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미국은 이스라엘에게 한 해 3조 원이 넘는 금액을 군사원조라는 명목으로 지원한다(관련 보고서). 시퀘스터(관련 기사)라는 초유의 재정 위기를 맞은 상태에서도 이 금액은 미국의 2014회계연도 예산안에서 전혀 줄지 않았다(관련 기사). 이 금액은 대부분 미제 무기 구매에 사용된다. 참고로 우리나라 국방예산에서 무기 구매에 배정되는 금액(방위력개선비)은 2013년 기준 10조 원(링크) 정도이다. 1인당 GDP가 우리나라와 비슷한 이스라엘에게 미국은 왜 이리 막대한 금액을 재정 위기 속에서도 그대로 지원하려는 걸까?
국제정치학계의 거두인 존 미어샤이머는 스티븐 월트와 함께 쓴 <이스라엘 로비(관련 기사)>에서 그 주된 원인을 이스라엘 유대인들의 로비에서 찾는다. 미국 공화당의 사상적 배후에 기독교 근본주의(복음주의)가 있으며 복음주의자들이 이스라엘의 강력한 우군이라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대체 왜 기독교인이 이스라엘을, 유대교인이 대부분인 나라를 지지하는 것일까? 정치권은 로비를 통해 회유할 수 있겠지만 종교계는 경우가 다르다. 아래의 글은 그 이유를 신학적 측면에서 분석하면서,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들에게는 다소 생소한 ‘세대주의’라는 독특한 기독교 근본주의 사상을 설명한다. 비단 공화당 뿐만 아닌, 미국 정치사회 전반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 복음주의 정서의 근간을 이해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창조경제의 롤모델로 이스라엘이 꾸준히 등장하고 있다. 국가안보도 이스라엘을 본받자는 주장도 종종 지면에 오른다. 기본적으로는 여러가지 맥락(주변국 정세, 미국과의 관계 등)들을 간과하거나 고의로 무시하고 있는 이야기다. 한국 기독교의 세대주의적 시각이 요즈음의 이스라엘 타령에 작용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우려도 종종 든다. 최근 임명된 황교안 법무장관의 ‘세상법 vs 교회법’ 논란(관련 기사)에서도 이러한 세대주의 신학의 영향을 느낄 수 있다.
아래의 글은 <디펜스21+> 2013년 2월호에 실렸던 글을 원작자의 동의를 얻어 편집 후 다시 올리는 것임을 밝혀둔다.
이라크와 이스라엘. 같은 중동 국가이지만 미국에게 받은 대접은 사뭇 다르다. 2002년,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이라크를 악의 축으로 규정하고는 대량살상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는 핑계로 2003년 결국 이라크 전쟁을 일으켰다. 반면 이스라엘에 대한 미국의 태도는 편애에 가깝다.
중동에 대한 미국의 이런 판이한 태도에는 여러 이유가 있다. 정치적 측면으로는 미국 특유의 예외주의와 이스라엘의 로비를 들 수 있다. 석유 자원을 안정적으로 확보하려는 경제적 측면도 있다. 그런데 이러한 정치/경제적 이유 외에도 다른 큰 이유가 하나 있다. 바로 신학적 측면이다. 기이하게 들리겠지만, 중동은 미국 근본주의 기독교 세계관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정치/경제적 측면에 대한 연구에 비해 신학적 측면에 대한 논의는 거의 이루어진 적이 없다.
부시와 기독교 근본주의
부시에게 이라크 전쟁은 곧 거룩한 전쟁(聖戰)이었다. 무엇이 그의 현실감각을 이토록 엉망으로 만들었을까? 우리는 그의 신념을 형성하는 동인을 무엇보다 종교에서 확인할 수 있다. 부시가 기독교인, 그것도 근본주의 기독교인임을 모르는 이는 없으리라. 부시의 근본주의적 믿음과 이라크 전쟁에 대한 그의 선택은 무관하지 않다.
근본주의란 무엇인가? 9.11 테러의 사상적 배경으로 지목되는 이슬람교 원리주의나 이라크 전쟁의 근간으로 볼 수 있는 기독교 근본주의를 가리키는 동일한 단어인 펀더멘탈리즘(fundamentalism)이라는 명칭은 원래 보수적인 미국 기독교회의 특정한 출판물과 관련된 것이다. 1910년에서 1915년 사이에 펴낸 <근본들: 진리에 대한 증언(The Fundamentals: A Testimony to the Truth)>라는 열두 권으로 이루어진 소책자 시리즈가 바로 그것이다. 이는 19세기 미국을 주도했던 진보적 기독교에 대항하기 위한 목적으로 제작된 것으로서, 유니언 석유회사(Union Oil Company)의 설립자이며 세대주의의 옹호자였던 라이만 스튜어트(Lyman Stewart)가 기탁한 (당시로서는 거액인) 이십오만 불로 출간된 것이다(미국의 석유재벌과 기독교 근본주의는 애초부터 긴밀한 관계였던 셈이다).
