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의 ‘전문화’
오늘날 교육이란 좋게 말해서 전문화된 분야가 되었고 나쁘게 말하면 공장이 되었다. 오늘날의 교육이란 학생들이 배워야 하는 과목들을 여러 개로 나눠서 각자의 분야를 전공한 선생님이 가르치는 것으로 별다른 설명 없이도 이것이 자동차를 컨베이어 벨트 위에서 조립하는 것과 닮아 있다는 것을 우리는 쉽게 알 수 있다.
이렇게 교육을 전문화한 결과는 우리가 컨베이어 벨트를 공장에 도입한 결과와 같다. 즉 생산성이 크게 증대하였고 숙련공에 해당하는 전문 분야의 선생님은 전문화된 노동자가 되었다.
분업화의 함정
오늘날 사람들은 스스로 신발을 만들거나 옷을 만들어 입지 않는데 그것은 바로 분업화로 생산성이 크게 늘었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 비현실적인 일이라서다. 신발을 만들거나 탁자를 스스로 만드는 일 그리고 농사를 지어서 그 생산물을 먹는 일은 대부분의 경우 그걸 사는 것보다 훨씬 더 힘든 일이다.
그런데 그런 전문화는 한편에서는 인간들을 생산에서 소외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노동을 악으로만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분명히 한편에서는 우리가 그런 노동을 할 기회를 박탈 당하게 되었다는 것도 사실이다. 오늘날에는 설사 우리가 직접 신발을 만들고 탁자를 만들고 농사를 짓고 싶어도 그렇게 하기가 쉽지 않다. 여건이 그렇게 안 되고 그런 능력도 퇴화되었다.
물론 노동에서 벗어나서 훨씬 풍요로운 삶을 누리는 것은 기본적으로는 좋은 일이다. 단지 거기에는 안 좋은 것도 있다. 자동차를 타는 데 익숙해지면 걷는 거리가 줄어들어서 건강이 나빠질 수 있듯이 어떤 것이 편리함과 풍요를 준다고 해도 그것이 당연한 것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일찌기 모던 타임즈같은 찰리 채플린의 영화가 보여주듯이 그 좋다는 분업화가 바로 현대의 위기이기도 했다. 사람들은 지나치게 전문화해서 공장의 부속품처럼 변했고 그것은 인간을 불행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교육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교육에 있어서 전문화나 분업화는 특히 더 나쁜 것 같다. 그것은 선생에게만 나쁠 뿐 아니라 학생에게도 나쁘다. 교육은 신발 만들기처럼 물건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것이 아니다. 바로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것이다. 우리가 신발보다 인간이 더 중요하다는 것에 동감한다면, 분업화로 인한 피해가 교육의 주체인 선생뿐만 아니라 그 대상인 학생에게도 생기기 때문에 더 심각한 문제라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분야의 분업화에 대한 비판은 이미 흔한데 교육에 있어서의 분업화에 대한 비판은 훨씬 드문 것처럼 보인다. 오히려 학생을 더 강하게 몰아세우기 위해서, 이전보다 더 강하게 추구되고 있는 것 같다.
오늘의 교육현장은 하나의 공장이다. 그것은 우리가 대개 신발을 직접 만들지 않는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르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선생님의 역할도 달라졌다. 한 사람이 모든 과목을 다 가르치면서 학생을 키운다고 할 때 그것이 얼마나 힘들 것인가. 오늘날에는 설사 대학교수라고 할지라도 중학교의 모든 과목을 다 지도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그것을 분업화하여 여러 명의 선생들이 각자의 분량을 가르치니까 우리는 졸업생을 양산해낼 수가 있다. 아마 이런 분업화가 아니었다면 엄청난 수의 사람들에게 그 많은 내용을 교육시키는 일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우리는 분업화의 장점을 인정해야 하지만, 앞에서 말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것의 단점에 대해서도 기억해야 한다. 장점에 중독되면 죽을 병에 걸리게 된다. 사람들이 가르치는 일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은 정말 좋기만 한 것일까? 우리는 학생으로도 배우지만 사실 가르치면서 더 많이 배운다. 우리가 편해졌다는 것은 사실 우리가 좋은 배움의 기회를 놓치게 되었다는 뜻일 수도 있다.
