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역 근처에서 자취하던 시절의 일이다. 보증금 500만 원에 월 30만 원 하는 반지하 단칸방이었다. 말이 반지하지, 빛이 전혀 들지 않았다. 집채만 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하여간 커다란 바퀴벌레도 심심찮게 눈에 띄곤 했다. 세탁기도 없고 TV도 없었다. 내가 빨래를 어떻게 했었는지 돌이켜 봤는데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그런데 왜 하필 중화역이었냐면, 북스피어 사무실이 학동역(7호선)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추억이 된 잡지 『판타스틱』을 따라 강남으로 간 건데 사무실을 옮기자마자 가장 먼저 한 일이 자취방을 구하는 거였다. 7호선으로 한 번에 갈 수 있고 월세가 싼 곳을 수배하다 보니 흘러 흘러 중화역에 이르게 되었다.
중화역에서 학동역까지는 지하철로 30분쯤 걸린다. 오가며 무가지도 읽고 신문도 읽고 책도 읽었다. 누군가 의자 위 선반에 놓고 내린 스포츠 신문을 발견하면 땡잡은 것 같은 기분이 들던 때였다. 정말, 지하철에서 스포츠신문을 보며 즐거워하던 때가 있었구나. 불과 7년 전 일인데 떠올리니 아득하다.
“이번에 내리시면요…”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무슨 책을 보다가 학동역에서 내리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어떤 아가씨가 내 옆으로 바짝 다가왔다. 그러더니 “저기요” 하고 입을 떼며 들릴락 말락 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번에 내리세요?” 처음에는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아니, 듣긴 제대로 들었는데 이해를 못 한 거겠지.
내가 “네?” 하고, 그렇지 않아도 커다란 눈을 더 크게 뜨며 되묻자, 상대는 아까보다 더 작은 목소리로, 하지만 입을 좀 더 내 귀에 바짝 대고 다시 물었다. “이번 역에서 내리시는 거 맞죠?”라고. 내가 이번 역에 내릴 거라 예상하고 확인차 물어보는 거였다. 세상에. 이 무슨, 아닌 밤중에 홍두깨 CF 같은 상황이란 말인가.
그제야 나는 “아, 네” 하고 대답했다. 딱 부러지는 “아, 네”가 아니라 허둥지둥 백숙을 먹다가 목에 닭 뼈가 걸린 듯한 뉘앙스의 “아, 네”였다. 한 번이 아니라 세 번인가 네 번 정도 했던 거 같다. “아, 네, 네, 네, 네.” 그렇게까지 당황하지 않아도 좋았으련만. 쯧쯧, 불쌍하게도 당황하고 말았다.
‘호, 혹시 이 사람이 지금 나를 꼬시려는 건가’ 하는 생각도 2초가량 했다. 그제야 비로소 상대방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나랑 비슷하거나 세 살 터울인 사촌 누나 또래쯤 됐겠다. 나처럼 사무실로 출근하는 차림새였는데, 왜 그런지 모르게 안절부절못하는 표정이었다.
이번에 내리시면요, 저기 문 앞에 서 있는 여자분 좀 따라가 봐주시면 안 될까요.
그녀(A)의 시선이 향한 곳에 나와 비슷한 또래의 여자(B)가 보였다. 검은색 치마 정장 차림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이 시간에 지하철을 탔으니 아마도 출근하는 중이었으리라. 이상했던 건 남자(C) 한 명이 여자 뒤에 찰싹 붙다시피 서 있었다는 거다.
그게 왜 이상했냐면, 두 사람이 전혀 동행으로 여겨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남자의 나이는 50대 중반쯤 됐을까. 척 보기에도 깔끔한 차림새는 아니었다. 후줄근한 잠바, 트레이닝복 비슷한 바지, 구겨 신은 운동화. 깡마른 체형에 키는 나보다 머리 하나 정도 작아 보였다.
A가 들려준 사연은 이랬다. 자신이 보기에 B와 C는 서로 아무런 관계가 없다. 한데 어느 순간부터 C가 B 뒤에, 어색할 정도로 가까이 붙어 서 있더라는 거다. 출근길 러시아워여서 객차가 꽉 찼으니 그럴 수도 있지 않나 했는데, B가 한 걸음 옆으로 옮기면 C도 슬금슬금 뒤에 붙어 서고 B가 또 한 걸음 자리를 옮기면 C도 다시 그 뒤에 붙어 서더란다.
이상하다, 확실히 이상하다고 A는 생각했다. 이것은 추행이 아닌가! C가 만만해 보이는 B를 추행하고 있다고 A는 확신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두 사람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혹시 돌발상황이 벌어지면 ‘나라도 나서야겠다’고 마음먹었으리라. 얼마간 무섭기도 했을 테지.
