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테네시 주의 멤피스는 1968년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살해당한 곳입니다. 멤피스에 사는 사람치고 이를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100년 전에 일어났던 끔찍한 역사의 한 장면은 많은 사람의 기억 속에서 잊힌 지 오래입니다.
남북전쟁 종식 직후였던 1866년 5월 1일, 멤피스에서는 흑인들에 대한 대학살이 자행되었습니다. 수십 명이 사망했고, 다친 사람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이 사건에 대한 책을 낸 테네시대학 역사학과의 스티븐 애쉬(Stephen Ash) 교수는 당시 언론이 이 사건을 “인종 폭동(race riot)”이라 명명했다고 전합니다.
사태는 북군 소속의 흑인 병사들과 백인 우체부들 간의 싸움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곧 백인들 사이에서는 흑인들이 전면적인 봉기를 일으켰다는 소문으로 부풀려졌고, 백인들로 구성된 폭도가 멤피스 남부를 누비며 흑인이 눈에 띄면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총으로 쏘아 죽이기에 이릅니다. 사망자는 46명이었고, 다치거나 강간을 당한 사람들도 다수였습니다. 흑인 교회와 학교, 가정집은 불에 타서 무너졌죠. 이 사건은 남북전쟁 이후 정치 지형 형성과 노예 해방으로 이어진 개헌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애쉬 교수의 책 <멤피스 대학살: 남북전쟁 1년 후 미국을 뒤흔든 인종 폭동(A Massacre in Memphis: The Race Riot That Shook The Nation One Year After The Civil War)>은 잊혔던 역사의 한 페이지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멤피스에 사는 변호사 필리스 알루코는 이 책을 읽고 난 후, 자신이 이 일에 대해 전혀 몰랐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고 기념비 건립을 추진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녀는 우선 전미유색인종지위향상협회(NAACP)에 연락해 후원과 재정 지원을 받아냈죠. 그러나 기념비 건립을 승인하는 테네시 주 역사 위원회에 기념비 건립 허가 신청서를 낸 후 뜻밖의 걸림돌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위원회는 “인종 폭동”이라는 단어를 기념비 문구 가장 위에 넣어야 한다는 입장이었지만 이를 불편하게 여긴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멤피스대학의 역사학자 비벌리 본드가 그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어떤 것에 어떤 이름을 붙이는가는 매우 중요합니다. 내 이름이 존인데, 누군가가 나를 고집스럽게 조니라고 부른다고 생각해보세요. 이런 경우 이름은 권력관계를 반영하죠. 20세기의 맥락에서 대부분의 사람은 ‘인종 폭동’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흑인들이 동네를 파괴하고 다니는 그림을 떠올릴 겁니다.” 본드의 설명입니다.
위원회에서 “인종 폭동”이라는 단어에 반대표를 던졌던 비벌리 로버트슨 위원 역시 박물관에 전시된 유물과 마찬가지로 학술 용어도 정기적인 점검과 보수가 필요하다는 입장이었지만 위원회 전체를 설득하는 데 실패했습니다.
결국 NAACP는 민간 차원의 기념비를 세우는 것으로 계획을 바꾸었습니다. 기념비에는 “1866년 인종 폭동”이라는 제목 대신 “1866년 멤피스 대학살(Memphis Massacre)”이라는 제목을 새겼습니다.
최근 미국 남부에서는 남부와 노예제의 역사를 제대로 기억하기 위해 각종 기념비부터 다시 살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독일이 홀로코스트를 다루는 것처럼 철저한 반성과 인식을 담아서 과거를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1866년, 수많은 흑인이 목숨을 잃었던 사건을 “폭동”이 아닌 “대학살”로 명명한 기념비는 하나의 시작점일지도 모릅니다. (NP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