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살자’는 말은 저도 좋아하는 말이고 누구나 몇 번은 들었을 법한 유행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물론 좋은 말이라는 것은 옳은 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은, 이 말의 반대말인 ‘오늘만 생각하지 말자’는 말도 좋고 옳은 말입니다. 게다가 ‘오늘도 생각하고 내일도 생각하는 중용을 지키자’는 말도 옳은 말입니다.
이쯤 되면 도무지 오늘을 살자는 말의 의미가 뭔지 정리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오늘은 내가 화끈하게 쏜다는 말이 유행한다고 정말 매일 화끈하게 쏘다가는 망할 수도 있습니다(…). 오늘을 살자는 말이 비슷한 결과를 만들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오늘을 살자 vs 내일을 위해 살자
오늘을 살자는 말이 어떻게 흔해졌는가에 대해 역사적 답을 찾을 수는 없지만, 누가 이 말을 처음 했던지 간에 저는 이 말이 ‘내일을 위해 살자’라는 말의 반동으로 유행하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지긋지긋하게 내일을 생각해라, 내일을 위해 참아라, 내일을 위해 살아라 같은 말을 들었던 것이죠. 그리고 그렇게 내일 내일 하면서 살다가 빈손이 되어버린 사람들도 많이 목격합니다.
회사를 위해 평생 노예처럼 일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회사에서 쫓겨난 분들, 자식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면서 살다가 초라해진 노인들, 출세를 위해 이를 악물고 참았지만 출세를 이루지 못했거나 출세를 이뤘지만 허무함만 느끼게 된 사람들. 이런 사람들은 자기 입으로 직접 그렇게 말하거나 아니면 스스로의 존재가 그렇게 말하게 만듭니다. 내일을 위해 살지 말아라. 오늘을 위해 살아라. 천국이 저기 먼 곳에, 내일이나 내년쯤 올 거라고 생각하면 인생은 모두 낭비되고 사라지고 만다.
사실 내일을 위해 사는 삶에 너무 중독되어 버린 분들을 보면 안쓰러울 때가 있습니다. 더 벌지 않아도, 더 성공하지 않아도 되는 분들, 이제 저기 먼 산이 아니라 자기 몸, 자기 마음을 돌아봐야 하는 분들이 자꾸 먼 곳만 노리고 위험한 투자와 과로를 계속합니다. 그들은 대개 자신이 천천히 살 수 없고 멈춰 설 수 없는 불안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정작 그들의 불안을 실현시키는 것은 스스로의 욕심과 불안입니다. 20억이 없으면 노후를 보낼 수 없다는 불안이 그나마 손에 가진 재산이나 건강 그리고 귀중한 가족이나 친구를 잃어버리게 만드는 것입니다. 물론 주관적인 평가이겠습니다만 세상에는 자해를 하면서 불안하다고 하는 사람이 정말 많습니다. 스스로 문제를 만들어 내면서 그 문제들이 문제라고 합니다.
예측이 불가능한 시대
오늘을 살자라고 하는 말이 유행하게 된 두 번째 이유는 우리가 범 세계적으로도 탈중심화, 탈이념화의 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시간적 공간적 사회적으로 어떤 예측을 하거나 관계를 이해한다는 것은 어떤 이론, 즉 이념을 전제합니다. 내일이나 내년을 위해 산다는 것은 오늘 밤에 우주인이 지구로 쳐들어오거나 슈퍼화산이 폭발하여 지구가 멸망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저는 우연히 9.11 미국테러사건 때 맨해튼에 살고 있어서 쌍둥이 빌딩이 무너지는 것을 목격했고 3.11 일본 대지진때 일본 사이타마 현에 살아서 그 지진의 여파를 경험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대사건이 벌어지면 한동안 정신적 트라우마가 생깁니다. 다시 말해 뭐든지 가능할 것 같은 공포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미래를 설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게 느껴집니다. 아니 가소로운 일로 느껴집니다. 지금 전쟁이 나서 적군이 쳐들어오는데 기말고사 걱정하는 학생을 보는 느낌이 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신적 트라우마에 빠지는 것은 저뿐이 아닙니다. 어떤 의미로 우리 시대가 그렇습니다. 변화가 너무 크고 빠른 시대에 우리가 상식으로 알던 것이 10년만 지나면 농담처럼 들리는 시대에 사람들은 모두 크고 작은 공포에 빠져들고 트라우마를 겪습니다. 이제 낡은 사고나 낡은 질서에 집착하다가는 21세기에 왕조이데올로기에 빠져서 ‘우리 대왕마마를 위해 이 천한 백성이 신명을 다하겠습니다’라고 외치는 사람 꼴이 됩니다.
오늘을 살자는 말은, 이런 시대에 나오는 말입니다. 그 말의 다른 표현은 ‘예측하려고 하지 말아라, 예측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념을 버리고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생각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이 시대의 어떤 착각
그런데 여기에 착각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념이 불가능하다, 질서가 불가능하고 예측할 수 없다는 말은 그런 것들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닙니다. 실은 그런 것들이 더욱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그런 것들이 가능하다면 그 가치는 더욱 크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탈석유 시대를 산다는 말은 석유자원이 고갈되어 가니 석유자원이 무한한 것처럼 석유소비에 중독되다가는 위기가 온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대체 에너지원을 찾아야 하며 동시에 석유소비의 효율을 더욱 높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탈석유 시대는 그것이 완전히 끝나서 새로운 에너지 시대가 오기 전에는 석윳값이 오르고 에너지가 매우 소중해지는 시대이지, ‘이제 석유 따위는 버려도 좋은 시대’가 아닙니다.