근본주의와 세대주의
소책자 시리즈 자체의 신학적 입장은 온건한 편이었지만, 이 운동에 가담한 일반 교회를 주도하는 세대주의(dispensationalism) 신학은 전투적인 보수성을 그 특징으로 한다. 영국 플리머스 지방에서 200여 년 전에 시작된 이 신학은 세상을 악으로 규정하고, 교회를 이에 대립시킨다. 교회는 세상이라는 이름의 홍수 속에 홀로 떠다니는 방주에 다름 아니다. 세상은 물이 넘쳐 곧 난파하게 될 여객선이고, 교회는 승객의 구조를 임무로 한다. 세상의 개혁은 밑 빠진 독에 물붓기와 다를 바가 없다. 배(세상)는 난파(멸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외려 그리스도의 재림(再臨)을 지연시킬 뿐이다. 세대주의 신학은 이렇게 교회-세상의 극단적 이원론을 특징으로 한다.
이러한 공간적 이원론을 역사적 종말론으로 번역하면, 세상의 파국과 교회의 구별로 귀결된다. 이들의 종말론은 꽉 짜인 시간표로 구성되어 있다. 예수가 다시 와서 세상을 심판하기 전에 우선 교회를 하늘로 불러들인다. 이것이 바로 휴거(携擧, rapture)이다. 이후 7년 동안 공중에서는 예수와 교회의 혼인잔치를 하고, 땅에서는 적그리스도가 세계를 지배한다. 7년의 환란기를 거치고, 예수와 적그리스도의 최후 전쟁이 중동 므깃도(megiddo) 평원에서 일어나고, 적그리스도의 패배로 귀결된다. 마이클 베이가 감독하고 브루스 윌리스가 주연한 SF 재난 영화의 제목으로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 ‘아마겟돈’(Armageddon, 요한계시록 16장 16절)은 히브리어의 하르 메기도(Har Megiddo)을 음역한 것이다(har는 산을 뜻한다).
미국의 기독교 근본주의를 대표하는 신학인 세대주의는 분명 불건전한 신학이다. 좋은 신학이 있기도 한 반면, 나쁜 신학도 있을 수 있다. 문제는 그 영향력에 있다. 현재 미국의 문화와 정치에 부정적인 영향을 조장하고 있는 신학이 바로 세대주의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정치적 측면에서 본다면, 특히 미국 공화당의 이념적 지향성과 궤를 같이 한다고 말할 수 있다. 유명한 TV복음전도자인 팻 로버트슨은 1988년 41대 미국 대통령 공화당 후보 경선에도 나섰다. 문화적 측면에서는, 가령 6천만부가 넘게 팔린 초유의 베스트셀러인 <레프트 비하인드(Left Behind)> 시리즈가 이 세대주의 고유의 종말론 프로그램에 기반하고 있다. 기독교인들을 예수가 데려간(휴거) 후에 이 땅에 남겨진 이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재난 소설이다.
세대주의와 이스라엘
그런데 도대체 세대주의와 중동정책이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인가? 세대주의 사상은 역사를 일곱 시대(세대주의에서의 ‘세대’는 generation이 아니라 시대(epoch)이다 —편집자 주)로 구별하고, 신적 섭리가 각 세대별로 다르게 작동한다고 본다.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이 맡았던 역할을 신약 시대에는 교회가 계승했다고 보는 통상적 입장과 다르게 교회와 이스라엘을 구별하는 것이 세대주의의 역사관의 핵심 전제이다. 이들의 신학에서 이스라엘의 정치적 회복은 중요하다. 이들에 따르면, <마태복음> 24장 32-33절은 예수 재림의 전조로서의 이스라엘의 독립을 예언하는 것이다.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앞에 이른 줄 알라.” <마태복음> 24장 32-33절
일반적인 성서학자들은 이에 동의하지 않는다. 하지만 세대주의자들은 이스라엘의 독립을 예수 재림, 다시 말해 휴거의 전조로 보기 때문에 1948년의 이스라엘 건국에 열광하고, 이후의 중동 상황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인류 최후의 격전지 므깃도 평원이 바로 중동 지역이다.
세대주의에 따르면, 이스라엘의 독립과 영토 확장은 신의 섭리에 따른 것이며, 이것을 가로막는 것은 곧 신의 뜻에 대한 저항(악)이다. 미국의 보수교회 뿐만 아니라 미국의 정치계도 이러한 세계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레이건 대통령도 구약성서의 예언이 중동에서 실현되고 있다고 생각했다).
