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이 생산하는 것이 소위 ‘페이퍼’ 라고 불리는 연구논문인 사람들이 가장 많이 읽는 글은 아무래도 다른 업자들이 생산한 비슷한 부류의 산물일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나와 비슷/유사한 일을 하는 업자들이 의외로 많으며 따라서 이들이 쏟아내는 페이퍼도 억수로 많다. 영화나 소설책이야 취향에 따라서 최신만 읽는다고 뭐라고 할 사람은 없지만 이놈의 페이퍼라는 것은 그렇지 않으므로 옛날 논문도 읽을 필요가 생긴다는 것도 문제다.
그렇게 읽어야 할 것들은 많으나 사람의 시간은 흙수저건 금수저건 하루에 공평하게 24시간. 그런데 하루종일 페이퍼만 읽고 있을만큼 한가로운 사람도 그리 없을테고, 어떻게 하면 읽어야 할 것을 효율적으로, 빨리, 많이 읽을 수 있을까? 업계에서 조금(?) 구르다가 터득한 요령이 몇 가지 있다.
물론바닥에 몇 년 정도 있었을 업자라면 대개 알고 있을 내용이지만 오늘도 형광펜 축내며 처음부터 줄쳐가면서 읽고 있을 쪼랩 입문자들을 위해서 몇 가지만 적어보도록 하자.
0. 대원칙: 논문은 소설책이 아니다
이게 무슨 이야기냐면, 스토리가 있는 소설책은 적어도 ‘읽었다’ 라는 말을 하려면 처음부터 끝까지 주욱 다 활자를 훑어야 하지만 논문은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즉 내가 해당 논문에서 필요한 정보만 취하면 그만인 것이고, 이를 위해서 논문을 처음부터 끝까지 형광펜을 쳐가면서 읽을 일은 생각외로 많지 않다는 이야기.
물론 자신이 하는 일과 밀접한 관계가 있거나, 아니면 경쟁자의 논문이거나 (딴지를 걸려면 오타 하나도 놓치지 말아야지!),아니면 남의 메뉴스크립트를 리뷰해야 한다든가 (당신의 논문을 가장 열심히 읽어주는―어쩌면 거의 유일한―독자는 다름아닌 피어리뷰어 #1, #2, #3 일수도 있다. 딴지 건다고 미워하기 이전에 이 점에 대해서 감사하자ㅋ) 하는 경우에는 피치 못하게 논문의 모든 텍스트를 처음부터 끝까지 훑어야 할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에, 그렇게 논문을 처음부터 끝까지 속속들이 읽어야 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이러한 대원칙에 입각하여 논문을 어떻게 읽는지를 알려드린다. 아 물론 이것은 블로그 주인의 전공 기준이고 인문사회과학 하시는 분은 이거 안 맞잖아요 하지 마셈(…)
1. 제목을 읽는다: 제목을 보고서 뭔 말인지 모르겠거든 그만 읽는다
소설책은 소설 제목만 보고서 이게 무슨 내용인지 이해할 수 있는 경우가 극히 드물지만 페이퍼는 페이퍼의 제목만 읽고서 무슨 내용이 페이퍼에 나와있을지 뚜렷하게 떠올라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은 페이퍼는 대개 (1) 자신이 이해하기에는 너무 동떨어진 분야의 논문이거나 아니면 (2) 내용도 시원치 않게 씌여진 논문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논문의 제목 하나 제대로 쓰지 못하는 저자들은 역시 논문 내용을 봐도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역시 리뷰어가 되서 남의 논문을 읽어야만 하는 숙명에 있는 분이라면 안됐지만 내용도 읽어라ㅋ)
그도 그럴것이, 우리는 수많은 논문 제목 중에서 읽을 논문을 찾는 상황에 종종 처한다. 키워드로 검색된 수십-수백개의 제목을 빨리 읽고서 그 중에서 자신이 원하는 내용을 가진 논문을 찾아가는 과정에 있을텐데, 제목도 이해가 잘 안가는 논문, 혹은 흥미가 땡기지 않는 논문을 열어볼 여유가 어디 있나.
