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자는 자기가 하는 일을 남에게 잘 설명해야 한다
과학자는 그냥 어두컴컴한 실험실에 쳐박혀서 연기나는 빨강파랑색 플라스크를 들고서 히죽거리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문외한의 생각이고, 업자 여러분들은 과학자로 먹고 살려면 ‘자기가 하는 일을 남에게 잘 설명해야 한다’는 게 얼마나 중요한 지 안다.
그러나 중요하다는 것은 누구나 다 잘 알지만 그걸 자신있게 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라는 것도 모두들 잘 알고 있다. 어떻게 하면 남에게 자신이 하는(혹은 ‘자신이 아는’) 것을 잘 설명하는 과학자가 될 수 있을까.
이미 니가 뭐라고 할지 다 안다. 또 노오오오오력 드립하겠지…
라고 생각하실 분, 네 맞구요. 당첨! 그 다음 패턴도 예측하셨겠지요.
노오오력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하느냐가 중요하다 하겠지…
네 역시 맞습니다. 시나리오 쓰고 있네
그래서 오늘은 자기 일을 잘 설명하는 과학자가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서 연구자를 지망하는 사람이 여러분께 몇가지 꼼수를 설명하도록 한다. 이전에 프레젠테이션 어떻게 하면 효율적으로 하냐에 대한 이야기는 모 여사님 말씀 빌려서 좀 이야기했다. 그땐 발표자료를 어떻게 효율적으로 만드는지 설명했다면, 여기서는 더욱 전반적인 발표에 임하는 자세에 대해서다.
1. 당신의 청중이 누군지를 알라
아다치 미츠루 아저씨의 만화 ‘H2’ 의 제일 끝권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온다. 즉 주인공인 쿠니미 히로가 9회가 들어서 구위가 떨어졌다고 상대팀은 좋아했는데, 사실은 이것은 2번 타자에게 맞는 구위였고, 3번 타자가 나오니 더 강력한 공을 던져서 아웃시켰다. 그리고 주인공의 라이벌인 히데오가 나올 차례가 되니 ‘4번 타자에게는 어떤 구위가 나오냐’ 를 궁금해한다.
어이 이 아저씨 지금 웬 만화 이야기…하겠지만, 말하고 싶은 요점은 일단 당신의 이야기를 듣는 청중에 따라서 같은 내용도 커스터마이징이 필요하다는 이야기이다. 동일한 연구내용이라고 하더라도 이것을 랩 미팅을 위해서 발표를 할지, 학위 논문을 위한 커미티에서 발표를 하는지, 아니면 전문학회의 심포지움에서 발표를 하는지, 혹은 타 학교 혹은 연구기관을 위한 초청세미나를 하는지, 그것도 아니라면 일반인을 위한 과학강연을 하는지에 따라서 어느 정도 선까지 발표를 할지는 다 다르다.
일단 제일 중요한 것은 참석하는 사람들의 ‘콘센서스’가 어디에 있느냐를 파악하는 것이다. 당신의 이전 연구 내용을 다 알고 있을 랩 미팅이라든지, 논문 심사 커미티라면 디테일한 데이터를 보여주는 것이 필수적이겠지만 연구를 이해하는데 필요한 기본적인 백그러운드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신경을 덜 써도 될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해당 세부전공이 아닌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세미나, 즉 타 학교 혹은 연구기관을 위한 세미나라면 이런 사람들이 이 연구의 의의를 알아볼 수 있도록 충분한 백그라운드를 제공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반면에 연구의 핵심적인 내용에는 속하지 않는 지엽적인 데이터까지 꾸역꾸역 보여주는 것은 가급적이면 삼가라는 이야기이다.
특히 당신 인생에서 중요한 발표(가령 취업을 위한 Job Talk/Seminar)일수록, 당신의 세부전공 내용을 아주 잘 꿰고 있는 사람이 청중일 가능성은 낮아지기 마련이다. (아니, 그 내용을 전문가처럼 아는 사람이 해당 조직에 이미 있는데 당신을 뽑을 일이 있을까?)
