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옮긴이: 반기문 UN 사무총장의 방한과 함께 그가 내년 대선에 출마할지 여부를 두고 국내 언론이 비상한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 이코노미스트가 지난 호에 반 총장의 후임 UN 사무총장을 어떻게 뽑아야 할지, 어떤 점을 고려해야 할지에 관해 쓴 칼럼이 국내에서는 뜨거운 감자였습니다.
이 글은 반 총장의 실수나 무능력, UN 조직 전반에 팽배한 관료주의를 두루 지적한 글이기도 하지만, 제목(“Master, mistress or mouse?”)에서 볼 수 있듯 다음 사무총장이 갖춰야 할 덕목이나 UN을 제대로 굴러가는 조직으로 만들기 위해 개선이 시급한 부분을 검토한 글이기도 합니다. 글의 전문을 번역해 소개합니다.
독이 든 성배
UN 사무총장 자리는 독이 든 성배와도 같다. 역대 여덟 명의 사무총장 가운데 널리 존경받는 사람은 다그 함마르셸드(Dag Hammarskjold) 한 명밖에 없다. 스웨덴 출신의 함마르셸드는 사무총장 재임 중 독립 후 처음 발생한 콩고 위기를 해결하러 가다가 비행기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기민하고 매력적이었던 가나 출신의 코피 아난(Kofi Annan) 사무총장 정도가 그 다음 훌륭한 사무총장이라 할 만하다. 1997년부터 2006년까지 사무총장직을 수행한 아난은 분쟁 지역에서 조정자 역할을 잘 하지 못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반면, 한국 출신의 반기문 사무총장은 대단히 둔한 인물로, 역대 최악의 사무총장으로 꼽을 만하다.
반 총장의 장점도 없지 않다. 그는 전반적으로 인품이 무난하고 끈질긴 면도 있다. 새로운 개발 목표를 설정하는 데 앞장섰고, 무엇보다 지난해 말 파리에서 열린 기후변화협약에서 가시적인 성과를 도출해내는 데 큰 역할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말주변이 없고, 의전에 집착한다. 무얼 해도 부자연스러울 때가 많고 깊이가 부족하다. 벌써 9년 동안 사무총장 자리에 있었는데도 아직도 해서는 안 될 실수를 한다.
최근에는 사하라 서쪽 지역을 모로코가 “점령”하고 있다고 말해 물의를 빚었다. 사실 가장 중립적인 제삼자가 보고 판단한다면 모로코가 욕심을 내서 일부 지역을 점령하고 있다는 사실에 동의하긴 하겠지만, UN 사무총장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오자 모로코로서는 해당 지역의 평화를 유지하던 UN 사무관과 직원들을 내쫓을 더없이 좋은 구실을 얻은 셈이었다. 실제로 UN 직원들은 짐을 싸야 했다.
후보의 능력이나 명망은 중요하지 않다
전반적으로 반기문 총장은 UN의 가장 큰 결점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사무총장을 뽑을 때 최소 공통분모를 뽑는다는 점, 즉 능력이나 명망보다 핵심 이해 당사자인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다섯 나라(미국, 러시아, 중국, 영국, 프랑스) 누구도 반대하지 않을 인물을 뽑으려다 보니 뽑히는 자질이 부족한 사무총장이라는 것이다. 중국은 아시아 사람이 사무총장이 되길 원했다. 미국은 반 총장 정도면 충분히 자기 편을 들어주리라 여겼다. 러시아에는 특별히 반대할 명분을 찾지 못할 만큼 별 특징이 없는 인물로 보였다.
문제는 UN이 올해 말 또 그런 식으로 반 총장의 후임을 뽑을 것 같다는 데 있다.
UN 관계자들의 말을 종합해보면 반 총장의 후임은 동유럽 출신 여성이 되어야 한다는 공감대가 자리 잡은 것 같다. 아직 동유럽 출신도, 여성도 한 번도 사무총장이 된 적이 없다. 출신 배경만 놓고 보면 동유럽 여성 후보에 필적할 만한 후보군을 찾기 어렵다. 불가리아는 UN의 문화교육기구 유네스코(UNESCO)의 사무총장 이리나 보코바(Irina Bokova)를 후보로 밀고 있다. 하지만 보코바 총장은 젊었을 때 소비에트 공산주의에 심취해 정치적으로 소련 공산당에서 활동했던 인물이다. 미국이 달가워할 리 없다.
그렇다면 불가리아는 유럽연합 예산위원장인 크리스탈리나 게오르기에바(Kristalina Georgieva)를 추대할 수도 있다. 본인도 도전해볼 생각이 없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지만, 이번에는 러시아가 거부권을 행사할 가능성이 아주 높다. 우크라이나에서의 무력 충돌 이후 유럽연합의 대 러시아 제재를 집행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게오르기에바 위원장이기 때문이다.
