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외 어마어마한 팬덤을 형성한 것도 모자라 해마다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는 일본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그러나 정식으로 문학수업을 받은 적 없고, 스물 아홉 살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소설을 쓰고 데뷔한 작가입니다.
스물 아홉의 그는 재즈 바를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수많은 재즈 음악을 들으며 일찍 결혼한 아내와 함께 사는 생활도 행복했지만 그는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장래에 대해 고민이 많아졌습니다. 어느날 그는 사람 없는 야구장 관중석에 혼자 앉아 있다가 문득 “나는 소설가가 될 것이다”라는 계시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는 이를 ‘에피파니(epiphany)’라고 표현하고 있는데요. 그날 바로 몽블랑 만년필을 사들고 원고지에 소설을 쓰기 시작했고 그 작품이 바로 첫 소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1979)입니다.
하루키는 최근 펴낸 에세이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에서 자신이 소설을 쓰게 된 계기와 방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가 이 책에서 밝힌 소설 창작론을 요약해봤습니다.
1. 외국어로 쓴 뒤 번역해 나만의 문체를 만든다
그는 첫 소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를 200자 원고지 400장 정도 분량으로 썼지만 만족스럽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본인 스스로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이때 그는 남들과 다르게 써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일본문학에 대해 잘 몰랐고 러시아 문학과 미국 소설을 읽으며 자란 그에게 일본어 문장력으로 승부를 본다는 것은 경쟁력이 없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그는 소설을 영어로 다시 쓰기 시작합니다. 그는 이렇게 한 것이 영어 실력이 뛰어나서는 아니라고 말합니다. 오히려 영어로 쓰면 어휘가 제한되어서 짧은 문장, 평이한 문장을 쓸 수밖에 없는데 이렇게 쓴 문장을 다시 일본어로 ‘번역’하니 지금까지와 전혀 다른 문장이 나와 이것을 자신의 문체로 삼기로 결정합니다. 하루키 특유의 번역투 문장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그때 발견한 것은 설령 언어나 표현의 수가 한정적이어도 그걸 효과적으로 조합해내면 그 콤비네이션을 어떻게 풀어나가느냐에 따라 감정 표현, 의사 표현이 제법 멋지게 나온다는 것이었습니다. 요컨대 ‘괜히 어려운 말을 늘어놓지 않아도 된다’, ‘사람들이 감탄할 만한 아름다운 표현을 굳이 쓰지 않아도 된다’라는 것입니다.” (50쪽)
소설의 세계는 역사적으로 문장의 대가들이 수많은 작품을 남겨온 전형적인 ‘레드오션’입니다. 이런 곳에 들어가려면 문장력으로 역사 속 천재들과 정면승부를 펼치기보다는 하루키처럼 나만의 문체를 찾아서 독창성을 발휘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2. 오리지널리티는 마라톤이다
하루키는 오리지널리티란 단기간에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비틀스나 비치 보이스처럼 등장과 동시에 새롭다고 각광받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의 경우 기존의 틀을 깨는 작품이 탄생하면 처음에는 외면받다가 나중에 재평가가 이루어집니다. 스트라빈스키나 말러, 혹은 피카소의 그림이나 나스메 소세키의 문체 역시 그런 과정을 거쳤습니다. 처음에는 기성세대로부터 불쾌하다는 반응을 얻었지만 지금은 고전으로 추앙받고 레퍼런스로서의 기능을 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아무리 ‘내 작품은 오리지널입니다!’ 하고 소리쳐본들 그런 소리는 대부분 바람에 날려가 사라져버립니다. 무엇이 오리지널이고 무엇이 오리지널이 아닌가, 그 판단은 작품을 받아들이는 사람=독자와 ‘합당한 만큼 경과한 시간’의 공동 작업에 일임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작가가 할 수 있는 일은 자신의 작품이 적어도 연대기적인 ‘실제 사례’로 남겨질 수 있도록 전력을 다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즉 납득할 만한 작품을 하나라도 더 많이 쌓아 올려 의미 있는 몸집을 만들고 자기 나름의 ‘작품 계열’을 입체적으로 구축하는 것입니다.” (100쪽)
소설가라면 꾸준하게 소설을 써나가 작품 계열을 이룰 정도가 되어야만 나중에 그의 작품세계가 독창적이었다고 인정받을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단순히 ‘한 방’을 노리고 쓴 작품 한 편으로는 독창성을 평가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하루키의 이 문장을 읽고 조금 뜬금없지만 미국의 극사실주의 화가 존 캐시어(John Kacere)가 떠올랐습니다. 그는 여성의 엉덩이 그림을 실제보다 훨씬 큰 사이즈로 그렸습니다. 그가 젊은 때의 치기로 이런 그림을 그리다 중단했다면 그는 한 번 튀어보려한 화가로 금세 잊혔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평생 동안 여성의 엉덩이만 그린 끝에 결국 그 분야의 대가로 오리지널리티를 인정받았습니다. 결국 오리지널리티란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아니라 그 아이디어를 손에 들고 달리는 마라톤입니다.