이와 같은 것은 기본에 해당하는 이야기이고,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면 적극적으로 청중들의 관심사를 파악하여 이들의 기대에 부응하도록 발표 자체를 조절하는 것도 가능하다. 가령 어떤 대학/연구소에서 초청받아 자신의 연구 결과를 발표하러 간다고 하자. 이 경우라면 해당 대학/연구소에 있는 사람들이 어떤 연구를 하고 있는지 정도는 미리 살펴보는 것이 좋지 않을까?
‘내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의 원래 관심분야’ 를 알아둔다면 이를 바탕으로 발표를 ‘커스터마이징’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전혀 연관관계가 없는 분야의 사람들이라도 이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해당 분야의 사람들이 익숙한 예를 이용하여 설명을 할 수도 있는 것이다.
2. 당신의 청중이 무엇을 모르는지를 알라
이렇게 당신의 청중이 무엇을 알고 있는지, 무엇에 관심이 있는지를 아는 것이 효율적인 설명의 기본이라면, 그 다음 단계는 이들이 ‘무엇을 모르는지’에 대해 알아볼 차례이다. 특히 이러한 것은 요즘 많이 유행하는 학제적 연구(Interdisplinary Research)라고 쓰고 전공 다른 사람들이 모여서 서로 싸우다가 헤어지는 것이라고 읽는에서 중요하다.
어떤 분야를 막론하건 관용어와 약어 등등이 많이 사용된다. 특정한 분야 내에서 관용적으로 사용되는 용어는 그 분야의 사람들과 소통할때는 아무런 문제 없이 사용된다. 그러나 조금만 다른 분야로 넘어가 우리 분야에서는 학부생 꼬꼬마도 다 아는 단어를 다른 분야에서는 분야의 석학이라는 사람이 모를 때가 있다!
가령 단백질 결정학을 하는 사람이라면 다들 아는 MAD, SAD, Se, MR, MIR, Unit Cell, Asymmetric Unit 등등의 용어는 조금만 다른 분야의 사람에게 아무런 설명없이 써주면 MAD는 그냥 미친거고, SAD는 슬픈거고, Se는 쎄쎄쎄의 쎄냐고(…) 할 것이다. 조금 다른 분야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발표할 때는 특정 업계 사람들이나 아는 용어는 가급적 피하거나,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처음 인트로덕션 부분에서 반드시 설명을 하고 넘어갈것! 아니면 언급을 할때 약자 대신 풀네임을 언급해 주든지.
그리고 동일한 용어를 학문 분야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 경우가 종종 있다는 것을 명심하기 바란다. 전자.통신을 전공하는 사람에게 프로토콜 (Protocol)이라고 하면 TCP/IP니 HTTP니 하는 것을 생각하겠지만 대개의 생물학 하는 사람들에게는 ‘실험 절차’를 떠올린다. 크레인(Crane) 은 공사장에서 사용되는 무거운 것을 들여올리는 시설물이겠지만 조류 관찰하는 사람에게는 ‘학’이 된다. 이런 극단적인 경우가 아니더라도, 전공 분야에 따라서 용어의 의미 혹은 뉘앙스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3. 당신의 청중이 어떻게 알고 싶어하는지를 알라
파워포인트와 같은 비주얼 에이드를 사용하는 프레젠테이션 이외에도, 다른 방식으로 당신의 하는 일을 설명할 기회는 많다. 가령 학회 등에 참석하여 포스터 발표를 할 때는 어차피 자신의 포스터가 비주얼 에이드가 될 것이므로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의 도움이 없이 자신의 일을 구두로만 설명해야 한다면? 비주얼 에이드도 없고, 그리 많은 시간이 주어지지도 않지만 짧은 시간 안에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해야 한다면? 아니면 당신이 영업을 하기 위해서 연구실에 들렸다고 하자. 바쁜 연구자를 붙잡고 몇십 분씩 자신이 전달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이를 위해서는 가장 짧은 시간에 효율적으로 자신이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만 전달하는 기술이 필요하다.
