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 오래 살지는 않았지만 살아오면서 주변의 사람들을 보고 겪으며 느낀 점들이 있다. 일단 경제적으로든 직위적으로든 ‘일정한 성취’를 이뤄낸 사람들은 어마어마한 대가를 치룬 사람들이다. 흔히 ‘성공한 사람’들이라고 표현하지만 난 그런 것들을 성공이라고 생각하지 않기에 ‘성취한 사람들’이란 표현을 쓴다.
자신의 에너지와 시간의 전부를 그 하나의 목표를 향해 전력투구할 각오가 되어있을 뿐 아니라 실제로도 그렇다. 그렇게 성취를 이뤄낸 사람들은 그래서 자신이 의지를 갖고 노력하기만 하면 무엇이든 못할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 뿐 아니라, 그렇게 어마어마한 대가를 치루고도 성취를 이뤄내지 못한 더 많은 사람들도 있다. 나는 일정한 성취를 이뤄낸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가르는 기준이 무엇일까 곰곰히 생각해보고 분석해 본 결과… 놀라운 것을 발견했다. (물론 전혀 과학적이거나 통계적인 근거는 없다.)
그건 바로 ‘운’이었다…성취를 이뤄내지 못한 사람들과 성취한 사람들의 가장 큰 차이는 내가 볼 때 여러가지 ‘운’과 ‘우연의 축복’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였다. (금수저로 태어난 것이나, 다른 사람보다 머리가 좋고, 선천적 재능이 뛰어난 것도 어찌보면 운이니까)
성취한 사람들의 시각에서는 실패한 사람들은 모두 다 자기보다 노력이 0.1%라도 부족한 것이 문제라고 단정짓겠지만, 글쎄… 성취한 사람들보다 더한 노력을 한 사람들이 실패한 사례는 그들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을 것이다.
그런 상황이 보이자 현명하게 행복한 삶을 추구하는 것은 과연 어떻게 하는 것일까 하는 고민이 들었다. 성취를 이뤄낸 사람이나 성취를 이뤄내지 못한 사람이나 둘다 똑같이 혹독한 대가를 치뤄야 한다. 장밋빛 미래를 꿈꾸며 현재를 철저히 희생하며 마음과 정신, 소중한 인간관계까지 메말라간다. 그러나 결국 그들이 꿈꾸는 성공이란 것이 우연에 의해 가장 큰 영향을 받는다면…과연 그런 성취를 위해 현재를 철저히 희생해 모든 것을 내어던지는 삶이 현명한 삶일까?
차라리 운에 좌우될 장밋빛 성공에 현재를 담보로 맡기고 모든 걸 거는 무리한 도박보다 지금 여기에서 행복할 수 있는 소박한 삶의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 현명한 것이 아닐까?
어쩌면 옛사람들은 알았으나 현대인들이 잃어버린 가치 중 하나가 지금 현재 자신의 형편에 만족할 줄 아는 ‘자족'(自足)의 가치가 아닐까?
그러고보니 욕망을 거룩한 신앙의 비전으로 합리화하는 ‘왕의 재정’ 따위에 열광하는 한국의 기독교인들에게 성경에 기록된 ‘자족’의 가치 역시 전혀 기억되지 못하는 가치일 것이다.
“나는 비천하게 살 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 줄도 압니다. 배부르거나, 굶주리거나, 풍족하거나, 궁핍하거나, 그 어떤 경우에도 적응할 수 있는 비결을 배웠습니다. 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 빌립보서 4:12-13 새번역
게다가 충격적인 것은 ‘내게 능력주신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라는 구절을 풍요롭거나 비참하거나 어떤 상황에서도 ‘자족’하며 감사할 수 있다는 원래의 뜻이 아니라, 내게 무한능력을 주실 하나님을 호출하는 ‘I CAN DO IT!’의 신적인 약속처럼 해석한다는 사실이다. 성경의 문맥을 꼼꼼히 살펴보지도 않고 문장하나만 떼어내 정반대의 뜻으로 쓰고 있는 기독교인들을 보면 현대인들의 ‘부풀려진 탐욕과 욕망’이 교회와 신앙인들에게 얼마나 깊숙이 침투했는지 알 수 있다.
