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부마항쟁 때 박정희 정권이 처음 투입한 계엄군은 해병대였다. 해병대는 과격 진압보다는 ‘악으로 깡으로’ 돌 맞으면서도 팔짱끼고 버티는 방식으로 시위대에 맞섰다. 거점 방어는 가능했지만 수만 시위대를 해산시킬 수는 없었다. 그제야 공수부대가 투입된다. 1공수와 3공수부대였다. 그들은 광주에서와 똑같은 만행을 저질렀고 그런 폭력을 경험한 바 없는 시위대는 기가 꺾였다. 바로 그 시점에서 박정희가 죽었다.
공수부대는 알다시피 적진 한복판에 떨어져 생사를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대한민국 최정예부대다. 이 전의에 굶주린 늑대같은 부대를 민간인 한가운데 풀어놓을 생각을 했던 건 5.16 후의 박정희였고 나름의 효과를 거둔다. 그 효과를 철저히 학습한 것이 전두환이었다. 그는 비상계엄 확대 이전 전국의 도시에 공수부대를 풀어놓을 계획을 세워 두고 있었다.
광주에 투입돼 피바람을 일으킨 7공수부대만 해도 광주(33, 35대대), 대전(32대대), 전주(31대대)로 나뉘어 투입됐다. 바로 부산에서처럼 ‘본때’를 보여 주면 잠잠하리라 여긴 탓이다. 다른 지역에서 시위가 일어났다 하더라도 비슷한 만행은 예고돼 있었다.
사진을 보면 방석모를 쓴 전경들은 기가 질린 듯 뒷전에 서 있고 화이바 차림의 군인들은 한 번 힘을 다해 내려치면 바로 머리가 수박처럼 금이 갔다는 박달나무 몽둥이를 휘두르며 시민들을 엎드린 채 고개도 못들게 만들어 놓고 있다. 그들은 진압하러 온 게 아니라 사람을 잡으러 왔고 , 사람을 몇 잡아 ‘시범케이스’로 삼는 것으로 시위를 가라앉히려던 정권의 독니와 발톱이었다. 즉 그들에게 시민은 적이었다.
만약 광주 시민들마저 부마항쟁에서처럼 듣도보도 못한 정예부대의 폭행에 기가 질려 “어마 무시라” 하고 물러섰다면, 그래서 아무 ‘피도 고통도 없이’ 전두환이 권좌에 순조롭게 앉아 해먹을 것 다 해 먹었다면 그 이후로도 우리는 툭하면 검은 베레모의 출동을 목격해야 했을 것이다. 광주 시민들이 용감하게 공수부대의 만행에 맞섰기에, 비록 다른 지역의 외면 속에 처참하게 밟혔을망정 이 땅의 권력자들은 그 피를 두려워하여 공수부대같은 특수부대를 시위 진압에 투입하는 망녕을 버릴 수 있었다는 뜻이다.
6월 항쟁 때 위수령을 막았다는 사람들은 꽤 많다. 미국 외교관부터 치안본부장, 군 지휘관들까지 자신이 전두환의 위수령 선포를 막았노라 자임하는 이들이 많지만 전두환의 발목을 가장 크게 움켜잡은 것은 광주였을 것이다. 장성들도 “또 군의 손에 피를 묻히란 말이냐?”고 반발했고 고립된 광주 아닌 천만 인구의 도시 서울에서 충돌이 일어난다면 그때는 전두환 자신의 미래도 장담할 수 없었을 테니까.
아울러 6월항쟁 때 공수부대는 출동 명령을 받지 않았다고 안다. 수방사를 비롯하여 17사, 30사, 20사 등 이른바 충정부대에는 대부분 위수령에 따른 병력 이동 명령이 떨어졌지만 1,3,5,7,9,11 홀수 숫자의 공수여단 이름은 거론되지 않았던 것이다. 광주 덕분이었다. 광주에 특정하지 않는다면 부당한 정권과 약탈자들의 폭력에 저항했던 시민들의 피와 눈물 덕분이었다.
역사란 꽤 냉엄한 채권자다. 시일의 길고 짧음이 있을 뿐이지 빚을 빌려 준 것은 반드시 받아낸다. 어느 추심 회사 직원 못지않게 잔인하고 찔러도 피 한 방울 안날 독기를 발산하면서. 동시에 질긴 채무자다. 자신이 사람들에 빚진 것이 있으면 좀체 내주지 않으며 찔끔찔끔만 갚아 나가는 개념없는 채무자다. 하지만 떼먹지는 않는다.
1980년 5월 20일 광주에 투입돼 있던 3공수부대는 첫 집단발포를 한다. 자신들이 휘두른 곤봉과 찌른 대검과 걷어찬 군홧발에 분노한 시민들의 파도 앞에서였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쓰러졌다. 언뜻 그들의 죽음은 우리 삶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 듯 하지만 그들의 죽음 하나 하나는 오늘날 우리의 삶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고 우리의 일상을 규정한다.
오늘의 우리도 그렇다. 오늘 우리가 한 행동, 내뱉은 말, 조그만 실천과 방임, 결기와 움츠림은 곧 역사에 빚을 주거나 지는 행위다. 역사는 부지런히 주판알을 퉁기며 그 플러스 마이너스를 매겨 장부에 기입하고 있을 것이다. 그 값은 나이먹은 우리와 우리 아이들이 받을 것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