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보적 미디어운동 연구 저널 ACT!》에 게재된 조민석 님의 글을 옮겨온 것입니다. ‘우리 곁의 영화’라는 주제로 연재한 강의를 옮긴 글임을 미리 밝혀둡니다.
매체로서의 영화
영화는 이제 우리 일상의 일부입니다. 기술이 변화함에 따라 누구나 매체에 관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좀처럼 손에서 떼어놓지 못하는 스마트폰은 영화를 보여주기만 하는 게 아니라 촬영과 편집의 제작도구까지 제공합니다. 촬영하거나 편집한 영상은 인터넷 공간으로 손쉽게 업로드 할 수 있고, 그것을 직접 아는 사람뿐만 아니라 자신이 알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들과도 공유할 수 있습니다. 불과 10년 전과 비교하더라도 많은 것이 달라진 상황입니다.
제작과 편집의 간편함이 영화에 끼친 영향도 크지만 무엇보다도 배포의 수월함이 영화에 가져온 변화는 과거에는 미처 성찰의 대상이 되지 못하던 영역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영화라는 매체에 일종의 네트워크 효과가 가중되고 있다는 점을 자각하고 이는 영화의 본질과 매체, 도구에 대한 또 다른 사유의 계기로 작용할 것임을 예상할 수 있겠습니다.
또, 한 편의 영화에도 수많은 글과 반응이 만들어집니다. 그 영화에 대해 누구나 한 마디씩 덧붙일 수 있으며 그중 열정적인 몇몇 사람은 분량 있는 글을 써 보이기도 합니다. 공적 지면에서는 기자나 평론가들뿐만 아니라 교수, 종교인, 사회운동가, 예술가, 정신과 의사 등 명망 있는 사람들이 각자의 취지에 따라 온갖 종류의 말을 흘려보냅니다. 분별과 무분별조차 구별하기 어려운 혼돈의 상태가 생겨나고 있으며, 이에 대한 가치판단은 간단하지 않아 보입니다.
우리는 영화를 어떻게 수용하고 있을까요?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 영화라는 매체―도구 또는 수단―에 담기는 내용을 먼저 생각해보기로 합시다.
영화는 미디어다
우리가 그동안 무심결에 봐왔던 여러 편의 영화들은 우리에게 무언가를 전파하고 각인시켜왔을 것입니다. 한국에서 합법적으로 일본 영화를 볼 수 있게 된 게 10년이 조금 넘었습니다. 북한의 영화를 보는 건 지금도 안 됩니다. 법적인, 정치적인 문제도 있겠지만, 사실 막상 봐도 그닥 재미는 없을 겁니다.
그 이유는 그들의 사상과 세계관에 동조되지 않았거나 공감할 수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이들에게 일반적인 도덕기준에 의문을 품게 만드는 일탈, 반항, 퇴폐적이고 잔혹한 이미지를 보여주지 않는 것도 아이들이 공감하고 동조될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회전반에 작동하고 있는, 우리도 모르게 우리의 판단과 행위의 근거가 되는 사상과 세계관이 있기 때문일 겁니다. 폭력성, 선정성 등의 정도에 따라 관람등급을 매기는 일이 제도화되어 있는 이유가 이러한 사상적 염려 때문입니다. 공인들에게 높은 수준의 도덕 기준을 요구하는 것도 마찬가지의 이유입니다.
007시리즈는 믿고 본다.
영화는 때려 부셔야 제맛이지.
아버지나 삼촌들이 이런 얘기하는 걸 들어보신 적 있을 겁니다. 웬만한 사람들은 잘생기고, 몸도 좋고, 싸움도 잘하고, 똑똑하고, 어려운 일도 척척 해결하는 남성미 넘치는 블록버스터의 주인공들을 동경할 겁니다. 그러한 인물을 만들어내는 사상, 세계관에 동조하고 공감하는 것입니다. ‘내 인생의 영화’를 꼽아봅시다. 거기에도 내가 동경하고 공감하는 세계관이 있을 겁니다.