부모가 되기
나는 종종 결혼하고 아이를 키우는 것의 최대장점은 인생을 복습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아이를 키우는 일은 부모가 인생과 세상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면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아이가 없는 삶은 현대에서 굉장히 단조로울 것이다. 사람도 만날 필요도 사회의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해 관심도 가질 필요도 줄어든다. 아이가 공동체를 만들고 지키는 끈끈이가 된다. 물론 아이를 키우는 것은 굉장히 소모적인 일이기도 하다. 때로는 아이가 부모의 인생을 송두리째 삼키는 것 같은 때도 있다. 그러나 그래서 결혼도 하지 않고 아이도 키우지 않으면 그 인생은 정말 더 행복하고 가치 있는 것이 되는 것일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오늘날 우리는 가르치는 일을 모두 가정 바깥으로 내보낸다. 세상에는 대학교, 중·고등학교, 초등학교는 물론 학원에 유아원까지 즐비하다. 그래서 우리는 가르치는 일로부터 소외당하게 되었다. 이제 부모는 아이의 교육에 대해 말할 때 아무 것도 모르니 끼어들면 교육을 망칠 것 같은 존재가 된 것같다. 돈이나 내고 입을 다물어야 하며 아이에 대해서는 점점 더 아는 게 없는 존재가 된 것 같다.
이것은 우리가 신발을 만들거나 탁자를 만드는 일로부터 소외당하게 된 것보다 오히려 더 나쁜 일이 아닐까? 우리는 가르치는 골치아픈 일로부터 편해진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교육하고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던져버리고 썩어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아이나 학생과의 관계도 멀어지게 만든 것이 아닐까?
가르치면서 배운다
여러가지 제약조건이 있기는 하지만 대개의 사람은 배움을 줄 선생을 찾는 만큼이나 선생으로서 학생을 찾아야 한다. 가르치는 일은 학생에게만 좋은 것이 아니라 선생에게도 좋은 일이기 때문이다. 배우고 가르치는 일을 멈출 때 인간은 죽어가는 것처럼 느껴진다. 스승이 안 보인다면 스스로가 스승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어떤 사람은 너무 가르치고 어떤 사람은 전혀 가르칠 일이 없다. 선생이라는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은 특정한 분야를 너무 반복해서 가르쳐서 가르치는 일이 그저 지겨운 노동일 뿐 자기에게 별로 도움이 안 된다. 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럴 기회가 없어서 그런 능력이 완전히 퇴화하고 만다. 학생들도 수학샘이나 영어샘은 그저 수학샘이나 영어샘으로 볼 뿐, 선생(先生) 즉 먼저 태어난 사람으로서 광범위하게 배울 것을 가진 인격체로서 보는 것 같지 않다.
오늘날 교육은 학대와 고문이 되어가고 있다. 나는 앞에서 오늘날에는 대학교수라고 할지라도 중학교의 모든 과목을 아이에게 가르치는 일이 어려울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물론 이 말은 불가능하다는 뜻이 아니다. 다만 따로 많은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그렇게 하기는 불가능할 거라는 것이다. 혹시 내 말이 믿기지 않는 사람은 중고등학교 교과서를 펴보기 바란다. 그걸 다시 애써서 공부하지 않고 아이에게 가르쳐 줄 수가 있을런지 생각해보기 바란다. 내 경우, 국어나 음악같은 분야는 상당히 노력한다고 해도 가르칠 수 없을 것 같았다.
다시 말하지만 어른들은 혼자서 중학교 과목도 다 가르치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우리의 중학생 고등학생들은 배우고 있다. 어른들 쪽에서는 별로 어려울 것이 없다. 소수의 전문가만 가르치니까. 대부분의 부모는 기껏해야 등록금이나 학원비만 지불하면 된다. 교육을 담당하는 그 전문가도 자기 분야만 매해 거의 반복해서 가르치는 것이다. 중학생이나 고등학생이 그 모든 분야를 다 공부하고 있다는 사실과 이 분업화 된 현실을 편견 없이 보고 있자면, 이것은 마치 한 떼의 어른들이 한 명의 학생과 줄다리기를 한다는 느낌을 준다.