3. 더하지 않고 뺄 때 나만의 글이 나온다
하루키는 뉴욕타임스가 2014년 초기 비틀즈에 대해 언급했던 문장을 인용해 오리지널리티를 다음과 같이 정의합니다.
“신선하고, 에너지가 넘치고, 그들 자신의 것” (113쪽)
그는 자신만의 문체나 화법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나에게 무엇을 플러스해간다’는 것보다 ‘나에게서 무언가를 마이너스 해간다’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정보 과잉 시대에 필요없는 콘텐츠를 쓰레기통에 던져버려야 머릿속이 좀 더 자유롭게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빼야 할까요? 하루키는 그 기준은 자기 자신만이 알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을 하고 있을 때, 당신은 즐거운가’라는 기준을 갖고 가슴 설레는 기쁨이 찾을 수 없는 일이라면 미련 갖지 말고 깨끗이 몰아내라고 말합니다. 더 많이 버릴수록 더 많은 여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또 ‘나는 무엇을 추구하는가’보다 ‘뭔가를 추구하지 않는 나 자신은 원래 어떤 것인가’를 머릿속에 그려보라고 말합니다. ‘나는 무엇을 추구하는가’라는 문제를 정면에서 곧이곧대로 파고들면 이야기는 불가피하게 무거워지고 문장은 힘을 잃어버립니다. 어깨에 힘을 빼고 자유롭게 쓸 때 나만의 글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뭔가를 추구하지 않는 나 자신’은 나비처럼 가벼워서 하늘하늘 자유롭습니다. 손바닥을 펼쳐 그 나비를 자유롭게 날려주기만 하면 됩니다. 그렇게 하면 문장도 쭉쭉 커나갑니다.” (110쪽)
4. 느긋하게 마음 먹고 쓰는 것을 즐긴다
‘작가의 블록’은 번아웃되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하루키는 소설을 써온 35년 동안 단 한 번도 슬럼프를 겪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는 그 비결로 자유로움을 꼽습니다. 쓰고 싶은 마음이 샘솟지 않을 때는 쓰지 않고, 오직 쓰고 싶을 때만 소설을 쓴다는 것입니다.
“첫 소설을 쓸 때 느꼈던, 문장을 만드는 일의 ‘기분 좋음’ ‘즐거움’은 지금도 기본적으로 변함이 없습니다. ‘자, 이제부터 뭘 써볼까’ 하고 생각을 굴릴 때 정말로 행복합니다. 소설이 안 써져서 고생한 경험은 없습니다. 만일 즐겁지 않다면 애초에 소설을 쓰는 의미 따위는 없습니다. 소설이라는 건 기본적으로 퐁퐁 샘솟듯이 쓰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57쪽)
하루키는 소설을 쓰는 것은 효율로만 따지자면 미련하고 비효율적인 행위라고 말합니다. 같은 이야기를 수없이 반복해서 표현하는 시간낭비라는 것입니다. 소설가는 이런 행위에 도전하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소설을 쓰려면 성격이 느긋해야 합니다. 비효율적인 일이라도 감당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급하게 생각하고 판단하는 사람은 소설을 쓰기 힘듭니다. 아무도 알아줄 것 같지 않은 한 줄 표현을 더 잘 쓰기 위해 계속해서 문장을 고치고 다듬는 과정을 반복하려면 마음을 느긋하게 먹고 그 과정 자체를 즐길 수 있어야 합니다. 재능은 있지만 이 과정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은 대개 한두 권의 소설을 남기고 떠납니다. 하루키가 35년 넘게 소설가라는 직업으로 살고 있는 가장 큰 비결은 아마도 그의 이런 성격과 태도 덕분일 것입니다.