B가 문 앞으로 다가가 내릴 채비를 했을 때는 조금쯤 안도했을까. 그런데 C가 거기까지 따라가자 기함하고 말았다. A는 잠시, 빠르게 고민했다. 저 둘을 따라 내릴까. 내가 내릴 역도 아닌데. 게다가 과연 내가 도움이 될까. 차라리 이번 역에서 내리는 남자에게 부탁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그때 책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내가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혹시 C에게 들릴까 싶어 A는 내게 가만히 말을 걸었다. 워낙 빠르고 작은 목소리여서 자초지종에 대한 여자의 설명을 내가 전부 알아들었던 건 아니다.
하지만 나는 금세, 모든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A는 다소 겁에 질린 듯 보였다. 자신과 상관없는 타인에게 이 정도로 감정 이입해 있다니. 이것이 내가 첫 번째로 감탄했던 대목이다. 나도 A와 같은 칸에 탔지만 전혀 몰랐다. 아무런 낌새도 느끼지 못했다.
그들은 거의 동물적인 감각으로 알아차린 듯했다
그렇구나. 그런 상황이구나. 나는 알았다는 의미로 고개를 한 번 그리고 또 한 번 작게 끄덕여 보였다. 불의를 보면 시종일관 늘 끝까지 참았던 내 성정으로 미루어 이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지만 그만큼 A의 눈빛이 절박해서 어쩔 수 없었다.
거기에는 C의 체구가 왜소하고 그다지 운동을 열심히 한 인간처럼 보이지 않았다는 점도 한몫했다. 저 정도라면 나도 어떻게든 제압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투지가 용솟음치려는 찰나, A가 한 번 더 나지막이 말했다.
근데 조심하세요, 저 남자, 손에 라이터를 들고 있어요.
아닌 게 아니라 주먹을 쥔 C의 손에, 편의점에서 400원만 주면 살 수 있는 일회용 라이터의 윗부분이 보였다. 젠장. 거기서부터는 나도 슬슬 겁이 났다. 화도 났지만 동시에 겁도 났다. 인제 와서 생각하면 칼이나 가위도 아닌 마당에 라이터로 뭘 어쨌을까 싶지만, 당시에는 라이터가 화염방사기 비슷하게 느껴졌다. 열차 방화사건 같은 뉴스도 떠오르고.
나를 도와줄 만한 남자가 있는지 객차 안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깨달았다. 객차에 있는 여자들 대부분이 B와 C를 주시한다는 사실을. 남자들은 아무도 관심이 없었다. 다들 신문을 읽거나 멍하니 허공을 보거나 졸았다. 내가 느끼기에 이 상황을 간파한 남자는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여자들은 달랐다. 그들은 거의 동물적인 감각으로 알아차린 듯했다. 알게 모르게 서로서로 눈빛도 주고받지 않았을까. 누군가, 이 상황에 물리적 도움을 줄 수 있는 누군가가 자신들의 눈빛을 알아차려 주길 바라면서 말이다. 이것이 내가 감탄한 두 번째 대목이다.
이내 문이 열렸다. 여자가 후다닥 내렸다. 사람들이 꾸역꾸역 몰려나갔다. 그 틈을 헤집고 남자도 재빠르게 여자를 쫓는 모습이 보였다. 이것저것 따질 겨를이 없었다. 나도 따라 내렸다. 그리고 무슨 생각에서였는지 다짜고짜 남자를 돌려세웠다. 남자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뭐야, 이거”라고 중얼거렸던 것 같다. 나는, 약간 사이를 두고 이렇게 물었다.
선생님. 혹시 도나, 기에 관심 있으세요?
뭐요?
남자는 신경질적으로 반응했다. 라이터를 쥔 손을 쓰지 못하도록 팔을 힘주어 붙들며 나는 말했다.
인상이 참 좋으세요. 바쁘지 않으시면 잠깐 저랑 얘기 좀 하시지요.
내가 그를 붙잡고 옥신각신하는 동안에도 많은 사람이 주위를 스쳐 지나갔다. 여자는 이미 보이지도 않았다. 아마 정신없이 개찰구를 통과해서 역을 나가자마자 택시 같은 걸 잡아탔을 거라고 짐작한다. 별 이상한 놈 다 보겠네, 라는 눈으로 아래위를 훑어보던 남자는 “바빠, 바빠” 하며 귀찮다는 듯이 손사래를 치고는 두리번거리며 계단을 올랐다.
그 뒤를 나는 또 따라갔다. 혹시나 해서. 하지만 역 밖에서도 여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걸 확인한 순간까지도 내 심장은 계속 쿵쾅거렸다.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그리고 ‘C가 따라오나?’ 싶어서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며, 나는 회사로 향했다.
이것이 이야기의 끝이다. 이 이야기에 교훈 같은 건 물론 없다. 다만 7년 전 어느 날 지하철 객차에서 보았던, 시종일관 B와 C를 주시하던 많은 여자와 B와 C에게 아무런 관심도 없었던 많은 남자의 모습이, 이렇게 오늘 같은 날 느닷없이 불쑥불쑥 떠오르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