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적으로 살기 좋은 곳’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로, 서울에서 일을 했던 1년 정도를 제외하면 한국에서 장기로 거주를 한 적이 없다. 근 10년 간 짧으면 한 달, 길면 세 달, 때로는 몇 년씩 살며 지내온 곳이 나라 수로는 서른 개에서 마흔 개 사이 어디쯤인 것 같다. 그리고 내게 있어 한국은 그 많은 나라와 도시들 중 하나고, 그 중에서도 특히 편하게 더 자주 오고 갈 수 있는 곳이다.
헬조선 이야기, IT인들이 받는 홀대에 관한 이야기들이 한창 시작된 즈음부터 한국 지인들 사이에서 이민은 매번 빠지지 않는 단골 이야기 소재다(좁디 좁은 내 한국 인적 네트워크의 대부분은 IT업계 종사자분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이들은 내가 “난 한국 국적을 포기할 생각은 지금까지 안 해봤는데요?”라고 하면 매번 의외라는 반응을 보이곤 한다.
내게 있어 한국은 살기 좋은 곳이다. 동시에 이건 철저히 내가 원할 때 원하는 만큼 지내다가 원할 때 떠날 수 있다는 전제 하에서의 이야기다. 난 한국에서 지내는 동안 누릴 수 있는 여러가지들, 예를 들면 골목마다 있는 24시간 문을 여는 편의점, 빠른 공공 행정 처리, 인터넷 인프라, 하루면 주문한 물건이 내 손에 들어오는 택배 배송, 한국음식, 그런 것들에 매번 감사한다.
별도의 예약이나 보험회사와의 상담 없이도 내가 아플 때 언제든 병원에 들르면 되는 의료 시스템과, 국민 건강 보험 같은 것들은 또 어떤가. (물론 시스템 내부적으로 개선이 필요한 점이 있겠지만, 어디까지나 수혜자의 입장에서, 그리고 이 글에서 내가 느낀 다른 모든 점들과 같이 “다른 나라들과 비교한 상대적인” 편의성 면에서 말이다.) 나는 이를 위해 납세 편의성을 위한 개인사업자도 설립했다. 지금까지 지내온 많은 곳들과 비교해 보았을 때 한국은 내게 있어 상대적으로 살기 좋은 곳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짧으면 3개월, 길면 반 년을 다 못 채우고 매번 한국을 다시 떠난다.
한국에 오래 있기 힘든 이유
위에서 서술한 한국의 저 많은 멋진 점들을 한순간에 아무것도 아닌 걸로 만드는 것, 한국 음식과 경이로운 인터넷 속도를 포기하고 결국 다시 비행기를 타게 만드는 것. 한국에서 일을 하고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것과 타협을 해야만 하기에, 이를 거부하는 나를 더 밖으로 내몰게 되는 것. 한 발짝만 움직여서 다른 나라로 가면 상대적으로 훨씬 좋아져서, 드디어 숨 쉬고 살 만하게 되는 것.
그것은 바로 한국사회의 사회적 약자에 대한 합의와 가장 기본적인 인권 존중에 대한 시민 의식이다. 그리고 그 중 거대한 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한국사회의 여성혐오다.
여성혐오와 나
PC통신 시절을 지나 처음으로 윈도우 익스플로러를 사용하게 되었을 때, 그러니까 초등학교 고학년 즈음이었던 것 같다. 나는 그 때 우연히 한 뉴스에 달린 댓글을 보게 되었다(그 뉴스글의 주제가 군대 문제였는지 임금 격차였는지 어떤건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XX해서 XX할 년들, 다 XX해버려야”
“XX한 년들이 XX를 해서 남자가 이 고생을 한다”
“전쟁 나면 XX당할 XXX들이 고마운 줄 모른다”
“집에서 애나 보는 XX들이 편한 줄 모르고 XX이다”
얼떨떨한 상태로 당시 초등학생이던 나는 한참을 울었다. 그리고 그 때 처음 알았다.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내 성별을 이유로 이렇게 증오를 표출하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존재한다는 것을. 그렇게 나는 여성혐오를 학습했다.
한국에서 학창시절을 거쳐 직장생활까지 하고 있는 여성들을 붙잡고 물어봤을 때,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당해야 했던 온갖 입에 올리기도 싫은 갖가지 사건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을 찾아 내기란 아마 거의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난 이를 내 주변의 대부분의 남성들이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깜짝 놀랐다). 내 경우는 그나마 사건의 건수로 따지자면 내 주변 여성들과 비교해서 상당히 준수한 편이다(세상에, 바바리맨을 단 한번도 보지 못했으니! 내 눈은 거의 천연기념물쯤 될 거다).
