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진보적 미디어운동 연구 저널 ACT!>에 게재된 이원우 님의 글을 옮겨온 것입니다. 이원우 님은 2006년부터 영화 작업을 시작한 필름메이커이고, 현재 볼티모어에서 영화 작업과 육아를 병행하고 있습니다.
어떤 소식
나에게는 한국의 음력 설인데 여기 미국에서는 중국 설이라고 하고 정작 동네는 슈퍼볼로 떠들썩한 새해를 앞둔 때, 신영극장의 임시휴관 소식을 들었다. 멍한 건 잠시고, 눈물이 났다. 내가 울만 한 자격이 있는가. 스스로 검증을 하며 진정하려 했지만, 눈물은 뜨거웠다. 왜 이렇게 눈물이 나지? 나에게 신영극장은 무엇일까? 아니, 극장은 나에게 무엇일까? 왜 나는 극장 휴관에 우는가. 고국에서 전해오는 울 일이 얼마나 많은데…
신영극장의 추억
말도 많고 허공에 날려버리는 글도 많은 나지만, 내 언어는 필름이다. 나는 필름메이커니까.
트위터와 페이스북 창을 닫고 외장 하드를 연결했다. 2012년 1월로 추정되는 겨울, 신영극장이 ‘독립예술 극장 신영’이라는 간판을 달기 전, 휴관(혹은 폐관) 중이었던 극장건물을 찾아가 박광수 프로그래머의 도움으로 촬영을 했다. 아직 세상에 공개되지 않은 갓 발굴된 유적지에 고고학자의 도움으로 들어간 기분이었다.
‘이 곳을 거쳐 간 수많은 사람들의 감정이 채워져 있겠지’라는 생각이 절로 드는 공간. 그곳은 ‘과거의 극장’이었다. 그리고, 다시 극장이 될 곳이었다. 그때 촬영한 파일을 다시 찾은 덕분에, 오전에 휴관 소식을 확인하고 오후에 단편을 만들었다. 서울에서 강릉으로 갔다가 신영 극장을 보고 서울로 다시 돌아오는 과정을 촬영한 한 롤짜리 슈퍼8미리 필름을 그대로 썼다.
사운드는 그해 가을 독립예술 극장 신영이 개관한 후 영화 동료들과 안목해변에 바다를 보러 갔다가 신영극장에 돌아가는 길에 버스 기사님과 신영극장 이야기를 나눈 기억이 나서 녹음해둔 걸 찾아 쓰려 했는데, 찾다가 결국 못 찾아서 미얀마(버마), 제주, 서울, 미국에서 녹음해둔 걸 짤막짤막 넣었다.
나는 필름메이커이고, 내 언어는 필름이다. 그런데 정작 영상까지 만들어 놓고 또 이렇게 글을 쓰게 되었다. 영화로 차마 다 말하지 못한 부족함 때문에 부끄럽지만, 그러니까 나에게 극장은 무엇일까?
내가 헤멘 극장들
2010년 가을, 어쩌다 유럽의 도시들을 다닐 기회가 있었다. 관광지는 관심이 없었고 극장에 가고 싶었다. 런던, 에든버러, 파리, 베를린에서 독립영화와 예술영화를 볼 수 있는 곳을 물어물어, 몇 군데의 극장을 찾아갔다. 시간이 맞으면 영화도 봤다.
런던에서는 브릭스턴에 있는 픽처하우스 계열의 ‘리치(Ritzy)’라는 극장에서 영화를 봤다. 마침 영화 상영이 있었다. <The Arbor>라는 그해의 꽤 유명한 실험적인 다큐멘터리를 운 좋게 볼 수 있었다.
에든버러에서는 헤매고 헤매서 ‘필름하우스’를 찾아갔다. ‘아프리카 단편 영화제’를 하고 있었고, 덕분에 아프리카 단편 영화들을 봤다. 홍상수 감독의 <강원도의 힘>이 엽서로 제작되어 극장 로비에 비치되어 있었다.
파리에서는 당연하게도 ‘시네마떼끄 프랑세즈’에 갔으나, 내가 간 날은 극장이 쉬는 화요일이었다. 아쉬운 가운데 건물 밖 현수막에 특별 상영작으로 봉준호 감독의 <마더>가 적혀 있었다.
파리 외곽의 이름을 잊어버린 극장에서는 실험 다큐멘터리 영화제가 열리고 있었다. 러시아 출신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를 봤다. 대사가 별로 없어서 프랑스어를 못 알아들어도 상관이 없었다. 다행이었다. 지하철을 갈아타고 역에서 한참을 걸어서 간, 꽤 한적한 동네에 극장 안에만 사람들이 복작거려서 묘한 느낌이었다.
