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잠재적 가해자’라는 말에서 버튼이 눌리신 분들과 나눠보고 싶은 이야기 한 토막. 노동조건이나 문화적 대우는 물론이고 이번 비극적 사건으로 불 붙었듯 치안조차 성차별이 심하여 모두 머리를 맞대고 대처를 논해야 할 마당에, 비교적 사소한 레토릭 하나로 연대 결렬을 선포하는 것은 애석한 일이라서 약간의 교통정리.
문제 지점: ‘잠재적 피해자’
대처해야 할 문제 지점을 대충 건조하게 접근하자면 이렇다. 가해가 이뤄졌을 때 행위에 상응하는 적발/처벌/재교육을 받을 것이라는 기대치가, 성별에 따라서 큰 불균형을 이루고 있다. 이런 기대치를 뒷받침해주는 것은 범죄 사건의 성비 같은 양적 측면부터, 여성이 수동적(종종, “성적 대상물” 수준의) 역할인 것을 당연시하는 주류문화 같은 질적 측면까지 다양하다.
그렇기에 우리 사회의 현재 치안 상태가 여성에게 더 위험하다는 것은, 양성 모두 꽤 널리 인식하고 있다. 그것을 운동 구호로 내놓든, 구체적 대책 토론으로 펼치든, “젊은 여자가 위험하게 밤늦게 싸돌아다니고 말야” 같은 성차별 표현으로 내뱉든 말이다. 즉 우리는 현실 인식으로 이미 여성을 ‘잠재적 피해자’로 놓는 것에 익숙하다. 남성을 ‘잠재적 가해자’로 부른 이들의 논리는 그 연장선일 따름이다.
부정적 레토릭: ‘잠재적 가해자’
당연하게도, 상대를 부정적으로 일반화하는 레토릭은 상대의 협력을 이끌어내기 어렵기에 도저히 좋은 담론전략은 아니다(고백하자면, 십수년전에 페미니즘 문제 의식을 접했을 때 필자가 제안했던 레토릭은 무려 ‘보균자’였다. 즉 우리 사회에서 남자는 여성차별병에 이미 감염되어 있고 관리를 잘 하면 그나마 겉으로 드러나게 발병을 안 한다는 과격한 비유였는데, 필자가 지금도 마이너하지만 당시에는 더 마이너해서 다행히도 묻혔다).
누군가가 “너네는 한심한 보수꼴통이다 그러니까 우월한 우리 진보진영에 표를 던져라”라고 던진다고 생각해보면 쉽게 그림이 그려진다. 또한 다양성 인권 그런거 챙기는 현대 민주제 사회라면, 부정적 편견의 낙인은 큰 틀에서 원래 지양해야 하는 것이 맞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모든 부정적 편견이 같은 방식으로 다뤄져야하는 것은 아니다. 관건은 편견이 얼마나 구체적인 사회적 불이익으로 연결되는가인데, 낙인을 받은 그룹이 사회에서 지닌 권력에 따라서 다르다.
실익의 판단: ‘구조적 불이익’
미국에서 흑인에 대한 범죄 편견, 그러니까 흑인들을 잠재적 무장강도 취급하는 것이 심각한 차별문제인 것은, 그들이 사회적 약자로 받고 있는 여러 기회 상실의 불이익은 물론이고 경찰한테 비무장 사살당하기까지 하는 현실이 있기 때문이다. 반면 한국에서 남성이 차지하는 주류성을 생각할 때, “남자는 잠재적 가해자”정도의 울분 표현이 기분 문제 너머 어떤 구조적 불이익으로 연결될지 잘 모르겠다(물론 이것이 강자인 ‘남성 일반’이 아니라 특정 개인에 대한 집단 괴롭힘이 되어버리면 다른 문제가 되지만).
편견은 모두 나쁘다는 큰 원칙은 크게 틀리지 않고, 어떤 운동이 급격히 크게 불붙다 보면 한심하게 극단적인 공격이 일각에서 등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편견을 소화하는 맷집은 호명된 범주가 지니는 구조적 권력의 양 만큼 다르다. 노동이든 이념이든 내가 사회적으로 약자인 어떤 영역도 물론 있겠지만, 성차별 구도에서만큼은 ‘남자’라는 집단범주는 매우 강하며 따라서 맷집도 그만큼 대단하다.
중요한 것: 공동의 사회적 과제
그런데 애초에 왜, 구조적으로 더 우위에 있다고 해서 무슨 맷집을 발휘해야 하는가. 함께 만들고 싶은, 또는 원하든 말든 함께 만들어야만 하는 공동의 사회적 과제(평등, 인권, 자유, 사랑과 정의 뭐 선진 민주제 사회에서 좋은 가치로 인정하는 것은 뭐든 넣어도 좋다)가 있기 때문이다.
분노나 불안의 일갈의 대상이 되었을 때, 그저 기분이 나쁘다고 연대를 파기하는 것이 공동의 과제 해결에 바람직할 리는 없다. 호명이 주는 구체적 차별의 불이익이 워낙 커서 결렬할 수 밖에 없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오랜 구조적 약자라면 꽤 굳건한 구조적 강자에게 그런 차별을 할 힘이 없다. 그러니까 약자다.
즉 구조적 강자의 위치라면, 예를 들어 한국의 성차별 문제에서 남자라면, 대체로는 적당히 맷집으로 소화하면서 그 호명이 나오게 된 과정을 다시 살펴보고 무엇을 연대할 것인지 어떻게 문제를 고칠 것인지 각자 나름의 전문성을 활용하여 살펴보는 것이 좀 더 건설적인 대처인 것이다. 안그래도 즉각적 치안 차원, 처벌/예방의 제도 차원, 인권 교육의 혁신적 개선 차원, 미디어 규범 정비 차원 등 동시다발적으로 차별 완화를 진척시켜야 할 것들 투성이인데 말이다.
원문: capcold님의 블로그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