영화가 매체임을 강조한다는 것은, 영화에 담기는 내용, 즉 사상에 주목할 것을 요구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영화는 텅빈 그릇에 불과합니다. ‘무엇’이 그 안에 들어가는가, 누가 그것을 담는가, 누구에게 그것을 보여줄 것인가 등을 결정하는 것은 영화 외부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영화는 매체다’라는 명제에는 이 모든 논의가 포함되는 것입니다.
영화의 뒤편에는 사람들이 있다
예술의 차원에서 영화를 의식하는 일, 그리고 매체의 차원에서 영화를 의식하는 일에 함축된 세세한 지점들은 비평가와 전문 연구자들에게 잠시 맡겨두기로 합시다. 영화의 정체가 무엇인지, 가진 건 뭐고, 어떻게 움직이고,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여기서는 그 정도만 알아보기로 합시다.
여기에서 필요한 것은 심리적인 거리감을 조절하는 일입니다. 그것만으로도 우리 앞에 놓인 장벽에 많은 틈들이 생겨납니다. 그러면 이러한 거리감 조절과 그에 따르는 균열은 어떻게 해야 생겨날 수 있겠습니까? 제도적 차원에서 공부하고 심오한 연구를 해야만 가능한 것일까요? 일단 그런 것들도 제쳐둡시다.
왕가위 감독의 1994년 영화 <중경삼림>을 떠올려봅시다. 영화를 보지 않았더라도 제목을 보는 순간 바로 떠오를 만큼 대표적이고 유명한 장면들이 있습니다. 셔터 스피드를 조절해 잔상을 이용한 그 장면들을, 아니 <중경삼림>의 등장인물들을 ‘부유하는 도시인의 모습’ 쯤으로 지칭해도 크게 아쉽지 않습니다. 의미와 정서가 영화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만큼은 묶여듭니다.
이 영화가 우리가 사는 실제 세계의 어디쯤에 있는지 그리고 제작 상에서의 구체적인 면면들, 구조와 모티브, 영화적 묘사, 주제와 감독 소개 등 일반 관객들에게는 이 정도만 잘 해주는 평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일 수는 없습니다. 영화는 사람이 만듭니다. 그 바탕에는 어떤 목적이 있습니다. 포르투갈의 감독 페드로 코스타의 비유처럼, 대부분의 영화가 어떤 목적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제작됩니다.
영화를 볼 때 내가 저 현장에 있었다고 생각해봅시다. 장비를 나르고, 배우들 뒷바라지하고, 구경하는 사람들 통제하고, 나쁘게는 불합리한 처우나 인격적인 모욕을 당했다고 해봅시다. 저 영화가 어떻게 보일까요? 매혹되지도 신비롭지도 않을 겁니다. 혹은 내가 저 영화를 기획한 제작자라고 생각해봅시다. 바탕에 있는 목적이 가장 크게 의식될 거고, 제작과정에서의 아주 현실적인 문제들을 계산하게 될 겁니다.
영화는 제작과정에서 이렇게 복잡다기한 면들을 만들어 냅니다. 감독의 ‘예술혼’만 이야기하기에는 너무 많은 사람의 손을 탑니다. 이것들은 사상 이전의, 영화의 뒷면에 놓인, 현실입니다. 사실인 것입니다.
물론 감독은 가장 중요한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저 영화를 연출한 감독이 나와 절친한 친구라고 생각해봅시다. 나는 이 친구를 너무나 잘 압니다. 이번에는 저 영화가 어떻게 보일까요? 이 친구는 어떤 사람이고,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고, 그러기 위해 어떤 전략을 세웠으며, 과연 그것이 효과적이었는지 이런 점들이 떠오를 겁니다. 다시 말해서 누가, 왜 그 영화를 만들었고, 어떻게 만들었는지가 보일 겁니다.
이런 지점들을 뚜렷하게 알려면 영화를 구성하는 요소들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필요합니다.