베를린에서 찾아간 아이스자잇(Eiszeit)극장은 아랍영화제가 열리고 있었다. 시간이 안 맞아 영화는 못 보고 인쇄물만 가득 챙겨왔다. 사람은 많지 않았고, 극장은 작고 오래된 건물이었다.
작은 극장의 의미
내가 유럽의 극장을 찾아다녔던 때는 2010년의 10월 말에서 11월이었다. 이미 그때부터 모든 도시는 크리스마스를 준비하고 있었고, 당연히 도시에는 많은 멀티플렉스가 있었다. 멀티플렉스마다 크리스마스 대목을 맞아 큰 영화들을 광고하고 있었다. 독립영화, 예술영화를 상영하는 극장을 찾는 것은 한국보다는 쉬웠지만, 여전히 틈새를 찾아다니며 보물찾기를 하고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발견했다. 나만의 필름로드를 만드는 길이었다.
반갑고, 고마웠다. 나라와 지역마다 관객의 층, 수익, 운영방식, 국가의 지원이 다르기 때문에 마냥 묶어서 같은 부류라 묶을 수는 없었지만, 그 겨울의 대박 블록버스터를 상영하지는 않을 극장들인 것만은 확실했다. 헐리우드 블록버스터가 나쁜 것이 아니라, 다른 극장의 여러 관에서 똑같은 영화가 수차례 상영될 때 적은 관으로도 다양한 영화를 상영하는 극장들의 세계가 나에게는 더 자극적인 놀이터였고 더 큰 도서관이었다. 실제로 나는 작은 극장들에서 짜릿하게 놀았고 어떤 학업기관보다 많은 걸 배웠다.
극장이 만드는 거리의 생태계
스크린은 평면이고 크기가 정해져 있지만, 극장은 입체적이고 공간의 확장에 제한이 없다. 극장 앞을 걷는 길, 극장으로 가는 교통, 극장 근처의 저렴하고 오래된 맛집, 영화 상영 전에 시간을 보낼 카페, 극장에서 나와 발길을 옮길 술집, 이 모든 것들에 철마다 에너지가 가득한 영화제의 순환이 함께 포함되어 있다.
내가 극장을 가는 이유는 영화가 상영되기 때문이지만, 극장에 단지 영화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영화를 관람하기 위해 내가 하는 모든 행위와 계절의 변화가 극장이라는 공간에 포함되어 있다. 그래서 강릉독립예술극장 신영이 아주아주 잘되어 몇 개관으로 증축을 하기 위해 이사를 한다고 해도, 나는 조금 우울했을 것이다. 극장은 그 일대를 ‘극장의 영역으로’ 만드는 곳이기 때문이다.
서울아트시네마가 아트선재에서 헐리우드 극장으로 옮길 때, 낙원상가 근처의 싼 해장국집과 칼국수집들에 정을 붙이고 커피빈과 카페뎀셀브즈를 오가며 쿠폰에 도장을 모으고 아구찜과 황태구이를 먹으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런데 그 극장도 다시 서울극장이 있는 곳으로 이사를 했다.
인디스페이스가 명동에서 간판을 내릴 때에도, 다시 광화문으로 옮길 때도 이런저런 쓸쓸함이 있었다. 하이퍼텍나다는 극장이 없어지기 몇 해 전 자주 가던 청국장집부터 없어졌다. 극장 관계자는 어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극장을 둘러싼 각각의 세계는 매우 독특하다. 그리고 관객인 나는 여전히 극장의 영토에서 안정감을 찾는 영역 동물이다. 그래서 신영극장이 휴관한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신영극장이 위치한 건물 뒷길로 가서 방에 들어가 먹었던 장칼국수의 몫까지 슬퍼했다. 그 슬픔은 조금 어이가 없지만, 결코 가벼운 것은 아니었다.
관객의 경험은 언제나 추상적이다
유럽과 서울의 극장들에서 상영되었던 어떤 영화들이 신영극장에서도 상영되었다. 그 영화들은 큰 영화제에서 호평을 받았을 수도 있고, 생경한 나라의 감독이 만든 독특한 영화일 수도 있다. 내가 에든버러에서 홍상수 감독의 엽서를 만난 것처럼, 누군가는 강릉의 신영극장에서 새로운 문화와 언어를 접했을 것이다.
영화는 산업이자 예술이다. 산업은 통계가 잡히고, 성장과 정체의 그래프를 가지지만, 예술의 가치 혹은 관객에게 주어진 감동은 계산이 불가능한 영역이다. 누군가에게는 눈물이, 누군가에게는 웃음이, 누군가에게는 침묵과 암전이 필요한 때가 있다. 그래서 극장에 들어가는 사람의 수는 셀 수 있어도, 관객의 경험은 언제나 추상적이다. 그리고 무한하다.