중학생일 때, 대뜸 내 가슴을 엘리베이터에서 움켜 쥔 다음 내가 소리를 지르자 도망가던 덩치 큰 고등학생, 야간자율학습을 마치고 집에 걸어가던 고등학생이던 나를 눈 깜짝할 새 강제로 차에 태워 다짜고짜 공포의 팔공산 드라이브를 시켜주던 까만차를 탄 그 아저씨(잠깐 차가 멈춘 틈을 타 죽자고 뛰지 않았다면, 지금 내가 이 자리에서 숨쉬고 살아 있을 수 있을까?), 수능을 갓 끝내고 학자금 대출과 장학금을 위한 중국행 사이에서 고민하며 집 근처 공원을 걷던 나를 졸졸 따라오더니, 끝내는 내 앞을 가로막고선 “너 용돈 필요하지 않냐?”하던 그 새파랗게 젊디 젊었던 청년의 얼굴. 그리고 샌프란시스코에서 돌아와 1년 간의 서울에서의 직장 생활 동안 겪었던 그 많은 일들.
나는 아직도 택시를 타면 기사님 눈치부터 살핀다. 입에 못 담을 성희롱을 한가득 들었을 때, 현금이 아닌 카드를 내밀었을 때 대뜸 쏟아지는 육두문자를 들을 때면 내가 남자였어도 이랬을까, 하는 생각을 부지불식 간에 먼저 하게 된다. 분명 기분 나쁜 일을 당하고도 전혀 말을 꺼내지 못하고 혼자 울던 내가 싫었고, 주변에서 같은 일을 당한 친구나 후배들에게는 “신고해, 콩밥 먹여 버려!”같은 말이나 하는 내게는 자기혐오가 뒤섞인 감정까지 느껴야 했다.
여성으로 살아남기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난 소위 ‘Bitchy Resting Face(BRF)’란 걸 익혔다. 혼자 길을 걸을 때 의식적으로 눈에 힘을 주고, 심기가 불편한 모양새를 얼굴 표정 가득 채운다. 낯선 곳일수록, 특히 근 20년 가까이 숙달된 본능에 따라 내가 원치 않는 관심 또는 신변의 위협을 받을 가능성이 큰 경우에는 “날 건드리면 정말로, 정말로 온 힘을 다해 가만 두지 않겠다”라는 표정으로 길을 걷는다. 피곤하고 힘들다. 그러나 이렇게 하니, 경험상 눈에 띄게 여러 사건의 발생 빈도가 줄어든다.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많이 약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떻게 보면 당연하게도, 각각 다른 도시와 국가에 따라 내가 여성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겪어야 하는 여러 사건의 빈도수가 상당히 다르다는 것을 발견했다. 디지털 노마드, 원격근무를 주제로 한 다큐멘터리를 만들면서 자연스레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모인 관련 온라인 커뮤니티 활동 역시 시작하게 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여성 혼자서 이 도시로 저 도시로 옮기는 이들을 대상으로 한 커뮤니티, 채팅방 등에서는 어렵지 않게 관련 정보들을 찾을 수 있다.
여기로부터 전수받은 몇가지 팁이 있다. 내 경우 새로운 도시에 도착하자마자 제일 먼저 하는 것은 현지 사람들의 옷차림을 재빨리 파악하는 것이다. 옷차림을 기준으로 이들이 투자했을 걸로 예상되는 시간과 노력 면에서, 여성과 남성 간 차이가 어느 정도인가, 라는 점이 포인트.
남미, 러시아를 비롯한 동유럽 등지에서 나는 여성들이 착용한 치마, 스타킹, 하이힐, 옆으로 메는 숄더백, 풀 메이크업과 장신구 대비 상대적으로 매우 무심한 남성들의 옷차림을 보았다. 많은 관련 커뮤니티들에서 지적하듯, 이런 곳에서는 남성과 여성의 사회적 위치 간 분명한 차이가 있고, 사회에서 기대되는 성역할이 명확하게 자로 잰 듯 정해져 있을 확률이 매우 높다. 그리고 이런 곳에서 우리는 더 많은 여성혐오를 경험하게 된다.