물론 살다보면 논문의 제목 자체가 생판 듣는 이야기라서 넘어갔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정말 중요한 내용이더라 하는 논문도 필연적으로 만나겠지만, 그런 논문은 어차피 지금 만나지 않아도 나중에 다 알아서 만나게 된다. 읽논읽(읽을 논문은 읽게 된다)이다.
2. 초록을 읽는다: 초록을 보고서도 뭔 말인지 모르겠거든 역시 그만 읽는다
사실 이렇게 논문을 읽는 시간을 줄이라고 초록이라는 것이 있는 것이다. 또 요즘의 추세는 초록에 ‘그래픽 초록’ 식으로 반응식 혹은 주요 메커니즘 등을 도식화하여 설명해 주니 좋다. 역시 초록을 읽고서 무슨 말인지 이해가 전혀 안간다면 그 논문은 읽을 필요가 없으니 넘어간다. 초록만 읽고서도 무슨 내용이 들어있을지, 결론이 뭘지가 이해가 된다면 슬슬 내용을 읽을 준비를 해 보자.
3. Figure 1 과 그 Legend를 보자: 저자의 해석과 상관없이 스스로 데이터를 분석한다
리뷰 논문이 아닌 오리지널 리서치 페이퍼인 경우 제일 중요한 데이터는 Fig 1 아니면 Fig 2 에 나오는 것이 보통이다. 따라서 첫번째 Figure의 데이터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물론 논문에 따라서 자신이 데이터가 어떻게 산출되었는지 잘 모르는 경우도 있을 것이므로, 레전드를 읽어보고 이해가 잘 가지 않는 경우에는 Results 섹션을 ‘대충’ 보자.
왜 Introduction이나 Results 섹션을 먼저 읽으라고 하지 않고 바로 데이터를 보라고 하나?
- 시간이 없잖아. 그러므로 논문의 핵심인 데이터부터 보자고.
- 일단은 저자님하들이 데이터를 가지고 주장하는 것과는 독립적으로 데이터를 보는 것이 필요하다.
- Introduction을 읽어야 데이터의 의미가 해석이 된다면 이미 그 논문은 당신이 이해하기에는 버거운 논문일수도 있다.
즉, 저자가 Results 섹션에서 이 다음엔 뭐가 나오고, 그래서 뭐가 나오고 하며 토 달면서 설명하기 이전에 마음을 비우고, 저자의 해석이 입혀지지 않은 상태에서 데이터를 보자는 것이다. 그리고 해당 연구에서 사용된 테크닉에 능하다면, 제시된 데이터가 어떤 결론을 의미하는지를 ‘저자의 해석’ 말고 스스로 내려보고 그것을 저자 해석과 비교해보도록 한다.
4. 그 다음 데이터를 순서대로 보자
역시 마찬가지로 데이터와 Fig 레전드를 중심으로 논문에 뭔 내용이 들어있는지를 파악하자. 뭔 내용인지 잘 이해가 안 가면 넘어가도 된다. 일단 자신의 눈에 들어오는 데이터를 위주로 슥슥 넘어가고, 아마도 제일 뒤에 있는 저자의 ‘결론’ 에 해당하는 Figure를 살펴본다.
5. 그리고 논문의 결론을 한번 정리해 보자: 초록과 함께
물론 논문의 Results 혹은 Introduction 없이 결과만을 주마간산 식으로 본 것이므로 잘 이해를 못한 내용도 있을 것이다. 혹은 저자의 의도와는 다르게 해석을 한 부분도 있을 것이다. 그런것을 다 고려하여, 이 논문에 흥미를 느꼈나? 아님 더 궁금한 게 있나? 생각해 본다.
더 궁금한 게 없다면 이 상태에서 논문 읽는 것을 끝낸다. 빨리 다음으로 넘어가자구. 만약 궁금증이 남고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 많이 있지만, 좀 더 봐야겠다는 충동이 들면 다음으로 진행한다.