구조화된 고문
당신이 원시적인 무기로 짐승이나 인간을 다치게 한다면 당신은 그런 상처주기를 생생히 느낄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원격조종장치를 통해 편안히 스위치 하나를 누르거나 심지어 그것도 없이 그저 생각없는 투표를 한번 하는 것을 통해 엄청난 수의 사람들을 죽게 만든다면 당신은 당신이 하는 일의 의미를 모르게 된다. 마찬가지로 생산성이 증대된 공장이 된 교육현장은 그 교육현장을 관리하는 어른들로 하여금 그게 어느 정도의 학대이고 고문인지를 생생하게 느끼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요즘은 창의성이 강조된다. 창의력을 키워야 한다고 누가 말해서 ‘그래 그럼 그걸 교과과정에 더하면 좋겠네’라고 대답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 결과 학생들이 얼마만큼의 혼란에 처하고 어느 정도의 부담이 더해지는가를 직접 몸으로 실감하지 못할 때는 특히 더 그렇다. 그리고 그 부담을 진짜로 실감하는 일은 설사 선생이라고 할지라도 불가능하다. 왜냐면 선생도 분업화의 이쪽 편에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유치원 선생부터 대학교수까지 자기는 10년 20년 걸려서 배운 것을 일주일에 가르치면서 이걸 왜 모르냐고 하는 어른은 세상에 가득하다. 자기에게는 이미 그것이 당연한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공부란 원래 힘든 것이다. 그래서 학생이 힘들다고 말한다고 해서 무조건 자유롭게 해주면 그게 교육이 될 리가 없다. 그런데 힘들다고 말하는데도 ‘원래 힘든거야’라고 말하면서 그걸 무시했다가는 누군가를 질식하게 만들어 버리고 완전히 망가지게 할지도 모른다. 교육에는 섬세한 조절이 필요하다. 그런데 시스템은 학생과 교육의 주체가 되는 인간들 사이를 더 멀게 만든다. 그러므로 학생과 어른 혹은 선생과의 거리가 점점 멀어지는 교육의 현장은 학대와 고문의 현장이 되기 쉽다.
좋은 교육에 대해
이런 어려움과 고통속에서 아이들은 그럼 더 좋은 교육을 받기는 하는 것일까? 심지어 그것도 확실치 않다. 아이들은 전문화 속에서 점점 더 파편화된 지식만 주입받기 때문이다. 우리가 배우기 위해서는 그 모든 지식들이 조합되어 하나로 움직이는 종합화의 예가 필요하다. 다시 말해 존경하는 사람, 소위 롤 모델이 필요한 것이다. 분업화된 교육은 그 반대로 움직인다. 그러니 좋은 교육이라고 말하기가 어렵다. 적어도 언제나 그런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교육 문제는 최종적이고 절대적인 해결책이 있을 수가 없다. 그것은 교육의 바깥을 이루는 우리 사회가 최종적이고 절대적인 상태에 도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회가 어떤가에 따라 같은 교육도 나쁜 것이 될 수도 있고 꼭 필요한 것이 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이 분업화의 문제에 대한 최종적이고 근원적인 해결책이 당장 있을 수는 없다. 다만 그래도 우리는 너무 편하려고 하지 않는게 좋겠다. 너무 당장의 성적과 결과에만 몰두하지 않는게 좋겠다. 자기 마당에 텃밭을 만들고 채소를 키우는 일은 단순히 채소의 가격만 보면 바보같아 보이는 일이지만 큰 눈으로 보면 득이 되는 일이다. 마찬가지로 느리고 비효율적인 일이 더 큰 시야로 보면 안전하고 더 좋은 길일 수 있다.
브레이크 확인도 안하고 전속력으로 달리다가 한번의 사고로 모든 것을 잃는 것이 어리석은 것처럼, 이 글에서 지적하는 분업화된 교육의 문제들을 생각하지 않고 마음껏 달리다가는 모든 것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 많은 어른들은 요즘 학생들의 생활을 보면서 ‘차라리 옛날이 좋았다’고 말한다. 그것은 적어도 부분적으로 사실일거라고 나는 믿는다. 그리고 그 부분이란 바로 지나치게 공장의 생산성 올리듯 변한 교육 환경 때문일 거라고 생각한다.
원문: 나를 지키는 공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