이런 것의 극단적인 예가 엘리베이터 스피치(Elevator Speech)이다. 가령 학회장의 엘리베이터에서 학계(혹은 산업계)의 중요한 사람을 만났다. 엘리베이터가 움직이는 약 30초간 자신을 소개할 수 있을까? 혹자는 학계(혹은 사업)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여기에 능해야 한다고 카더라. (‘오 님 그거 잘하실듯’ 하실 독자가 있다면 ‘네 그런 것에 능하면 여기서 지금 블로그할 시간이 그리 많진 않겠죠’라고 답해드리겠다 ㅠ.ㅠ) 꼭 엘리베이터가 아니더라도, 학회의 리셉션 장소 등에서 우연히 만난 사람들과 그냥 뻘쭘하게 있기보다는 ‘님 뭐하심~’ 식으로 안면을 트는 목적에도 유용하다.
엘리베이터 스피치는 지속시간 25-30초, 단어로는 80-90단어, 문장으로는 8-10문장 정도로 구성된다고 한다. 이것의 목적은 대화를 듣는 사람에게 긍정적인 인상을 주고, 나중에 대화를 할 기회를 만드는 것이다. 결국 연구자의 ‘엘리베이터 스피치’에는 이 정도의 내용이 있어야 하는데,
- 나는 지금 어떤 주제의 연구를 하는데
- 내가 그 연구를 통해서 풀려고 하는 의문은 무엇인가?
- 왜 그 문제를 푸는 것이 필요한가?
- 내 일을 다른 전공의 사람들과 어떻게 연결시킬 수 있는가?
아니 이것을 30초 안에 설명할 수 있겠나? 하실 분도 있겠지만 앞에서 말했듯이 엘리베이터 스피치는 처음 보는 사람과 안면을 트고 대화의 시작점을 여는 것으로 족하다. 이런 한정된 시간으로 어떻게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라고 생각한다면 한번 다음의 예를 보기 바란다. 여기서는 30초는 아니고 상당히 긴(!) 2분 간의 시간이 주어진다.
엘리베이터 스피치가 그런 것이라면 이것보다 조금 더 길게, 비주얼 에이드 없이 상대방과 대화를 나누어야 할 경우도 종종 존재한다. 보통 미국의 연구중심 대학에서 교수를 채용한다든지 할 때 소위 ‘Chalk Talk’이라는 것을 많이 사용하는데, 첫째 날에는 보통 비주얼 에이드를 사용한 공개 발표를 하고, 둘째 날에는 그런 것 없이 주로 ‘미래의 계획’ 에 대한 톡을 한다.
즉 앞으로 어떤 연구를 하겠으며, 어떤 식으로 연구비를 확보할 것이며, 학과의 다른 사람들과 어떻게 코웍을 할 수 있으며 등등… 이런 것들에 대한 자료들은 여기나 저기에 있으니 참고를 하기 바란다. 여튼 이러한 짦은 설명에서는 좀 더 빈번한 질문, 가끔은 이러한 설명 도중에 질문을 받기 마련인데, 다음과 같은 것을 명심하는 것이 좋다.
- 질문에 대한 최선의 답변을 할 것: 비록 질문하는 사람이 당신보다 해당 분야를 잘 몰라서 해당분야 전문가가 보기에는 조금 우스워 보이는 질문을 할지라도 말이다.
- 질문을 잘 이해못했으면 다시 물어봐서 정확히 질문한 의도를 파악할 것: 가끔 질문과 동문서답의 이야기를 하는 분들이 있는데, 그러지 말자.
- 잘 모르면 모른다고 할 것: 괜히 질문을 받아서 내용을 제대로 답하지도 못하면서 모른다고 하기에는 자존심이 용납을 못 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모른다고 하자. 그런데 이럴 때 쓰는 일종의 ‘관용구’가 있는데, ‘It is great question!’ 또는 ‘참 좋은 질문이신데요’이다.
‘자… 잘 모르겠습니다 죄송합니다’는 하지 말자.단 ‘여기까지는 알려졌는데 당신이 물어본 지점에 대해서는 아직 알려져 있지 않았다’ 정도로 ‘현재까지 인류에게 알려진 지점’과 ‘내가 모르는 지점’의 선을 제대로 긋자.