5. 글감을 머릿속 캐비닛에 저장한다
“소설가를 지망하는 사람이 할 일은 재빠른 결론을 추출하는 게 아니라 재료를 최대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축적해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원재료를 많이 저장해둘 ‘여지’를 자기 자신 속에 마련해둘 일입니다.” (122쪽)
글을 쓰려면 글감이 필요합니다. 하루키는 장편소설을 쓰기 전에 차곡차곡 재료를 모읍니다. 그 재료를 노트하는 게 아니라 머릿속에 저장합니다. 그가 모으는 글감은 논리적인 사건보다는 뭔가 이상한 것들, 미스터리하고 고개를 갸웃거리게 되는 것들입니다. 그는 이런 사건이나 생각들을 채집해 간단한 라벨(날짜, 장소, 상황)을 붙여 머릿속에 보관해둡니다. 잊어버리면 어떻게 하느냐고요? 하루키는 이렇게 말합니다. 어차피 잊어버릴 거라면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이니 그냥 놓아두라고요.
캐비닛이 가득 차면 서랍을 열어서 글감을 소설로 조립합니다. 그는 이 과정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뇌 속 캐비닛에 보관해둔 온갖 정리 안 된 디테일을 필요에 따라 소설 속에 그대로 조립해 넣으면, 거기에 나타난 스토리는 나 자신도 놀랄 만큼 내추럴하고 생생하게 살아납니다.” (125쪽)
그렇다면 하루키의 머릿 속은 방대한 수의 서랍이 달린 캐비닛으로 가득 찬 공간일 것입니다. 하루키가 생각하는 소설가란 머릿속에서 서랍을 열고 재료를 꺼내 글이라는 ‘매직’으로 만들어내는 마술사입니다.
“만일 당신이 소설을 쓰기로 마음먹었다면 주위를 주의 깊게 둘러보십시오. 세계는 따분하고 시시한 듯 보이면서도 실로 수많은 매력적이고 수수께끼 같은 원석이 가득합니다. 소설가란 그것을 알아보는 눈을 가진 사람을 말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 멋진 것은 그런 게 기본적으로 공짜라는 점입니다. 당신이 올바른 눈만 갖고 있다면 그런 귀중한 원석은 무엇이든 선택 무제한, 채집 무제한입니다. 이런 멋진 직업, 이거 말고는 별로 없는 거 아닌가요?” (140쪽)
6. 하루에 원고지 20매씩 규칙적으로 쓴다
하루키는 새벽에 일어나 주방에서 커피를 데워 큼직한 머그잔에 따르고 그 잔을 들고 책상 앞에 앉아 컴퓨터를 켜고 소설을 씁니다. 이 과정을 매일 반복합니다.
하루키는 장편소설을 쓸 경우, 하루에 200자 원고지 20매씩 규칙적으로 쓴다고 합니다. 그는 이 작업이 기계적이라고까지 표현합니다. 좀 더 쓰고 싶더라도 20매 정도에서 딱 멈추고, 오늘은 뭔가 좀 잘 안된다 싶어도 어떻든 노력해서 20매까지는 쓴다는 것입니다.
“쓸 수 있을 때는 그 기세를 몰아 많이 써버린다든지, 써지지 않을 때는 쉰다든지 하면 규칙이 깨지기 때문에 철저하게 지키려고 합니다. 타임카드를 찍듯이 하루에 거의 정확하게 20매를 씁니다.” (150쪽)
장편소설을 쓰는 데는 1년가량 긴 시간이 필요합니다. 한 가지 이야기를 머릿속에 담고 1년을 살아가려면 페이스를 유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마라톤을 뛸 때 아무리 힘들어도 왼발과 오른발을 규칙적으로 내뻗어야 하는 것처럼, 또 초반에 아무리 힘이 있어도 너무 무리하면 안 되는 것처럼, 장편소설을 쓰는 과정도 규칙적일 필요가 있습니다.
7. 소설 쓸 땐 소설에만 집중한다
하루키는 소설 쓰는 기간에는 소설 이외의 것은 하지 않습니다. 장편소설을 쓸 경우엔 가장 먼저 책상 위에 있는 것을 깨끗이 치웁니다. 만일 그때 에세이를 연재하는 중이었다면 거기서 일단 중지합니다.