오늘을 살자라는 말을 착각하면 우리는 내일을 위해 살고 국가를 위해 살고, 가족을 위해 사는 것들을 무시하게 되기 쉽습니다. 오늘을 위해 살자는 말은 ‘나’라는 존재의 테두리를 어디로 긋는가에 따라 다르게 해석됩니다. 자기 배우자와 자식만 챙기는 사람은 오늘을 살자라는 말을 이 작은 공동체의 행복에만 집중하자는 의미로 해석하며,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생각하는 ‘나’라는 존재의 테두리는 그것들을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그 테두리가 그것보다 더 크고 어떤 사람들은 그것보다 더 작습니다. 어떤 사람의 오늘은 대한민국의 오늘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오늘을 살자라는 말을 철저하게 내 몸 하나에 관한 이기적인 생각으로 해석합니다.
자기 존재의 테두리를 확장하는 일
지금 당장 오늘의 살자라는 말을 어떻게 해석하는가도 중요하지만, 그런 태도가 우리를 어디로 이끄는가도 중요합니다. 즉 변화의 방향도 중요합니다. 이념이나 질서가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관심의 폭을 줄이면, 지금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존재의 테두리는 점점 더 작아져 갈 것입니다.
그리고 그 종착역은 순간의 쾌락에 몰두하고 심지어 자기 자신도 미워하고 타인으로 생각하는 불쌍한 상태일 수 있습니다. 세계는커녕, 국가도 지역사회도, 이웃도 가족도 이제 관심이 없어진 상태입니다. 실은 탈중심화의 시대라는 것은 가족과 이웃과 지역사회가 더욱더 소중해지는 시대인데 말입니다. 이렇게 보면 내일을 위해 살자라는 말에 대한 해독제로 제공된 ‘오늘을 살자’라는 말은, 무시무시한 마약처럼 느껴집니다.
요즘 세상에는 성급한 구세주는 오히려 더 많아진 것 같습니다. 그들은 이렇게만 하면 교육문제가 해결되고 저렇게만 하면 부동산 문제나 국가부채문제, 경제문제가 해결된다고 말합니다. 땅에 죽 금을 긋고 여기서 저기까지 파면 우리는 천국에 살게 된다고 말합니다. 그런 말들이 얼핏 봐서 그럴듯하다고 해도 우리는 그런 거대한 이념에 대해서는 조심해야 합니다. 그들은 정말 대부분의 경우 할 수 없는 것을 할 수 있다고 말하고 모르는 것을 안다고 말하는 것이니까요. 그런 사람이 당장 오게 만들 수 있다고 말하는 미래를 쳐다보는 것은 위험합니다.
오늘을 살자라는 말은 섣불리 어떤 질서나 이념이 당연한 거라고 맹신하게 되는 것에 대한 경계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오늘을 살자라는 말은 우리 시대에 그 존재를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는 거대한 질서는 별로 없다는 가르침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우리는 질서를 추구하고 믿음과 연결을 추구하게 됩니다.
탈 중심의 시대, 탈이념화의 시대는 믿음과 이념과 신뢰의 가치가 더욱 높은 시대입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탈중심화의 시대는 오히려 친구와 가족과 지역사회가 더 중요해지는 시대입니다. 그들의 미래가 우리에게 더 중요해지는 시대입니다. 골치 아프게 나 혼자만, 오늘만 생각해도 좋은 시대가 아닙니다.
폭풍이 부는 밤에 의지가 되어줄 무언가
이제까지 쓴 것이 오늘도 생각해야 하지만 내일도 생각해야 한다는 식의 적당한 절충을 하라는 말을 넘어서자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의 핵심을 보여주는 다른 말이 필요합니다. 저는 그것을 자기 존재의 테두리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자기 존재의 테두리를 더듬어야 합니다. 이 말은 우리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계속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질문이 멈추는 순간 우리는 어딘가에 갇히고 점점 더 작아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의식하지도 못하는 사이에 오늘을 산다라는 말의 의미가 점점 달라질 것입니다.
인간은 생명이고 생명은 가만히 있으면 돌처럼 변하지 않는 게 아니라 퇴화합니다. 결국 우리는 제자리에 서 있기 위해서라도 움직여야 하고 배워야 합니다. 배움이 멈추는 순간이 죽어가기 시작하는 순간입니다. 요즘 인문학강좌에 관심 있는 분들이 많은 것은 이점을 느낀 분들이 많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는 일은 정말 쉽지가 않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누군가가 내일을 위해 살자고 하면 그렇게 살고 오늘을 살자라고 하면 그렇게 사는 식으로는 일이 엉망진창이 될 것입니다. 언제나 중요한 것은 지금 자기가 서 있는 곳이 어디인지 점검하고 나는 그것에 대해 어떻게 느끼는지, 나는 그것에 대해 뭘 할 것인지를 생각해 보는 일일 것입니다. 그럴 분은 별로 없겠지만 오늘을 살자라는 말에 들떠서 소중한 것을 가볍게 던져버리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폭풍이 부는 밤에는 의지가 되어 줄 것이 더 소중한 법이니까요.
원문: 나를 지키는 공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