알다시피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의 역사는 동시에 이스라엘의 영토 확장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게다. UN이 영토를 분할한 1947년 직전에 팔레스타인의 영토가 87.5%이고, 유대인들이 6.6%였다. 하지만 2011년에 이르러 팔레스타인의 지역은 가자, 서안, 동예루살렘 등을 합쳐 봐도 22% 정도일 따름이며, 이마저도 이스라엘의 식민지나 다름없는 상황이다. 더욱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분쟁 속에서 사망자 수는 언제나 팔레스타인이 압도적으로 많았다(많으면 100배 이상).
더욱이 이스라엘은 결코 공정한 민주주의 국가가 아님에도 자유민주주의를 주창하는 미국은 항상 그들의 편에 선다. 사실 1948년의 이스라엘 건국과 1967년의 6일 전쟁 이후로 중동 세계 안에서 이스라엘의 존재는 혓바늘과 같이 난감한 존재이다. 만일 국제정치적 시각으로 접근한다면, 미국의 이스라엘 지지와 지원은 대단히 기묘한 것이다. 이는 당연히 미국(대중과 엘리트)의 이스라엘 친화적 입장이 강하게 관철된 것이다. 한 면으로는 재계와 언론, 그리고 정치 안에서의 유대인이 점유하고 있는 영향력 때문이고, 다른 한 면으로는 (위에서 말한) 근본주의 기독교인의 신학적 입장에 기초한 것이다.
이스라엘 회복에 대한 기독교의 관심은 비단 미국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다. 많은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이 예루살렘까지 복음이 전해질 때에 예수가 재림한다고들 생각한다. 가령 중국의 백 투 예루살렘 운동이나 한국 기독교계의 베스트셀러 작가인 김우현 씨가 최근에 출간한 <하나님의 심장>에서도 이러한 입장을 확인할 수 있다
네오콘, 유대인 그리고 기독교
이는 기묘하게도 기독교와 유대교를 하나로 묶어준다. 미국의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의 정치적 파트너인 네오콘(neocon), 즉 신보수주의자들이 대부분 유대인이고, 따라서 반(反)이슬람적이고 친이스라엘적인 입장을 지지한다. 근본주의의 목적은 네오콘의 그것과 구별되지만, 둘은 유사한 세계관을 공유한다. 선과 악의 단순 이분법으로 세상을 이해하며, 미국(의 이익)을 중심하며, 이스라엘의 존립과 강화를 중시한다. 이라크 전쟁의 경우, 이스라엘에 유리한 입지를 구축하려는 네오콘의 전략적 판단과 (앞서 언급한) 기독교 근본주의의 정서적 지지가 연결되었다. 사담 후세인 정권의 해체가 미국의 안보에 유용하다는 네오콘의 주장과 이스라엘의 굳건한 존립이 세계의 종말에 요구된다는 근본주의의 주장 또한 결국 동일한 행동을 가져왔다.
비록 근본적인 목적은 달라도 이렇게 현실적인 지향이 동일하기 때문에 이들의 오월동주(吳越同舟)가 가능하게 된 것이다. 유대교 시오니즘과 기독교 시오니즘의 만남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세대주의 지지자들은 이스라엘 건립에 열광했고, 이제 예루살렘에 성전이 재건축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미국 대중이 애호하는 베니 힌이나 제리 팔웰 등 거의 모든 주요한 TV복음전도자(televangelist)들 또한 세대주의 신봉자이며, 공화당 지지자이고, 또한 이스라엘 옹호자이다. 그들의 신학 안에 팔레스타인의 기독교인들은 존재하지 않으며,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기독교 신앙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이스라엘과 유대인 시오니스트들은 기독교인의 이러한 정서적이고 재정적인 지원을 적극 수용하고 있다. 그러나 물론 세대주의 신학 안에서 유대인은 2등 시민일 뿐이다. 그들이 믿는 프로그램을 충실하게 따를 때에만 바른 유대인이다. 앞서 언급한 팻 로버트슨 목사는 한 기독교 방송 프로그램에서 가자 지구에서의 유대인 정착촌 철수를 결정한 아리엘 샤론 이스라엘 총리의 뇌출혈에 대해 “하나님의 땅을 나눈데 대한 하나님의 처벌”이라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근본주의의 이스라엘에 대한 사랑은 매우 인위적이고, 위선적인 것이다. 생각해보면,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는 전략적 동맹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미국의 중동 정책 이면에서 발견하게 되는 기독교 근본주의는 하나님의 사랑은 말할 것도 없고, 인간에 대한 예의도 저버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