그는 <양을 둘러싼 모험>(1982)의 집필에 착수하면서 그때까지 운영하고 있던 재즈 바를 정리하고 도쿄를 떠납니다. 한적한 곳에서 오로지 장편소설에만 집중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이때 상황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당시는 아직 문필 활동보다 가게 수입이 더 많았지만 마음을 굳게 먹고 그것을 버리기로 했습니다. 약간 과장해서 말하자면 퇴로를 끊어버린 것입니다. 주위 사람들은 하나같이 반대했지만 나는 전혀 망설임이 없었습니다. 예전부터 ‘뭔가 하기로 들면 내 손으로 철두철미하게 하지 않고서는 성이 차지 않는’ 면이 있었습니다. ‘가게는 다른 사람에게 맡겨놓고’라는 어중간한 짓은 성격상 못 합니다. 여기가 내 인생의 중요한 고비다. 마음을 굳게 먹고 결단을 내려야 한다. 아무튼 단 한 번이라도 좋으니 내가 가진 능력을 모조리 쏟아부어 소설을 쓰고 싶다. 안 된다면 뭐, 그때는 어쩔 수 없다. 다시 처음부터 새로 시작하면 된다.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264~265쪽)
오로지 소설에만 집중해 규칙적으로 작업하는 것이 지치지 않고 오랫동안 작업을 할 수 있는 비결이라고 하루키는 말하고 있습니다.
8. 고칠 곳이 없을 때까지 고친다
하루키는 하와이 카우아이 섬의 노스쇼어에서 <해변의 카프카>(2002) 초고를 6개월 동안 썼습니다. 이후 다 쓴 원고를 뜯어고치는 수정 작업을 수도 없이 하는데 그는 태생적으로 이 과정이 적성에 맞다고 말합니다.
우선, 이야기의 큰 그림과 일관성을 맞추는 1차 수정을 하고, 일주일 정도 쉰 뒤 묘사와 대화를 조정하는 2차 수정을 합니다. 다시 며칠 쉰 다음에 소설 전개 흐름의 나사를 조이고 푸는 3차 수정을 거칩니다.
이후 한 달 정도 여행을 다녀오면서 머리를 식힙니다. 하루키는 이 과정을 ‘양생’이라고 말합니다. 그냥 가만히 놔둬 바람을 쐬게 하면서 내부가 단단히 굳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글도 머리도 새로운 상태가 됩니다. 그 다음 철저한 고쳐쓰기에 들어갑니다. 그러면 전에 보이지 않던 결점이 또렷하게 보입니다.
다음 단계는 제3자의 의견입니다. 하루키는 가장 먼저 아내에게 보여줍니다. 이때 한 가지 규칙이 있습니다. 그것은 ‘트집 잡힌 부분이 있다면 무엇이 어찌 됐건 고친다’는 것입니다. 비판을 수긍할 수 없더라도 어쨌든 지적받은 부분이 있으면 그곳을 처음부터 다시 고쳐 씁니다. 방향성이야 어찌 됐든, 다시 자리를 잡고 앉아 그 부분을 고쳐 쓴 다음에 원고를 재차 읽어보면 거의 대부분의 경우 이전보다 좋아졌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다면 대체 다시쓰기는 언제 끝나는 걸까요? 하루키는 레이먼드 카버를 인용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한 편의 단편소설을 써내고 그것을 찬찬히 다시 읽어보고 쉼표 몇 개를 삭제하고, 그러고는 다시 한 번 읽어보고 똑같은 자리에 다시 쉼표를 찍어 넣을 때, 나는 그 단편소설이 완성되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164쪽)
즉, ‘이 정도가 한계다. 이 이상 더 고치면 도리어 맛이 사라질지도 모른다, 라는 미묘한 포인트에 도달할 때까지’ 하루키는 교정지가 새카맣도록 지우고 다시 쓰기를 반복합니다.
9. 퇴고 단계에선 자존심을 버린다
공들여 쓴 글에 대한 제3자의 비판을 듣는 것은 정신적으로 힘든 일입니다. 반박하고 싶고 내 의도를 몰라준 그가 야속하기만 합니다. 하지만 하루키는 글 쓰는 과정에서라면 제3자의 의견을 반드시 수용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자존심이나 자부심 따위는 최대한 내던져버리라고 말합니다.
