즘의 기본 원칙>이라는 책도 있다. 각각 뉴욕타임스와 LA타임즈 출신의 유명기자인 톰로젠스틸과 빌코바치가 쓴 책이고, 이화여대 이재경 교수가 번역했다.
두 책 모두 한국 언론의 현주소를 이야기한다. 한국 언론의 문제점은 무엇인지, 이 문제점을 해결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저널리즘의 기본이 무엇인지를 논한다. 재미없지만, 유익한 책이다. ‘몸에 좋은 약이, 입에는 쓰다’라는 말이 와닿는다.
FJS에서의 일이다. 교수가 물었다.
손석희는 언론인인가?
손석희는 현재 JTBC 보도부문 사장으로 프라임 타임 뉴스인 <뉴스룸>과 보도국을 총괄지휘하고 있다. MBC에서는 짧게 나마 기자로, 대부분은 아나운서와 앵커로 활동했다.
한 학생이 말했다. 비록 현재 손석희 사장이 사장으로 보도국을 총괄지휘하고 있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언론인으로서의 일은 하지 않는 듯하다. 과거 <손석희의 시선집중>때도 그는 뉴스를 읽기만 했지, 취재는 하지 않았으며 그가 기자로 지낸 시간은 얼마 되지 않기에 그는 언론인보단 방송인에 가깝다고 했다.
마찬가지로 FJS에서의 일이다. 해외 언론인을 취재하는 기사를 써야만 했다. 이탈리아 기자인 오리아나 팔라치를 취재하려 했다. 그러자 교수가 말했다.
엄밀히 말하면 오리아나 팔라치는 인터뷰어지, 기자가 아니다
생각보다 많은 중견기자와 언론고시를 준비하는 학생들이 VOX, VICE를 모른다. 모르는 것뿐만 아니라, 인터넷 매체의 언론인을 ‘언론인’으로 취급하지도 않는다. 위의 사례에서 정확히 드러난다. 손석희와 오리아나 팔라치를 정통 기자로 보지 않는 잣대는(같은 잣대라면, 인터뷰 기사만 쓰는 조선일보 최보식 기자는 기자가 아니다), 뉴미디어 매체에게 더 엄격할 듯하다.
취재처가 없으면, 마와리를 돌지 않으면, 조금이나마 사견이 적나라하게 들어가면, 기자가 아닌 걸까?
며칠 전, 스탠포드에서 성폭행 사건이 일어났다. 올림픽에서 메달을 딸 것으로 예상되는 ‘소위 촉망받는 대학생’이 파티에서 술에 취해 의식이 없던 여학생을 성폭행했다. 여학생은 곧바로 신고했고, 남자는 체포됐습니다. 법원은 그 학생은 ‘감옥이 그의 삶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기에’ 고작 6개월형을 선고했다.
사건의 전개는 흔한 막장 사건이다. 하지만 그가 ‘유복한’ ‘백인’이자 촉망받는 선수이기에 감형을 받아서 크게 논란이 됐다. 관련 기사를 찾아보던 중 미국 뉴미디어 매체 MIC의 기사를 읽었다. 이 기사는 미디어들이 흑인과 백인 피의자를 대하는 이중잣대를 보여준다.
미디어는 흑인을 보도할 때 아래와 같이 ‘날라리처럼 보이는’ 사진이나,
죄인처럼 보이는 사진을 넣는다. 심지어, 경찰이 우측의 흑인을 죽였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반면 백인 피의자를 보도할 때는 위의 사진처럼 ‘환하게 웃고 있는’ 사진이나 ‘멀끔한 정장’을 입은 사진을 넣었다. 비록 경찰서에서 찍는 Mug shot을 확보하지 못했을 때지만, 같은 잣대가 아니다. 비대칭적이다. 동일한 상황(Mug shot이 없는)임에도 불구하고, 흑인을 대할 땐 ‘양아치 같아 보이는’ 옷을 입은 사진을 넣고, 백인을 대할 땐 ‘정장을 입은’ 사진을 넣는 건 명백한 이중잣대다.
미디어의 이중잣대를 비판한 MIC는, 그 비판의 칼날에서 자신들 역시 자유롭지 않다 말한다. 미디어를 비판하며, 자신들 역시 같은 실수를 저질렀다고 고백한다. 아래 문단의 밑에서 셋째 줄을 보라.
The case of 20-year-old Brock Turner, who was convicted of felony sexual assault charges last week, has drawn national attention for the controversy it sparked not just around Turner’s sentencing, but for the way he has been portrayed in the media. In reporting on his story, media outlets — including Mic — were left to use what appeared to be a yearbook photo of Turner rather than his booking photos — because they weren’t released to the public until Monday.
사건이 Buzzfeed를 통해 화제가 된 날짜는 6월 4일이다. 언론이 이를 보도한 건 불과 며칠 전의 일이다. MIC는 미디어의 이중잣대를 지적하는 위의 기사를 6월 7일에 내보냈다. 기사가 화제가 된 지 3일이 되지 않았음에도, 미디어의 보도 행태를 지적하고 스스로의 잘못을 시인하며 본인 매체의 독자들에게 사과했다.