9명 후보의 등장, 강대국의 입맛은
아마도 어느 시점에서 상임이사국 누구도 격렬히 반대하지 않을 그런 ‘동유럽 출신 여성’ 후보가 발굴될 것이다. 하지만 벌써 후보 아홉 명이 그동안의 선례를 깨고 막후에서 로비를 펼치는 대신 사무총장 자리에 도전하겠다고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그 아홉 명 가운데 동유럽 출신은 일곱 명, 그 가운데 여성은 세 명이다. 최근 UN 총회가 열린 뉴욕에서 각 후보들은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후보 면면을 살펴보면 아홉 명 가운데 동유럽 출신이 아닌 두 명만 인상적이다. 먼저 포르투갈 총리 출신의 안토니오 구테레스(António Guterres)는 UN 난민기구를 원활하게 이끈 경력이 돋보인다. 뉴질랜드 총리 출신인 헬렌 클라크(Helen Clark)는 UN 개발계획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왔다. 그런데 일단 미국이 태평양에서 자국군의 핵실험에 반대해 온 클라크 후보에게 우호적이지 않다고 한다. 러시아는 두 후보 모두 마뜩찮아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뒤늦게 뛰어든 후보도 몇몇 눈에 띈다. 케빈 러드(Kevin Rudd) 호주 전 총리는 중국어에 능통하다는 게 장점이다. 하지만 지지 기반이 너무 취약하다. 아르헨티나 외교부 장관이자 오랫동안 UN에서 일했던 수사나 말코라(Susana Malcorra)도 출마를 저울질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UN 여성기구의 대표직을 맡았던 미첼 바첼레트(Michelle Bachelet) 칠레 대통령도 물망에 오른다. 또한 안겔라 메르켈(Angela Merkel) 독일 총리 이름도 조심스레 거론된다. 하지만 많은 이들은 그가 갈수록 쉽지 않은 자리가 되어가고 있지만 독일 총리직을 계속 수행할 것으로 예상한다.
일반 회원국들은 이미 강대국의 입맛에 맞춰 추대된 후보 한 명을 두고 의미없는 찬반 표결을 하는 대신 상임이사국 다섯 나라가 최종 후보 두 명을 추린 뒤 전체 투표로 사무총장을 선출하기를 원한다. 하지만 그렇게 하려면 우선 현재 UN 헌장을 굉장히 유연하게 재해석해야 한다. 예를 들어 여러 후보가 앞다투어 출마를 선언하면 일종의 공개 청문회가 열리는데, 이 자리에서 명백하게 자격 미달인 후보가 고배를 드는 상황이 생길 수도 있다.
사무총장의 역량 차이에 목숨이 달려 있다 (The margins matter)
사무총장은 전지전능한 존재가 아니다. 반기문 총장이 아니라 누구였더라도 반 총장 임기 중에 발발한 분쟁을 사전에 막을 수는 없었다. 최근 브룬디나 콩고 동부에서 발생한 분쟁 등에 UN 사무총장 혼자 힘으로 마침표를 찍어주기를 바라는 것도 이뤄질 수 없는 바람이다.
그럼에도 사무총장의 역량은 대단히 중요하다. 아무리 UN이 결함이 많은 조직이라도 여전히 내전이 일어나고 정세가 혼란할 때 우리가 믿고 기댈 수 있는 최후의 보루가 UN이기 때문이다. 갈등이 증폭되고 분쟁으로 비화되는 걸 UN도 막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해도, UN 사무총장은 많은 경우 분쟁 당사자들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내 앉힐 수 있는 대단한 권위를 가진 존재다.
협상이 이뤄진 다음에 위태위태한 평화를 관리하고 정착시키는 임무도 결국 UN의 몫이다. 정말 가까스로 상황을 진정시키거나 간신히 최악의 사태를 피하는 정도일 때도 많다. 하지만 그렇게 최악의 사태를 한 번 피함으로써 분쟁 지역에 사는 사람 수천, 수만 명의 목숨을 구할 수도 있는 일이다.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사무총장의 작은 역량 차이가 누군가에게는 생사의 문제인 것이다.
UN의 문제들
UN 사무총장은 UN의 최고 행정 수반이기도 하다. 행정가로서도 반기문 총장에게 높은 점수를 주기 어렵다. 반 총장 임기 내내 UN은 시급한 개혁을 해내지 못했다. 오랫동안 UN에서 일했던 앤서니 밴버리(Anthony Banbury)는 지난 3월 UN을 떠난 뒤 <뉴욕타임스>에 쓴 글에서 작심한 듯 UN을 위한 직언을 쏟아냈다. 그는 현재 UN은 “조직의 운영상 문제점이 너무나도 많아서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고 썼다. 세계 각지에 주둔하고 있는 UN 평화유지군을 운영하는 데 드는 예산부터 놀랄 만큼 주먹구구식으로 편성되고 제대로 된 감사도 이뤄지지 않는다고 꼬집었다. 가장 큰 문제는 인력을 충원하는 것을 비롯한 인사 체계인데, 채용 절차가 너무나 복잡해 사람 한 명을 채용하는 데 평균 213일이 걸린다고 썼다.