누군가는 영화에 새롭고 놀라운, 이전에 없었던 무언가를 기대하기도 한다. 이는 헐리웃 블록버스터나 최신식 촬영 기술이 될 수도 있고, 주류 언론에서 제대로 언급되지 않은 현실이나 감춰진 진실 혹은 주목 받지 않는 이들의 삶 자체일 수도 있다. 다양성이라고 짧게 눙칠 수도 있지만 선택의 자유로 바꿔 말할 수도 있을, 독립 예술 극장의 존재 이유. 관객의 권리이자 영화인들에게는 도전하고 노력하게 하는 가능성이 이 어디 버스 정류장 앞, 몇 호선 지하철 역에서 나와서 몇 미터 앞, 어느 음식점 근처에 있다. 바로 극장이다.
로컬의 힘, 다양한 것들의 힘
내가 영화에 넣고 싶지만 찾지 못했던, 처음부터 녹음을 못한 것이 아닌가 하는 버스 기사님과의 대화는 이러했다.
“바다 보러 서울서 왔어요?”
“네, 이제 보고 들어가요.”
“어디로 가는데?”
“신영 극장에 영화보러가요.”
“거기 문 닫지 않았나? 옛날에 눈이 엄청 와서 신영극장이 무너진 적이 있어요.”
“네, 새로 열었어요. 독립영화, 예술영화 상영하는 극장으로요.”
“그래요? 요즘은 다 홈플러스가서 영화 보던데.”
“재미있는 영화 신영극장에도 많아요. 꼭 보러 오세요.”
이 (광고에나 등장할 법한) 어색하게 연출한 것 같은 대화는, 실제로 이루어진 대화였다. 안목 해변 앞 버스에는 승객이 우리 일행 세 명밖에 없었다. 우리는 <광대를 위한 슬픈 발라드>를 보고, 시내버스를 타고 안목 해변에서 바다 구경을 하고, 커피 한잔을 마시고 <미드나잇 인 파리>를 보러 가는 길이었다. 맛잇는 커피와 맛있는 음식과 가까운 바다를 영화와 함께 누리며 이것이 진정한 ‘강원도의 힘’이라고 생각했다. 해외에 진출한 한국영화의 쾌거에 견줘도 절대 기울지 않을, 로컬 문화 인프라의 힘이었다.
수도권 집중화와 인구 과밀화를 우려하면서 지역의 문화 예술에는 지원을 줄이는 정부, 그리고 한류의 성과에 숟가락을 올리기에 바쁘나 정작 자국의 문화 다양성에는 관심이 없는 각 정부 부처들. 텔레비전 채널 수는 다양한데, 극장은 독점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나조차도 굳이 무리를 해서 버텨야 하나 싶은 생각마저 든다. 극장을 만들고 지키고 운영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다치고 지칠까봐. 내가 좋아하는 극장들은 영수증이 아니라 티켓을 주는 극장인데, 그 티켓을 전해주는 손이 시리고 상하는 게 싫다. 이는 지극히 감정적인 이유에서다.
이 세상 모든 극장들의 이름
하지만, 간판을 내릴 때 내리더라도, 티켓을 주는 그 손이 결정하게 해야 한다. 지금은 필름메이커로 살고 있지만 훨씬 더 오랜 시간동안 나는 관객으로 살아왔다. 각자의 이름이 있던 극장들을 떠올린다. 다른 계단, 다른 조명, 다른 인테리어, 그리고 다른 냄새. 여전히 각자의 이름이 있는 극장들이 녹고 있는 빙하처럼 위태롭게 존재하고 있다. 사라지지 않게, 먹히지 않게, 무너지지 않게 북극곰의 심정으로 바라보고 있다. 검푸른 바다로 들어간 줄 알았던 강릉독립예술극장이 평평하고 안정된 모습으로 태연히 나타날 모습도 상상한다.
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또 트는 것을 감사해하는 나는 사실, 온라인 극장에서도 내 영화를 상영하고 있다. 지난 달에는 이전에 비해 꽤 큰 돈인 1500원을 벌 뻔 했는데, 그 중 원천세로 45원을 냈다. 은행에서는 예금이자 227원 중에서 소득세 30원을 떼어갔다. 나는 지금 해외에 있는데도 이렇게 국가에 세금을 내고 있는데, 국가에서는 예술영화전용관 지원금을 줄인다고 하니 어처구니가 없다.
내가 이 정도면 한국에서 월급 제대로 받으시는 분들은 세금을 얼마나 내실까. 작은 극장들의 수익성을 평가하기 전에, 나라 살림이나 제대로 평가해야 하는 시점이다. 외국 나오면 다 애국자가 된다는데, 나는 예술영화, 독립영화 트는 극장들이 있는 내 나라가 좋다. 어떤 대기업 이름으로 전국 통일하는 나라는 부끄럽다. 바다 건너에서는 천만 명이 본 영화 한두 개 영화보다 적은 사람들이 보더라도 다양한 영화들이 만들어지고 또 상영되고 있다는 것이 나의 자부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