할리우드 영화를 알아야 한다
영화를 즐겨 보는데 한 번도 시나리오 책을 본 적이 없다면 이번 기회에 시나리오 책을 한 번 읽어보십시오. 사람들이 많이 읽는 책들 중에서 적당히 골라보셔도 상관없습니다만 영화 책을 처음 읽는 분들께는 데이비드 하워드의 『시나리오 가이드』를 추천합니다. 도서관에서 빌려보셔도 되고 한 권 사두셔도 괜찮습니다. 1부 시나리오 작가가 너무 딱딱하다 싶으면 2부 스토리텔링의 기초부터 읽으십시오. 그래도 서문은 건너뛰지 마십시오.
앞으로 이런저런 책들을 언급할 텐데 다른 건 다 안 읽더라도 시나리오 책은 꼭 읽어보십시오. 더 해보고 싶은 분들은 사람들이 많이 읽는 책 중에 골라 세 권 정도 읽어보셔도 좋습니다. 읽기 쉽습니다. 『시나리오 가이드』도 전반부는 개념 설명, 후반부는 적용 분석 부분인데 어떤 분들은 전반부까지 읽는데 한두 시간도 안 걸릴 겁니다. 책에서 예로 드는 영화들도 봐두십시오. 뿌듯할 때가 있을 겁니다. 시나리오 책 대부분이 직접 시나리오를 써보고 싶은 사람들, 작가 지망생들을 위한 책이지만 그럴 뜻이 없는 분들도 개의치 말고 읽어보십시오.
우리가 보는 대부분의 영화가 서사영화입니다. 그 영화들은 할리우드식 메커니즘을 따릅니다. 전형적이냐, 덜 전형적이냐 정도의 차이만 있지, 어지간한 독립영화, 예술영화도 이 메커니즘을 따릅니다. 이것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영화를 보시면 당혹스럽거나 불쾌하실 겁니다.
시나리오 책 대부분이 할리우드식 시나리오의 개념, 원리, 작법을 소개합니다. 그런데 이게 할리우드 영화, 한국에서는 충무로 영화, 또 텔레비전 드라마에만 적용되는 게 아닙니다. 다큐멘터리 교과서에서도, 할리우드 영화만이 아니라 영화의 물리적 요소 전반을 다룬 영화 교과서에서도 시나리오 책에 있는 내용들이 중요하게 다뤄집니다. <런닝맨> 같은 쇼 프로그램도 할리우드식 기본 장치들을 철저하게 지킵니다. <쇼 미 더 머니>의 ‘악마의 편집’ 논란도 제작진이 전형적 구축을 고수하는 데서 생겨난 문제입니다.
본격적인 설명은 각 부분들에 들어가서 하겠습니다. 영화는 관객들에게 특정한 효과를 미치도록 정교하게 구성된 조작의 산물입니다. 대다수의 관객들이 영화를 보고 있는 그 순간에는 이 조작의 과정을 알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영화에 얼마나 빠져드느냐에 따라 재미있다, 재미없다를 판가름하기도 하는데, 그것의 강도를 만들어내는 데 시나리오가 제법 큰 역할을 합니다. 시청각적으로 화려해도 극적으로 허술하면 재미가 많이 떨어집니다.
누군가 새로운 화법, 새로운 형식의 영화를 들고 나온다고 해도 그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은 만드는 사람들뿐만이 아니라 보는 사람들에게도 관습이 작동하고 있어서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게 쉽게 안 바뀝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건 영화를 보고 한 마디 하는 사람이건, 관습 안에서 지켜지고 있는 규칙들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알아야 합니다. 활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사람들에게 가닿습니다.
다음 번에는 제작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그런 다음 영화의 각 부분들을 검토할 겁니다. 우리가 어느 정도까지 해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영화의 제작과정과 설계방식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졌다고 생각해봅시다. 댓글 하나도 다르게 달게 될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많아졌다고 생각해봅시다. 제작자들이 관객들, 시청자들에게 함부로 하지 못 할 겁니다. 제가 굳이 이 익숙하고 뻔한 이야기를 다시 꺼내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