한국사람들이 종교인이나 비종교인 가릴것 없이 오직 ‘돈’만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며,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올라가려다가 타인의 고통과 아픔 조차 ‘돈의 가치’로 셈하려드는 괴물이 되어버린 것은 ‘스스로 만족’할 줄 아는 ‘자족의 가치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마음에 ‘욕망’이 가득차 있으면 ‘사랑과 너그러움, 배려와 연민’은 들어설 자리가 없을테니까…
‘당신이 원하기만 하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탐욕스런 자본주의와 악마의 꾀임에 넘어가지 말자. 진실을 말하자면…당신이 아무리 간절히 원해도 할 수 없는 것들이 너무나 많다. 그리고 그런 악마들은 미래의 장밋빛 꿈을 보장하는 척하며 당신의 현재의 행복을 빼앗아 간다. 자본주의는 ‘소비자의 결핍’에 근거한 ‘끝없는 공급’에 의지하는 시스템이니 필요하지 않은 것들도 필요한 것인냥 우리를 끝없이 속일 수 밖에 없다.
‘자본주의 정신이 주도하기 전에 사람들은 경제적 취득 자체를 삶의 궁극적 목적으로 삼지는 않았다. 삶의 궁극적 목적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가 추구하는 공동선이었다. 경제적 취득활동이란 그 공동선을 실현해나가는 삶을 살아가고자 할 때 발생할 수밖에 없는 물질적 필요를 만족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간주되었다.
그래서 돈과 부에 대해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수단이 목적을 갉아먹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런 모습이 보일 때, 가차 없이 돈과 부를 ‘경제적, 도덕적 질서의 파괴자’로 맹렬하게 비판했다. 그러나 자본주의 정신은 수단을 목적으로 뒤집은 것이다. 즉, 돈을 버는 경제적 취득 활동 자체가 이제는 더 이상 수단이 아니라 삶의 궁극적 목적으로 격상된 것이다.’ -돈에서 해방된 교회-(박득훈/포이에마) 중에서
난 지금 여기에서 ‘자족’하며 사는 삶을 살기로 했다. 그런 헛된 꾀임에 넘어가기에는 내 스스로가 얼마나 무능력한지, 내 의지가 얼마나 약한지 충분히 알만한 나이가 되었으니까…그리고 내게 남아있는 ‘지금’의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아니까…’현재’의 소박한 축복들은 너무나 쏜살같이 지나가 버린다.
당신을 사랑해서 따뜻한 눈길로 지켜보는 당신의 연인, 당신이 영웅이라고 생각하며 당신과 함께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아들과 딸들의 해맑은 웃음, 너무 바빠 쳐다보지 못했던 길가의 예쁘고 아담한 꽃들, 스마트폰을 보느라 땅만 쳐다보고 살아서 미쳐 깨닫지 못했던 저 높은 하늘의 청명함, 퇴근 길에 온 하늘을 붉게 물들이는 아름다운 노을…
이런 소중한 현재의 축복들을 ‘미래의 장밋빛 꿈’때문에 무시하고 살지말자.
‘자족’하며 살아가기…어쩌면 현대인들이 잃어버린 ‘행복의 비결’이 아닐까? ‘지금 여기에’ 있는 소중한 것들의 아름다움을 찾아보자. ‘자족’하며 살아도 망하지 않는다.
‘자족’하며 살아갈 때, 욕망이 들어선 자리가 비워지며 비로소 마음의 여유가 생길 것이다. 그리고 그 여유로 이웃과 타인을 사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삶이야말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삶이 아닐까? ‘하나님께서 다 하셨습니다’라고 주장하며 수천억 원짜리 예배당을 짓지 않더라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