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행의 두 가지 구성요소
Definition. 관행:
(1) 어떤 행동이 공동체 안에서 오랜 기간 폭넓게 실천된다.
(2) 동시에 이 행동이 근간한 윤리적 규범이 공동체 안에서 오랜 기간 폭넓게 수용된다.
여러 예술 분야에서 조수나 외주 창작이 빈번하게 이루어지는 것은 관행의 첫 번째 구성요건을 만족한다. 그런데 조수의 작업이 예술창작물의 핵심요소에 근접했을 때, 즉 로이 엔터테인먼트의 경우처럼 음악 전체를 다른 작곡가가 쓰거나 조영남의 경우처럼 90퍼센트 이상을 다른 화가가 썼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명의상 창작자는 예외 없이 실질적인 창작자의 존재를 악착같이 숨긴다. 윤리적 논란을 의식하기 때문이다. “비난하지 마, 관행이니까!” 조영남과 로이 엔터테인먼트의 공통된 항변인데 형용모순이다. 그게 관행이라면 비난받을 일이 없다. 이들이 휘두르는 ‘관행’은 관행의 두 번째 구성요소를 충족하지 못한다. 범죄가 만연한 사회 도둑의 항변이다. 도둑은 왜 ‘몰래’ 도둑질을 하며 숨어다니는가? 도둑질이 관행이 아니기 때문이다.
수용인가 활용인가
이 관행의 수용은 간단한 방법으로 확인될 수 있다. 조수의 작업범위와 이름을 함께 명기하는 것이다. 출판물에서 인용의 범위를 명기하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런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저작권법이 상당한 정도의 구체성으로 성명표기권을 규정하고 있음에도, 대개의 감독형 창작자들은 일이 터진 뒤에야 관행에 기대어 자신이 저지른 불법의 정당성을 주장한다. 논란의 중심이 되는 감독형 창작자는 자신의 예술적 평판이 ‘타인의 기예가 자신의 것으로 오인되었을 경우에만’ 유지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예술창작의 핵심요소 판별하기
개념과 창작노동의 분리를 주장하려면 예술창작의 핵심요소가 무엇인지를 판별하는 ‘치환실험’을 통과해야 한다. 아래의 두 작품을 보자.
첫 사진은 워홀의 <Marilyn diptych>이고 두번째 사진은 뒤샹의 <Fountain>이다. 타인이 제작한 물건을 재료로 사용한 기성품 예술(ready-made art)의 대표작들이다. 워홀의 작은 마릴린 먼로의 스틸사진을, 뒤샹의 작품은 공산품 변기를 사용했지만, 주인이 워홀과 뒤샹이라는 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이 재료가 기성품이라는 게 너무 확실해서 두 작가는 그 사실을 따로 밝힐 필요도 없었다.
<Marilyn diptych>의 본질은 사진의 부자연스러운 색감과 기계적 반복을 통해 감상자의 해석에 외적 간섭을 일으키는 데 있고, <Fountain>의 본질은 저 변기가 전시회의 한 자리를 차지했을 때 불러일으키는 거부감과 이질감에 있다. 워홀이 마릴린 먼로 대신 오드리 햅번의 사진을 사용했어도, 뒤샹이 로얄 토토의 비데를 사용했어도 이 작품들은 고유한 예술적 목표를 수행한다. 대신 워홀이 잡지에 실린 먼로의 사진을 볼 때마다 혹은 뒤샹이 공중화장실에 들를 때마다, “이거 나를 표절했는걸!”이라 말할 권리는 박탈된다.
조영남의 작품
전통적 기법으로 만들어지고 전통적 감상으로 수용되는 작품은 이 치환 실험을 통과하지 못한다. 조영남의 작품 <극동에서 온 꽃> 시리즈의 화투패를 소녀시대의 브로마이드로 바꿔 놓았을 때도 작품의 고유한 가치는 보존되는가? 로이엔터테인먼트의 <응답하라 1997>의 테마곡을 소녀시대의 <Gee>로 바꿔놓았어도 작품의 고유한 가치는 보존되는가? 이 경우 두 작품의 주인은 조영남과 로이엔터테인먼트인가, 아니면 소녀시대인가?
별로 어려운 질문이 아니다. 두 개의 정의적 구성요소를 충족하는 우리의 관행은 이렇다: 이런 감독형 창작자를 으깨고, 처형하고, 몰아내서 누구도 비슷한 시도를 해볼 엄두를 내지 못하게 하는 것. 그게 바로 과거로부터 미래까지 변치 않을 유구한 예술적 “관행”이다.
조영남 옹호 논리에 대하여
조영남 옹호 논리가 저작인격이 문화권력을 따라 이동할 수 있다는 리버럴한 시각과 저작인격 따위보다 수익 분배가 중요하다는 좌파적 시각으로 분화되어 가는 듯한데, 창작물의 인격권은 자유주의, 자본주의, 사회주의 그 자체보다 훨씬 오래된 개념이라 시대가 그렇게 변했다는 식으로 눙치고 들어가기 어렵다. 우리 시대의 저작권법뿐만 아니라 역사의 모든 순간에 저작인격권은 불가침하다고 이해돼 왔다.
내 재산은 빼앗길 수 있지만 내가 무언가 만들었다는 사실을 빼앗길 수 없다는 건 거의 본능적인 관념이다. 예술가가 가지는 유일한 어드밴티지이기도 하고. 오백 년 전 최고의 부자는 기억되지 않아도 오백 년 전 최고의 작가는 기억되는 이유다. 공산주의 사회에서도 저작물의 사유성만큼은 포기되지 않았는데, 공산주의 자체가 증거다. <자본>의 모든 판본에는 마르크스의 이름이 박혀 있다.
정경으로 채택된 모든 성경에도 신의 이름이 아닌 추정 상의 저자가 존재한다. 그중 일부가 실제 작가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그들이 실제 작가임을 믿기 위해 그 이름을 기억한다. 인류 최초의 문서인 수메르 쐐기 문자판에는 세 단어가 적혀 있는데, 그중 하나가 작가의 이름이다. 작성을 명령한 왕의 이름은 없다.
※ 추신: 이 글은 ㅍㅍㅅㅅ 편집자의 요청과 편집으로 발행되었으나 작가는 나다.
원문: 손아람 님의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