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1년 소파 방정환이 죽었다. 한참 옛날 사람인 줄 알았는데 의외로 젊어. 1899년 생이니까 우리 할아버지하고 동갑이고 죽을 때 나이 서른 셋. 젊어도 너무 젊을 때 세상을 떠났네. 하지만 그 짧은 생에 비해 그는 여러 굵직한 흔적을 남기고 갔다. 우선 ‘어린이’라는 고운 한국말부터 그의 작품이잖아.
이제 ‘이놈’ ‘저놈’ ‘애자식’이라고 부르지 말고, 아이들도 한울님(天)이므로 ‘어린이’로 높여 부릅시다.
이렇게 주창하고, 어린이에게 존댓말을 쓰자고까지 나아가설랑 고루한 어른들을 잔뜩 흥분시키기도 했지. 그는 마지막 순간에도 어린이를 걱정했고 또 그가 짧은 평생 사람들을 울리고 웃겼던 동화적으로 유언을 남긴다.
문간에 검정 말이 모는 검은 마차가 나를 데리러 왔으니 이제 가야겠소. 어린이들을 두고 가니 잘 부탁하오.
될성부를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말은 그에게도 적용된다. 1908년 열 살의 나이의 소학생으로서 그는 ‘소년입지회’를 조직하여 동화 구연, 토론회, 연설회 등의 활동을 했거든. 나는 열 살 때 뭘 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데 말이야. 천성이 이야기하기를 좋아하고 사람들에게 들려주기를 좋아했던 것 같아.
그의 구연 동화 실력은 상상을 초월했다고 해. 독립운동을 하다가 감옥에 갔을 때 죄수들을 상대로 이야기를 들려주면 간수들도 감방 앞에 와서 이야기를 들었고 간수와 죄수 공히 눈물을 뚝뚝 흘리며 들었고 형기를 마치고 나가는 방정환을 붙잡고 더 있다 가라(?)고 붙들 정도였다니. 방정환 자신의 회고에도 이런 자랑질(?)이 나온다.
남녀 선생님이 가끔 얼굴을 돌이키고 눈물을 씻으시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그때 학생들은 벌써 눈물이 줄줄 흘러 비단저고리에 비 오듯 하는 것을 그냥 씻지도 않고 듣고 있었다. 그러다 이야기가 산드룡(신데렐라의 프랑스 발음)이가 의붓어머니에게 두들겨맞는 구절에 이르자 그 많은 여학생이 그만 두 손으로 수그러지는 얼굴을 받들고 마치 상가집 곡성같이 큰소리로 응- 응- 소리치면서 일시에 울기 시작하였다. 옆에 있는 선생님들도 일어나 호령을 할 수 없고, 나인들 울려는 놓았지만 울지 말라고 할 재주는 없고 한동안 단상에 먹먹히 서 있기가 거북한 것은 고사하고 교원들 뵙기에 민망해서 곤란하였다.
그는 3.1운동 당시 독립선언문을 인쇄하다가 일본 경찰이 들이닥치자 등사기를 우물 속에 던져 버려서 최악의 상황을 벗어난다. 고문을 받았지만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난 거야. 그 동료들 몇 명은 감옥에서 죽기도 했대. 하여간 그런 저런 경력으로 일본 경찰은 끊임없이 그를 감시했는데 그의 강연에 항상 참석, 감시했던 일본 경찰은 매우 곤욕을 치렀대. 강연을 듣다 보면 자기도 질질 울어야 했기 때문이지. 고등계 형사 미와의 평가는 이래.
방정환이라는 놈, 흉측한 놈이지만 밉지 않은 데가 있어… 그놈이 일본 사람이었더라면 나 같은 경부 나부랭이한테 불려다닐 위인은 아냐… 일본 사회라면 든든히 한 자리 잡을 만한 놈인데… 아깝지 아까워.
빈한하게 살던 방정환이 팔자가 좀 핀 건 천도교의 수장 손병희의 셋째 사위가 되고서부터였어. 손병희의 셋째 딸과 결혼한 거지. 방정환은 엄청난 뚱보로 기억되는데 그 이유는 몸이 허약한 사위를 걱정한 손병희가 보약을 털어먹인 결과라나 뭐라나.
그렇게 삶의 안정을 찾은 그는 더욱 뜨거운 열정으로 다양한 활동을 전개해. 우리는 앞서 어린이 운동을 얘기했지만 그는 출판인이자 언론인이기도 했어. 최초의 영화 잡지 《녹성》을 창간한 이도 그였고 이화학교 출신들과 더불어 《신여자》 편집에도 깊이 개입했지.