“장편소설을 다 쓰고 난 작가는 대부분 흥분 상태로 뇌가 달아올라 반쯤 제정신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제정신인 사람은 장편소설 같은 건 일단 쓸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제정신이 아닌 것 자체에는 딱히 문제가 없지만, 그래도 ‘내가 어느 정도 제정신이 아니다’라는 건 자각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리고 제정신이 아닌 인간에게 제정신인 인간의 의견은 대체적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162쪽)
따라서 하루키는 제정신인 인간이 지적한 부분은 반드시 어떻게든 고치라고 말합니다.
“읽은 사람이 어떤 부분에 대해 지적할 때, 지적의 방향성은 어찌 됐건, 거기에는 뭔가 문제가 내포된 경우가 많습니다. 그 부분에서 소설의 흐름이 많든 적든 턱턱 걸린다는 얘기입니다. 내가 할 일은 그 걸림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설령 ‘이건 완벽하게 잘됐어. 고칠 필요 없어’라고 생각했다고 해도 입 다물고 책상앞에 앉아 아무튼 고칩니다. 왜냐하면 어떤 문장이 ‘완벽하게 잘됐다’라는 일은 실제로는 있을 수 없으니까.” (157~158쪽)
그러나 제3자의 비판을 듣는 것은 퇴고할 때뿐입니다. 하루키는 작품이 출간된 후에 들어오는 비평은 ‘마이페이스’로 적당히 흘려 넘깁니다. 그런 것에 일일이 신경을 쓰다가는 몸이 당해내지를 못하기 때문입니다.
10. 시간은 내편… 마감에 쫓기면서 쓰지 않는다
하루키는 마감에 쫓기면서 쓰는 작가들에게 일침을 가합니다. 그런 방식이 언제까지고 가능한 게 아니라고 말합니다.
“(마감에 쫓겨서 쓰는 방식은) 스타일로서는 꽤 폼나게 보이지만, 어느 기간에 그런 방식으로 뛰어난 작품을 써냈더라도, 긴 스팬을 두고 부감해보면 시간의 경과와 함께 작품이 점점 묘하게 비쩍 마른 듯한 느낌이 듭니다. 시간을 내 편으로 만들자면 어느 정도 자신의 의지로 시간을 컨트롤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내 지론입니다.” (169쪽)
한 마디로 시간 핑계대지 말라는 것입니다. 지금 최선을 다한 완성본을 내라는 것입니다. 나중에 ‘그때 더 잘 쓸걸’ 후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때는 그게 최선이었어’라고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루키는 그가 직접 번역한 레이먼드 카버의 에세이를 인용합니다.
“시간이 있었으면 좀 더 잘 썼을 텐데… 나는 소설 쓰는 친구가 그런 말을 하는 것을 듣고 정말 깜짝 놀랐다. 만일 그가 써낸 이야기가 힘이 닿는 한 최선을 다한 것이 아니었다면 대체 무엇 때문에 소설 따위를 쓰는가. 나는 그 친구를 향해 말하고 싶었다. 제발 부탁이다. 지금 당장 다른 일을 찾아봐라. 그게 아니라면 너의 능력과 재능을 최대한 쏟아부어 글을 써라. 그리고 변명이나 자기 정당화는 안 돼. 불평하지 마. 핑계 대지 말라고.” – 레이먼드 카버 <글쓰기에 대하여> 중 (168쪽)
11. 작가는 군살이 붙으면 끝장이다
창작 활동을 이어가려면 ‘지속력’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체력입니다. 하루키가 매년 마라톤에 참가하고 매일 1시간씩 달리기와 수영을 한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가 운동을 게을리하지 않는 이유는 소설에 집중하기 위해서입니다. 지속력이 몸에 배도록 하기 위해 기초 체력을 만드는 것입니다.
하루키는 ‘작가는 군살이 붙으면 끝장’이라고 말합니다. 약간 비유적인 말이지만 그만큼 기초 체력을 중시한다는 것입니다. 큼직한 이야기를 하려고 할수록 작가는 좀 더 깊은 곳까지 내려가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정신력을 갖춰야 하고, 정신력을 지속시키기 위해선 체력이 필수입니다.