지난 5월 31일, 조선일보는 구의역 사고에 큰 오보를 냈다. 구의역에서 죽은 김군이 약혼녀와 통화를 했기에 사고를 당했다는 식의 기사였다.
작년 8월에 이어 9개월 간격을 두고 지난 28일 발생한 서울 지하철역 스크린도어 사망 사고가 작업현장에서의 개인 휴대전화 사용 때문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그리고 3일 뒤, 조선일보는 작게 나마 정정보도를 게시한다.
본지는 5월 31일자 A10면 ‘서울메트로 스크린도어 수리공 통화 왜 숨겼나’ 기사에서 지난달 28일 지하철 2호선 구의역에서 스크린도어 수리를 하다 지하철에 부딪혀 숨진 김모군이 사고 순간 휴대전화로 통화를 하던 중이었다고 보도했습니다. 작년 8월 지하철 2호선 강남역에서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던 정비업체 직원 조모씨도 휴대전화로 약혼녀와 통화를 하다 지하철에 부딪혀 숨졌다고 보도했습니다. 그러나 경찰 조사 결과 이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확인돼 바로잡습니다. 유족들께 심려를 끼쳐 드린 점 사과드립니다.
한국 언론이 그렇다. 커다란 박스 기사였지만, 고작 몇 줄로 본인들의 사과를 대신한다.
그러나 경찰 조사 결과 이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확인돼 바로잡습니다. 유족들께 심려를 끼쳐 드린 점 사과드립니다.
1위 일간지인 본인들의 파급력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유족들에게 죄송하다는 이야기를 표지가 아닌 A10면에 조그맣게 넣는다.
언론사는 대개 솔직하지 못하다. 세월호 참사 때 언론의 오보를 지적하면서, 본인들의 이름은 쏙 빼놓기 마련이다. 언론사의 이름은 쏙빼놓고, ‘언론이 잘못했다’ 라든지 ‘기레기 사태’ 등등으로 이야기한다. 조선일보는 언론이 잘못했기에 반성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그 언론에 자신들이 들어간다고 솔직히 말하지 않는다. KBS, MBC, SBS 역시 마찬가지다. 어떤 언론사가, 어떤 잘못을 했는지 스스로는 절대 말하지 않는다.
범죄영화, 액션영화에서 악당이나 주인공이 피하는 전형적인 방법이 하나 있다. 바로 ‘군중 속으로’ 숨는 법이다. 제이슨 본이 그랬고, 이든 헌트가 그랬다. 제임스 본드 역시 마찬가지다. 007 Spectre의 오프닝~헬기 시퀀스가 이를 정확히 묘사한다.
주어를 뭉뚱그려 말하면 누가 잘못했는지 사람들은 알 길이 없다. 야권이 아니라, 야당이. 친노가 아니라 구체적인 의원이, 친박이 아니라 어떤 의원들이 있는지 세세하게 말하지 않으면 잘못은 넘어가기 마련이다. 언론이 아니라, 어떤 언론사가, 어떤 기자가 잘못했는지 말해야 진짜 반성이 일어난다.
현직 기자나, 관훈클럽에 계신 분들이나, 교수님들 모두 뉴미디어 매체를 깔보는 경향이 있다. 대부분의 언론고시생 역시 마찬가지다. 버즈피드 뉴스는 인정하지 않고, 뉴욕타임즈 기사엔 끄덕인다. VICE의 영상은 신빙성이 없다고 말하지만, 조선일보의 기사는 믿기 마련이다.
인정한다. 그간 한국의 뉴미디어 매체는 기존 언론사에 비해 수준이 낮았다. 그들이 본 한국 뉴미디어 매체는 수준이 낮았다. 아니, 생각해보면 뉴미디어 매체 수준이 문제가 아니다. 인터뷰로 이름을 떨친 오리아나 팔라치, 라디오 진행자이자 앵커였던 손석희 역시 ‘언론인’으로 보지 않는 판국에 뉴미디어 매체를 인정하라고 하는 건 어불성설인 듯하다.
하지만, 하나 인정하자. 뉴미디어 매체의 수준을 논하기 전에, 진짜 기자가 무엇인지 논하기 전에, 기자를 논하는 당신들의 품격은 어떠한가. 조선일보는 과연 MIC보다 나은 매체인가? 관훈클럽에 계신 분들은 MIC의 Anna Swartz만큼 본인들의 실수를 인정하고, 대중들에게 솔직하게 사과할 수 있는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언론을 갖는 건 무리다. 그런 개인이 존재하지 않는데, 그런 기자가 존재할 수 있겠는가. 그렇지만 본인들의 잘못을 시인하는 MIC와 사과하지 않는 한국 언론을 보고 난 한국 언론이 조금은 부끄러웠다.
원문: 구현모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