이 과정에서 그는 한 여자를 만나게 돼. 신준려라는 사람이지. 당시 방정환 나이 스물 둘, 신준려 나이 스물 셋. 유부남인 방정환이었지만 이화학당 출신의 총명하고 야무진 처자에게 마음을 빼앗겼다고 해. ‘개벽’ 4호에 실린 ‘추창수필(秋窓隨筆)’에 보면 그의 마음이 읽혀져 키득거리게 된다.
구니기타 돗포가 말한 ‘밭 있는 곳에 반드시 사람이 살고 사람이 사는 곳에 반드시 연애가 있다’라고 한 그 구절 끝에 왜 이런 구절이 없는가 한다. ‘연애가 있는 곳에 반드시 실연이 동거한다’고. 아아, 인정의 무상함을 지금 새로 느끼는 바 아니지만 S의 사랑을 노래하는 그 입으로서 어느 때일지 실연의 애가가 나오지 아니할까… 아아, 사람 그리운 가을 만유가 잠든 야반에 창 밖에는 불어가는 가을 소리가 처연히 들리는데 부질없는 벌레가 잠자던 나를 또 울리는구나….
이 S가 바로 신준려였다는 거야. 하지만 방정환도 신준려도 그 틀을 깰 만큼 불같은 사람들은 아니었던가 봐. 방정환의 친구였던 유광렬도 신준려를 좋아하는 바람에 삼각관계까지 형성됐지만 애면글면 마음만 태웠을 뿐 구체적인 액션을 취한 건 그닥 없다고 하니까(검색상으로는 그러네…).
아동문학가 이원수에 따르면 이 ‘플라토닉’의 아쉬움이 방정환으로 하여금 더욱 아동문학에 정진하게 한 기폭제가 됐다고 하니 이 사랑의 실패를 기뻐해 줘야 하나 위로해 줘야 하나. 《신여자》의 편집에 깊이 관여하는 한편 거기에 「처녀의 가는 길」 같은 소설도 실었던 방정환은 이 잡지에서 ‘물망초’라는 필명을 사용한다. 물망초의 꽃말이 뭐지? “나를 잊지 마세요.” 방정환의 심경을 짐작해 볼 수 있지 않을까.
방정환은 서른 셋의 나이에 죽어서 망우리에 묻힌다. 이 묘지를 마련한 건 그를 아까와하는 벗들이었지. 특히 방정환을 평생의 스승으로 생각한 아동문학가 최신복은 역시 방정환의 숭배자였던 부친의 묘를 선산에 쓰지 않고 소파 옆에 장만한다. 그 자신도 죽어서 소파 옆에 묻혔고 최신복의 부인도 그 곁에 합장되면서 방정환은 죽어서도 외롭지 않은 영혼으로 남게 돼.
참고로 이 최신복은 그 자신 이름 있는 아동문학가지만 우리가 너무도 많이 부른 노래의 주인공이다. 바로 ‘듬뿍 듬뿍 듬뿍새 논에서 울고~’의 〈오빠 생각〉의 그 오빠가 최신복이야. 이 노래의 작사자이자 아동문학가 이원수의 아내인 최순애가 최신복의 동생이거든. 재밌는 인연 아니냐?
해방 뒤 아버지의 묘지를 찾은 방정환의 아들은 특이한 경험을 한다. 한 중년 여인이 묘 앞에서 한참을 고개 숙이며 참배하고 있는 거야. 누구신가 하고 기다렸더니 눈을 뜬 중년 여인은 “유족이신가요?” 한 마디를 묻고는 바람과 같이 사라져 버린 거야. 누굴까 궁금하여 아버지의 친구를 찾아 그 인상착의를 전해.
혹시 이렇고 저렇게 생긴 여자 짐작 가세요?
그때 그 질문을 받은 남자는 바로 소파 방정환과 ‘S양’을 두고 삼각관계를 형성했었다는 유광렬이었단다. 이 무슨 영화 같은 스토리. 그때 유광렬은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허탈하면서도 감회찬란한, 씁쓸하면서도 흐뭇한, 쑥스러우면서도 담담하게 의문에 찬 방정환의 아들에게 이렇게 대답했겠지.
그 여자는 신준려 같네. 옛날 자네 아버지와 같이 일했던.
그때 방정환은 무덤 속에서 껄껄대며 웃고 있었을지도 모르지.
이봐, 그 이상은 말하면 안 돼!
하고 말이야.
원문: 산하의 오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