4. 당신의 청중이 얼마나 알고 싶어하는지를 알라
학회 같은데 가보면 가끔 자신이 얼마나 무지막지하게 많은 데이터를 생산했는지를 자랑하고 싶어하시는 분들이 있다. Figure 1 A-Z 까지 한 화면에 때려 넣고, 끝없이 이어지는 데이터… 본 논문 아닌 서플먼트에 실은 데이터임에도 불구하고 무조건 보여주시는 센스… 시간이 부족해서 좌장이 계속 종을 울리는데도 막무가내로 데이터 보여주기에 급급하다가 결국 중간에 다 생략해서 넘어가고 결론으로 가서 끝내는 세미나…
그런데 당신이 얼마나 일을 열심히 했는지를 과시하고 싶은 그 욕망은 이해하겠지만 과유불급. “내가 일을 얼마나 열심히 했는데요” 시위는 랩 미팅에서나 하시라… 그나마 해당 전공자들이 모이는 전문 학회에서야 이런 것이 좀 이해가 된다. 전문학회에서 제대로 된 데이터를 보여주지 않고 변죽만 울리다 오는 것 보다야 어쩌면 나을수도 있다.
그러나 해당 전공자들만 참석하는 학회가 아닌 여러 분야 사람들이 모인 학회, 혹은 초청 세미나에서 쓸데없는 디테일은 대개 없느니만 못하다. 당신이 청중에게 전달하고 싶은 최소한의 핵심만 빼고 나머지는 다 쳐내라! 논문 패널에 A부터 Z까지 다 나열했다고 이를 한 화면에 다 보여주는 일은 하지 말고, 이 중에 핵심만 뽑아서 보여줘라. 프레젠테이션을 한다면 이때 애니메이션을 사용하는 것도 괜찮다.
“청중들이 지루해할까봐 안 보여줬는데 나중에 물어보면 어쩌죠?” 라고 생각하실 분들이 있다. 그렇다면 질문이 있을때 보여줄 수 있도록 디테일한 내용의 슬라이드는 뒤에 모아둔다. (본 프레젠테이션에서는 보여주지 않는다.) 처음부터 질문이 나올 여지가 없이 모든 것을 보여주는 것보다는 적절히 질문이 나올 여지를 둔 다음에 질문이 들어오면 그때서야 준비한 것을 ‘짠~’ 하고 보여주면 청중들은 더 깊은 인상을 받는다는 것을 명심해라. 청중도 좀 질문을 할 맛이 나도록 세미나를 하는 것도 기술이다!
5. 이제 연습을 해라 연습!
뭐든 그렇지만 아무리 인터넷에서 이런 글을 백개 찾아서 읽는다고 해도 연습을 안하면 자기가 하는 일을 제대로 설명하는 과학자가 되긴 힘들다. 연습을 해라 연습을! 연습할 때는 반드시 피드백을 할 수 있는 누군가(가능하면 지도교수, 선배 등 자신보다 경험이 많은 사람)를 참석시키고 피드백을 받는다.
가능하면 ‘랩 미팅’이라든가 ‘학과 내에서의 세미나’ 등과 같이 ‘연습경기’를 할 수 있는 기회를 많이 만드는 것이 좋다. 만약 이러한 기회를 학생/포닥 등의 트레이니에게 제대로 제공하지 못하는 지도교수/연구책임자라면 당신은 지금 당신의 할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월급루팡이라는 것을 명심하라(…).
근데 아무래도 랩 미팅이니 이런 데서는 자유롭게 토론할 분위기가 되지 못한다고? 이런 이야기를 하는 분(특히 국내에서 공부하는 분들) 이 많을 것으로 생각된다. 만약 그러하다면 스스로 그런 분위기로 토론할 수 있는 커뮤니티를 자신의 연구기관 혹은 학교, 혹은 지역에 만들어 보는 것은 어떠한가.
과학토론은 위아래 따지고 하면 원래 잘 안되는데 서로 다른 소속기관에 있는 사람들끼리 모인 별도의 커뮤니티에서는 의외로 잘 될 수도 있다. 군생활 경험이 있는 분이라면 아실지도 모르겠지만 자기 중대원끼리는 서로 계급따지고 그러지만 다른 부대 사람들은 ‘아저씨’ 취급이듯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