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28년째 선생 노릇을 하고 있다.
내 지나온 교직 삶을 돌아보건대, 어떤 때는 좋지 않은 교사였던 것 같다. 부끄럽지만 아이들에게 폭력적인 행태를 보였던 적도 적지 않다. 특히 초임 시절엔 아이들을 많이 때렸다. 그때는 때려도 된다는 시절이었고, 또 때리면서 열심히 가르치는 게 좋은 선생의 표본인 줄로 착각했다. 어처구니없게도 그 착각이 사회적으로도 통했다. 이를테면 학부모도 그런 선생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무능하기에 폭력에 의존했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초임 교사 시절 폭력에 많이 의존했던 것은 나의 무능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지금의 나는 아이들이 소란 피울 때 조용히 시키는 방법을 안다. 웃음 띤 얼굴로 얼마든지 손쉽게 내 바라는 바 목적을 달성할 수 있건만, 그 시절엔 아이들을 호되게 다그치는 방법이 전부인 줄 알았다. 그리고 지금 나는 아이들이 모이면 소란스러운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 말하자면 아동 행동에 대한 발상의 전환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처럼, 폭력은 기본적으로 무능, 특히 인식론적 한계에서 연유하는 것이다. 우리는 아는 만큼 사물을 사랑할 수 있으며, 반대로 무지는 대개 폭력을 수반한다.
아는 만큼 사랑할 수 있지만, 건강한 인식이 곧 건강한 실천을 보증하지는 않는다. 요컨대 전자는 후자를 위한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은 아닌 것이다.
아이들에게 폭력을 쓰지 않겠노라고, 절대 매를 들지 않겠노라고 마음을 먹고 잘 실천하다가도 어떤 해엔 나의 ‘자기규율’이 무너진 때가 더러 있었다. 기본적으론 나의 못난 품성 탓이겠지만, 통제가 안 되는 아이들을 만나면 잠재된 폭력성이 발동하곤 한다. 명분은 있다. 반 전체 아이들을 위해 수업 분위기를 해치는 ‘불순분자’를 응징하는 것이고, 급우에게 폭력을 쓴 녀석에게 폭력적으로 징벌하는 것뿐이라는…
폭력의 연쇄를 끊어내자
그러나 폭력이 무서운 것은 어떤 교육적 처방을 이유로 한 번 폭력을 쓰게 되면 1년 내내 폭력적 처방이 일상화된다는 점이다. 폭력의 습관화가 정착된 교실에서 교사는 압제자일 뿐이고, 그의 학급경영 방식은 공포정치에 다름아니다. 그 공포정치에 길들여진 신민을 우리는 모범생이라 부른다. 그런 곳에서 민주 시민은 길러지지 않으며, 민주 시민을 기르지 못하는 교육은 교육이 아니다.
초임 때 교직 생활의 출발과 함께 시작된 폭력의 습관화를 청산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착한 교사에서 폭력 교사로 되돌아가는 데는 한순간이었다. 우리가 폭력에 쉽게 의존하게 되는 이유는 폭력이 지닌 ‘즉시성’ 때문이다.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는 말처럼, 폭력은 가하는 쪽에서 그 수단이 아주 가까운 곳에 있기에, 원하는 걸 즉시 이룰 수 있는 편의성이 있다.
그러나 즉시성과 관련해 보다 중요한 것은 폭력을 받는 쪽에서의 반응이 즉각적으로 이루어지는 점이다. 폭력에 대한 ‘정적 강화’가 이루어지는 것은 이런 메커니즘이다. 이 정적 강화는 두 당사자 사이의 역학관계가 일방적일수록 가속화된다. 이런 까닭에, 자기방어나 자기변론에 속수무책인 미성숙한 아이를 상대하는 초등교사는 원천적으로 폭력적인 사람으로 변질될 가능성이 많은 것이다.
나는 한때 폭력적인 교사였고, 또 앞으로도 그럴 위험성이 내 교직 삶 내내 잔존해 있을 것이다. 그래서 폭력을 쓰는 교사도 어느 정도는 이해하는 편이다. 어떤 교장 선생님은 아이들이 그렇게 사랑스럽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교실을 떠나 있는 교장이 아이들을 미워할 이유는 없다. 창백한 교육학 책이 뭐라고 하건 간에, 현실 속의 교실 상황은 그리 녹록치 않다. 우리가 교실에서 만나는 아이들이 모두 천사는 아닌 까닭에 때론 우리는 모종의 전투적인 마인드로 무장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폭력은 그 자체로 이미 반교육적이며 한 번 쓰게 되면 계속 쓰게 되는 마약과도 같은 것임을 기억하자. 그리고 폭력으로부터 가장 망가지는 사람은 교사 자신임을 잊지 말자.
원문: 필인의 꼼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