실력이나 능력이 아니라 정치적인 고려가 먼저 이뤄지는 곳이 UN이다. 어느 자리에는 어느 지역 출신이 몇 명 있어야 한다는 암묵적인 관행 때문에 능력이 없거나 심지어 부패한 사람이 UN 직원이 되기도 한다. 반 총장 취임 전에 일어났던 이라크의 석유-식량 비리 사건만 보더라도 많은 고위 관료들이 뇌물이 오가는 정황을 알고도 이를 막지 못했고, 아예 여기에 연루된 관료도 있었다.
최근 중앙아프리카공화국에서는 UN 평화유지군이 지켜줘야 할 시민들을 오히려 성폭행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평화유지군을 구성하기 어려워지자 콩고민주공화국군처럼 악명높은 군대에 머릿수를 채워달라고 요청한 정치적 편의주의가 빚어낸 끔찍한 일이었다. UN 인권위원회의 스웨덴 출신 관료 안데르스 콤파스(Anders Kompass) 씨는 프랑스군이 저지른 성폭행 사건을 고발하고 나섰다가 오히려 자격이 정지됐다. 고위 관료들이 짐짓 모른 체하거나 무마하려던 문제를 제기했던 콤파스 씨는 후에 다시 복권됐지만, 이 사건은 UN이 얼마나 내부적으로 부패했는지를 보여주는 또 하나의 사례로 기록됐다.
현명하면서도 강단 있는, 현실적이면서도 이상적인 가치를 믿는
UN의 의사결정 과정과 통치 방식도 전반적으로 거센 비판을 받고 있다. 즉, 인구가 빠르게 늘어나거나 경제 성장을 이룬 신흥 강국들이 5년에 한 번씩 사무총장 뽑을 때나 주어지는 형식적인 의결권 말고 실제로 국력에 걸맞는 목소리를 내고 싶어하는 것이다.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을 현재 다섯 나라에서 더 늘려야 한다는 주장은 오래전부터 제기돼 왔다. 브라질, 독일, 인도, 일본 같은 나라는 상임이사국이 될 수만 있다면 현재 미국, 러시아, 중국, 영국, 프랑스 다섯 나라에 주어진 절대 권력과도 같은 거부권을 처음에는 요구하지 않겠다는 뜻을 내비치기도 했다.
하지만 각 나라의 상임이사국 진출에 결사 반대하는 나라가 꼭 있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인도의 상임이사국 진출을 파키스탄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으려 할 것이다. 중국은 절대로 일본을 받아들일 리 없다. 브라질의 진출은 아르헨티나나 멕시코의 견제를 받을 것이다. 게다가 이 나라들이 진출하면 아프리카 대륙에서도 상임이사국을 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올 것이다. 나이지리아나 남아프리카공화국이 한 자리를 더 마련하라고 요구할 것이다. 아랍 국가들은 어떤가? 그렇게 따지면 형평성 문제는 끝도 없다.
UN의 실정, 실수는 그 어느때보다 명명백백히 드러났고, UN을 개혁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전에 없이 거세다. 하지만 아마도 대부분 개혁 논의는 협상 테이블에 오르기도 전에 좌초될 것이다. 상임이사국 다섯 나라가 자신들의 권한을 약화시킬지 모르는 그 어떤 시도도 사전에 차단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가난한 나라와 약소국도 마찬가지로 UN 조직이 효율적으로 돌아가고 곳곳에 있던 눈먼돈이 사라지는 걸 원치 않는다. 각종 분담금을 낼 의무가 없는 약소국의 권력자들에게는 UN에서 받는 지원금이 이른바 자기 세력을 유지하는 데 꼭 필요한 자원이기 때문이다.
UN 사무총장의 임기를 5년 중임이 아닌 7년 단임으로 하고 강대국의 눈치를 보지 않도록 더 많은 권한을 주자는 의견도 미국과 러시아의 반대에 묵살될 가능성이 아주 높다. 미국과 러시아는 자신들을 견제하려 드는 사무총장을 원치 않는다. 현명하면서도 강단 있는, 동시에 이상적인 정치적 가치를 믿는 UN 수장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 하지만 불행히도 다음번 UN 사무총장 자리에 오르는 사람도 그런 사람이 될 것 같지는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