6. Results를 읽는다: Supplementary Information과 함께
이 정도라면 당신은 이 논문에 매우 흥미를 가지게 된 상태이다. 이제부터는 저자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주의깊게 생각하며 Results와 Figure를 같이 보기 시작한다.
요즘 일부 저널의 경우에는 본 잡지에 실리는 본 논문의 내용보다 Supplementary Information의 양이 더 많아지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당연히 논문 중에서도 Supplementary Information에 나오는 내용을 대충 언급하고 말로 넘어가는 경우가 있다. 어차피 당신은 해당 논문을 뒤비기로 결정했으므로 서플까지 다 받아서 봐야 한다.
이전에 저자의 해석이 없이 본 데이터와 저자가 ‘이렇게 해서 이걸 했고 저렇게 해서 저걸 했고’ 를 읽어가면서 보는 것은 느낌이 틀리지 않을까? 마치 영화를 볼 때 혼자서 그냥 보는 것과 DVD 등에 들어있는 감독 커멘터리 트랙을 틀어놓고 보는 것이 느낌이 틀린 것과 마찬가지일것이다. 자신이 독립적으로 해석한 내용과 저자의 의도, 해석을 비교해 보자. 과연 저자의 해석이 적절하다고 판단되는가? 만약 자신의 해석과 틀리다면 메모를 해 두자.
7. 필요한 경우에 Introduction을 읽자: 이전 레퍼런스와 함께
사실 Introduction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선행 연구 결과의 정확한 사이테이션이다. 어차피 리뷰 논문이 아닌 리서치 아티클의 Introduction에서 해당 분야의 문외한을 이해시킬만큼 자세한 Introduction을 적기는 쉽지 않다. Introduction을 줄 치고 읽는 것보다는 차라리 제일 먼저 소개되는 해당 분야의 리뷰 아티클 (대개 레퍼런스 번호 ‘1’), 선행 연구논문 자체을 읽는 것이 더 효율적일 수 있다.
8. Material & Methods: 필요한 부분만 본다
데이터가 어떻게 산출되고 분석되었는지 궁금할 때, 혹은 비슷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을 때, 해당 문헌에 있는 연구를 재현해야 할 때 등과 같을 때나 자세히 보면 된다. 역시 소위 말하는 탑 저널이라는 것들은 요즘 자세한 Material & Methods는 서플리먼트로 다 빠진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9. Discussion: 시간 남으면 대충 본다
디스커션은 전적으로 해당 저자의 ‘썰’ 아니겠는가. 사실 디스커션에서 이것저것 제시되는 아직 해결 못한 의문이라든가 이런 것들은 뭐 그냥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리는게 좋을 수도 있다.
괜히 남이 디스커션에 떡밥을 던진 것에 낚여서 내가 그걸 해보겠다고 나서지 마라! 이미 후속연구 다 해서 논문 쓸 준비하거나, 했는데 그렇게 안되더라 혹은 현존기술로 안되더라인 경우가 대다수이다. 쉽게 되는 일이면 이미 해서 해당 논문에 결과로 나왔겠지(…) 그러니까 디스커션은 읽기는 읽어보되, Results와 같이 너무 진지하게 읽지는 말라는 이야기.
10. 마무리: ‘3줄 요약’ 을 써보자
그래서 결국 저자들이 논문에서 말하고자 하는 요지는 무엇이던가? 요즘 유행하는 ‘3줄 요약’을 해보자. 그리고 기록을 남겨두자. 노트도 좋고, 아니면 전자노트, SNS도 괜찮다. ‘3줄 요약’이 부족하다면? 일단 3줄의 핵심을 적어 보고 그 밑에 상세 설명을 적어본다. 그리고 블로그를 만들어 ‘흥 매싸 너의 전성시대는 갔어!’를 외쳐본다.
원문: Secret Lab of a Mad Scient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