*여기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 ‘여성혐오’, 즉 미소지니(misogyny)는 여성을 단순히 싫어하고 미워하는 것이 아니다(이 경우는 여성공포증으로, 정신질환으로 분류되며 대부분의 여성혐오자는 여성공포증을 가지고 있지 않음). ‘몰카를 찍는 게 어떻게 여성혐오냐, 좋으니까 찍는거지 보기 싫으면 몰카를 안 찍지!’ ‘난 여자친구도 있는데 어떻게 여성을 혐오한단 말이냐’ 같은 말은 이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비롯된다.
여성혐오는 여성과 혐오의 합성어가 아닌, 하나의 고유명사로서 현상, 사상을 가리킨다. 딸이 있는 아버지도, 남성이 아닌 여성도 미소지니를 가질 수 있다. 미소지니는 성차별, 여성 폄하, 여성에 대한 폭력, 성적 대상화’등으로 나타나는데(여자는 꽃이지, 여자가 있으니 분위기가 밝네), 한 마디로 성별을 유일한 이유로 “여성을 규정하는 모든 행위”가 바로 미소지니에 포함된다.
‘너 왜 그렇게 여자처럼 뛰냐’ ‘네가 여자냐? 왜 질질 울어?” 같은 언어 사용 역시 미소지니에 포함되며, 이로 인한 피해자는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도 해당된다(야 넌 남자 새끼가 왜 여자처럼 그러냐?). 같은 맥락에서 여러 외신에서는 한국의 ‘애교’ 문화를 성인 여성에게 유아의 말과 행동을 흉내 내도록 하는, 미소지니의 한 예로 소개하기도 한다.
참고글: 한국의 여성인권 그리고 한국 여성들의 애교
참고글(외신 번역): 안전한 여행지로 알려진 한국, 여성 여행자에게는 다릅니다
참고글: 여성혐오 제대로 알기
그럼 대한민국은 어떨까?
이번에 나와 함께 한국에 잠시 들른 남자 친구에게 있어, 이 곳에서 가수 설현이 소비되는 방식은 가장 흥미로운 점 중 하나였던 것 같다. 남자 친구는 엄청난 인터넷 인프라를 자랑하는, 분명 선진국으로 보이는 이 나라에서 여성을 소비하는 방식이 참 흥미롭다며, 한 통신사의 외벽 유리에 아무것도 모른다는 순진한 표정과 짧은 미니스커트의 조합으로 도배되어 있는 전신 사이즈의 설현 사진을 찍어 트위터에 올렸다.
그리고 얼마 뒤, 강남역 살인사건이 일어났다.
이걸 왜 남녀 문제로 몰고 가나요? 인도나 중동 국가를 모르나요? 한국은 정말 치안이 좋은 나라입니다. 왜 남성 전체를 일반화합니까? 많이 불쾌하네요. 솔직히 우리나라에 여성혐오가 어디 있습니까? 강남역 전세 내셨어요? 순수하게 추모합시다. 배후 세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언론이 이상하게 몰아가네요. 남자를 무시한 여자들에게는 왜 죄를 묻지 않나요? 적당히 좀 해라 적당히. 이 언론사 한쪽 입장만 자꾸 쓰네요, 실망입니다. 내 주위엔 여혐하는 사람 한 명도 없고 오히려 남자들이 역차별 당한다고요. 여성혐오는 여자가 하기 나름이지. 짜증난다, 시끄럽다…
고통스럽다. 이런 걸 볼 때마다 매번 끝이 날카로운 뭔가로 찔리는 기분이다. 내가 강간을 당하거나 죽어도, 혹은 강간을 당하고 죽어도 이 사회는 개인적인 문제로만, 개인의 일탈로만 이를 바라보게 될까?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사람들은 손가락질 받게 되는 걸까? 속상하고 잠을 이루지 못한다.
그러다 마치 같은 곳에 상처가 계속해서 나면 딱딱하게 흉이 지듯, 조금씩 무덤덤해진다. 이러한 우리사회의 반응을 보며 무기력을 학습하게 된다.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거야, 라는. 아무리 오랜만에 돌아와도 6개월 정도가 되면 그렇게 감각이 마비가 되고 그럭저럭 순응하게 된다. 그리고 나는 그런 내가 무서워서 도망치듯 다시 길을 나선다.
이제는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목소리를 낼 때
나는 한국에서도 내 미래를 꿈꾸고 싶다. 내 동생과 친구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길 바란다. 혹시라도 아이를 가지게 된다면, 한국을 다른 여러 도시들 중에서도 특히 살기 좋고 즐거운 곳으로 생각하게 되길 바란다.
