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전순결 캠페인, 5월 10일 10시부터 셔틀버스 앞 벤치에서 만나요.”
고신대 총여학생회는 9일 페이스북을 통해 혼전순결 캠페인의 시작을 알렸다. 서명에 참여하는 사람에게 추첨을 통해 은반지도 준댔다. 이 얼마나 부모가 허락하는 힙합 같은 말인가. 기독교 안에서 혼전순결이 의미하는 바를 친절하게도 설명했다.
“하나님께서는 성적인 관계를 할 수 있는 관계는 부부관계 밖에 없다고 말씀하시고 있기에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앞에서 순결한 삶을 살아야합니다. 나 자신뿐만 아니라 미래의 가정을 위해, 부부 관계를 위해, 하나님 앞에서 순결한 삶을 사는 자가 되기 위해 혼전순결을 해야합니다.”
혼.전.순.결. 혼전순결이다. 인류는 진화한다. 사회는 변화하고 규범은 발전한다. 그런데 이 혼전순결주의에 대한 말들은 차라리 민속촌에 전시되는 게 더 바람직해 보인다. 아니 차라리 NPC들이 이하늬의 레드카펫을 부르는 요즘의 민속촌이 더 현대적이겠다. 수 세기 전이나 지금이나 결혼과 섹스에 대한 생각은 변하지도, 나아지지도 않았다. 이는 비단 고신대 총여학생회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혼전순결주의의 위험한 전제
혼전순결주의는 다음과 같은 전제를 포함한다. “미래의 가정을 위해 부부 관계를 위해.” 즉 미래에는 부부가 되어야 한다. 가정을 이루어야 한다. 그를 위해서 순결을 지켜야 한단다. 이것은 일종의 정상가족 이데올로기다. 누구나 결혼을 하고, 가정을 갖고, 자식을 낳을 것을 상정해 만든 혼전순결의 전제. 결혼하지 않으면 섹스할 수 없다.
정상가족 이데올로기는 많은 이들에게 폭력이었다. 오로지 결혼해 가정을 꾸리고 자식을 낳은 이들만이 정상이 되고, 그렇지 않은 이들은 무언 혹은 유언의 비난을 들어야 했고, 비정상이라는 꼬리표를 달아야 했다는 점에서 그랬다. 실제로는 정상이 될 수 있는 사람들은 몇 안 되었다. 대부분의 가정은 비정상적.
그렇다. 많은 이들이 결혼을 포기하고, 비혼주의를 선언하며, 많은 사람들이 이혼하거나 사회적인 혹은 법적인 이유로 결혼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혼전순결’이라는 것이 대체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가. 혼전순결이라는 이름 아래서 이들에게 섹스는 금지되어 있으며 영영 허락되지 않은 것인가. 이를테면 섹스는 결혼을 할 수 있을 정도로 풍족한 이들에게만 허락된 것인가?
총여학생회가 지지하는 혼전순결?
물론 혼전순결에 대한 선언은 개인의 취향일 수 있다. 취존한다. 타인에게 순결할 것을 강요하지 않는다면 개인의 선언이나 서명 따위야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가 되는 것은 이 캠페인을 연 주체가 ‘총여학생회’라는 것이다.
순결은 오래전부터 여성들에게 강조되던 것이었다. 남성들은 대체로 순결을 지켜야 한다는 강박으로부터 자유로웠다. 강간을 당한 여성이 순결을 잃었다고 비난을 받아야 했던 게 대한민국의 부끄러운 초상이었다. 순결을 잃는 것을 두려워해야 하는 쪽은 늘 여성들이었다. 남성이 결혼 전에 섹스를 했다고 비난받는 일은 거의 없었다. 오히려 ‘총각 딱지’를 떼는 것이 자랑스럽고 또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혼전순결을 지키자며 등장한 이 캠페인은 그래서 부적절하다. 그것이 총여학생회의 캠페인이었다는 점에서 더더욱 그렇다. 총여학생회는 70년대 이후 대학가에 전파된 페미니즘을 사상적 기반으로 두고 있기 때문이다. 한쪽으로 기울어진 사회에서 순결을 강조하는 것은 그 자체로 여성억압을 뜻하기 쉽다. 이는 기독교 학교라는 맥락을 고려해도 부적절해 보일 수밖에 없다.
사라지고 있는 총여학생회, 그들이 해야 할 일은
최근 대학가에선 총여학생회가 사라지고 있다. 누군가는 여성 상위 시대를 말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역차별을 말한다. 성차별은 존재하지 않는데 무엇 때문에 총여학생회가 필요한지를 묻는다. 있는 학교에서는 없애야 한다는 말이 나온다. 기존의 총여학생회는 ‘여성위원회’나 ‘성평등위원회’ 정도로 대체되고 있다. 그러나 글쎄.
대한민국은 여전히 크게 기울어져 있다. OECD 통계에 따르면 한국 기업에서 여성 임원이 차지하는 비율은 0.4%에 불과(2014년 기준)했다. 순위를 찾으려면 맨 아래로 눈을 돌리면 된다.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발표하는 유리천장 지수 역시 한국은 최하위를 기록했다. 4년 연속이었다.
취업차별, 임금 격차, 경력 단절뿐 아니라 성폭력과 성인지 부족에 대한 문제도 여성인권을 위협하는 요소로 남아 있다. 성차별은 여전하다. 이런 상황에서 그나마 남아 있는 총여학생회가 할 수 있는 일이 과연 구시대적 순결서약 캠페인을 열고 은반지를 나눠주는 것뿐일까.
분명히 그렇진 않을 것이다. 그보단 차라리 교내외의 성차별과 그 인식을 바꾸기 위해 노력하는 편이 총여학생회라는 이름에 훨씬 더 잘 어울리지 않을까.
원문: LUPINNUT.KR
※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도 게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