“자신의 내적인 혼돈을 마주하고 싶다면 입 꾹 다물고 자신의 의식 밑바닥에 혼자 내려가면 되는 것입니다.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과묵한 집중력이며 좌절하는 일 없는 지속력이며 어떤 포인트까지는 견고하게 제도화된 의식입니다. 아울러 그러한 자질을 일정하게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신체력입니다. 그것이 소설가로서의 나의 기본적인 생각입니다.” (195쪽)
12. 기분 전환을 위해 번역을 한다
하루키는 뛰어난 미국 문학 번역가이기도 합니다. 레이먼드 챈들러, 스콧 피츠제럴드, 커트 보네거트, 존 어빙 등의 작품을 일본에 소개했습니다. 그는 장편소설 집필 중엔 책상을 치우고 아무것도 하지 않지만 유일하게 번역만은 예외로 남겨둡니다. 그는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번역이란 기본적으로 테크니컬한 작업이라서 소설을 쓸 때와는 그 사용하는 뇌의 부위가 다릅니다. 그래서 소설을 쓰는 데 부담이 되지 않습니다. 근육의 스트레칭과 같아서 그런 작업을 병행하는 것은 뇌의 균형을 잡는 데 오히려 유익한지도 모릅니다.” (147쪽)
즉, 뇌의 균형을 잡기 위해, 기분 전환을 위해, 또 글쓰기 공부를 위해 번역을 한다는 것입니다. 오전에 5시간 정도 장편소설을 쓴다면 오후에는 운동을 하고 내킬 때 번역을 합니다. 이렇게 하면 소설 쓸 때 쓰지 않던 근육과 뇌의 다른 부위를 쓰면서 몸의 균형을 잡아줄 수 있습니다.
꼭 하루키처럼 번역을 하지 않더라도 테크니컬하게 두뇌를 쓸 수 있는 행동이면 괜찮을 것 같습니다. 예컨대 딱딱한 법전을 읽는다거나 사건사고 기사를 본다거나 혹은 프로그래밍 코드를 짠다거나 단순한 게임을 한다는 식입니다.
13. 자유롭게 쓴다
하루키는 1978년 도쿄 신주쿠 진구 구장에서 프로야구 개막전을 지켜보다 야쿠르트 스왈로스 1번타자 데이브 힐턴이 2루타를 날린 순간 불현듯 소설을 쓰고 싶다는 마음이 들어서 첫 소설을 썼습니다. 큰 욕심도 없었고 어떤 제약도 없었습니다. 그 나름의 소설을 쓰고 싶었고 그렇게 했습니다. 그가 소설에 대해 갖고 있는 기본적인 태도는 자유로움입니다.
“자유롭고 내추럴한 감각이야말로 내가 쓰는 소설의 밑바탕에 자리한 것입니다. 그것이 기동력이었습니다. 자동차로 비유하자면 엔진입니다. 다양한 표현 작업의 근간에는 늘 풍성하고 자발적인 기쁨이 있어야만 합니다. 오리지널리티는 바로 그러한 자유로운 마음가짐을, 제약 없는 기쁨을, 많은 사람들에게 최대한 생생한 그대로 전하고자 하는 자연스러운 욕구와 충동이 몰고 온 결과적인 형체에 다름 아닌 것입니다. (109쪽)
결과적으로 남들이 뭐라고 하든 자신만의 방식으로 자유롭게 글을 쓰면 될 것 같습니다. ‘예술가는 이래야지’ 하는 규칙을 마음에 담을 필요도 없고, 예술가가 아니라고 자조할 필요도 없습니다. 앞서 열거한 12가지 방식도 참고로만 할 뿐 그것을 따라할 필요도 전혀 없습니다.
무릇 무언가를 오랫동안 쓰려는 자는 그 과정에서 그만의 방식을 찾을 것이고, 또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무언가를 오랫동안 쓸 수도 없습니다. 따라서 위의 12가지를 규칙으로 베끼려 하지 말고, 노트도 하지 말고, 그저 하루키처럼 머릿속에 라벨을 붙여 담아두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만약 시간이 흘러 잊혀지면 그것은 하루키의 말마따나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일 지도 모르니까요. 자유롭게 나만의 글을 쓰다 보면 자연스럽게 나만의 규칙 또한 만들어지리라 믿습니다.
“다른 사람이 읽고 있는 책을 읽고 있다면, 다른 사람이 하는 생각밖에 할 수 없다.” – 무라카미 하루키
원문: 유창의 창작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