그 아이가 여자아이라면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받지 않고 여성이라는 틀에 자신을 가두지 않길 바라고, 남자아이라면 사회가 요구하는 남성의 역할(가장이 책임을 져야지! 남자는 울면 안되지!), 맨박스(man box: 남성에게 요구되는 특정한 성 역할의 덫)에서 자유로울 수 있길 바란다. 미소지니의 타파는 여성뿐만 아닌 남성의 해방 역시 의미한다. 그래서 이제는 도망을 치기보다 목소리를 내고 싶다.
- 참고글: “여성 카드”를 써보세요! 다양한 혜택이 따라옵니다 (워싱턴포스트)
- 참고영상: 토니 포터, 남자들에게 고함 (TED)
“토니 포터는 모든 남자들에게 “남자처럼 행동” 말라고 요청합니다. 그의 삶에서의 경험담을 말하면서, 이런 사고방식이 어떻게 많은 남자들과 소년들에게 주입되는지와 남자들 서로에게 그리고 여자들에게 무례하게 대하고 학대하며 혹사시킬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의 해결책은 ‘man box’에서 벗어나라는 것입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는 얼굴에 검댕칠을 한 코미디언들이 TV에 나와 쇼를 했던 곳이다. 단일 민족 국가인데다 유교 문화까지 겹쳐 동아시아에서도 보수적인 사회분위기로 국내외에 참 잘 알려진 우리에게는, 이런 인권 감수성을 직접 보고 듣고 싸우고 부딪치고 토론하며 배울 기회가 상대적으로 적었다.
- 본 블로그 관련글: 주토피아로 돌아보는 다양성과 우리 사회
여기에 대해 사람들이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고, “예민하다”, “까만걸 까맣다고 하지 뭐라고 하란거냐”라고 하는 사람들과 논쟁을 하고 각자의 경험담을 나누며, 우리는 지금도 우리 스스로와 이 사회를 더 나은 곳으로 만들고자 몸부림치는 중이다. 그리고 여성혐오에 대한 논쟁은 한국 사회에서 이제 막 시작되었다.
왜 바꿔야 하는가
당연히 처음에는 불편하고 귀찮을 거다. 한 예로 최근 많은 국외 사례의 경우 설문조사나 회원가입 절차 등에서 성별란의 선택지를 단순히 남/여로만 구분하지 않는다. 페이스북처럼 몇십개의 선택지를 가지고 있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Male, Female 과 함께 Prefer not to disclose (공개를 원치 않음) 정도는 기본으로 들어간다. 물론 기존의 방식에 비해 더 번거롭고 한번 더 손이 간다. 생각해야 할 것이 하나 더 늘어난다.
하지만 인류의 문명은 이러한 노력과 함께 발전해 왔다. 노예제가 왜 나쁜지 논쟁을 시작했고, 식민주의가 왜 획기적인 경제 성장 방법이 아닌지(많은 서구권 국가에서는 식민주의, colonialism을 “국외에서 저렴하게 노동력 및 자원을 조달하는 새로운 성장 방법”으로 바라보았다, ‘노예’와 ‘수탈’을 말이다) , 왜 피부색이나 성별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들이 참정권을 얻어야 하는지, 왜 모든 사람이 동등하게 구직의 기회를 갖고 피부색이나 성별, 장애여부, 성정체성 등으로 인해 차별을 받아서는 안 되는지에 대한 지난한 설득, 논쟁, 싸움을 이어갔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동물의 권리로까지 생각의 폭을 넓혀왔다.
문제 인식은 문제 개선의 첫 걸음이다. 왜 이렇게 많은 여성들이 거리로, 온라인에서 쏟아져 나와 이제까지 하지 못하고 있던 이야기를 하는지를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이 사회의 구성원들이 마음을 열고 듣고 또 자신의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그리고 함께 해결책을 모색할 수 있길 바란다. 이제는 우리도 목소리를 내야 할 때다.
참고: 호주 정부의 여성 존중 캠페인, “Respect”
“여성을 향한 폭력은 여성에 대한 비존중(disrespect)으로부터 시작된다. 여성에 대한 폭력이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한다면, 당신이 여성에 대한 비존중을 목격하는 즉시 이를 멈춰 달라”
호주 정부가 현재 시행중인 캠페인, “Respect”의 주요 골자다. 아래 캠페인 영상에서는 사회에 의해 규정된 성역할을 학습한 어린이들이 자라 어떻게 폭력의 가해자와 피해자가 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참고 외신: VICE: Let’s Talk About the Toxic Way South Korea Is Handling its Rape Problem
원문: DARE YOURSEL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