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조선일보 토요판에는 이런 글이 올라왔다. 글 제목은 “잘생긴 내 친구”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잘 생긴 내 친구에 대한 내용. 얼마 전 “간장 두 종지”라는 칼럼으로 조선일보 인근 중국집 일대에 큰 파문을 일으키며 인당 간장 한 종지가 적절한지 부적절한지에 대한 때아닌 토론을 이끌었던 한현우 주말뉴스부장의 글이었다.
“대학 입학시험 명칭이 학력고사이던 1980년대 어느 날, 학력고사가 끝난 뒤 서울 P고와 S여고 3학년 학생들끼리 ‘교팅’이라는 것을 했다. … 서울 시내 모든 학생주임이 총출동해 100명 전원 검거 작전에 돌입했다는 소문이 들렸고 두 사람은 급한 대로 택시를 잡아타고 당시 한국 최고의 핫 플레이스인 방배동 카페 골목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래 봐야 둘은 아직 어른 흉내를 내는 19세였으므로 주스와 콜라를 마시고 대충 헤어졌다. … 그 남자아이는 엊그제 만난 내 친구였다. 한 학년에 700명 넘던 시절, 전교 대표 50명에 뽑힌 잘생긴 내 친구다.”
확실히 명문이다. 그 생생한 묘사에 입꼬리까지 올라간다. 무려 주말뉴스부장의 글답달까. 그런데 의문이 든다. “간장 두 종지”는 중화, 동영관, 루이가 아닌 모 중국집에 대한 불매를 선동하는 게 목적이었다고 치자. 그럼 “잘생긴 내 친구”는 대체 뭘 말하고 싶은 것일까. 내 친구 잘생겼다고? 아니면 내가 그 전교 대표 50명에 뽑히지 못해 아쉽다고? 글쎄.
주제는 모르겠지만, 이것만은 분명하다. 이 기사는 지면 낭비라는 사실 말이다. 인터넷 모 커뮤니티에 “고딩 때 교팅했던 썰푼다.txt” 정도로 올라왔어야 적당할 글처럼 보인다. 인간을 대표해 나무야 미안해하고 사과하고 싶은 심정이다. 스파이더맨이 리부트되는 마당에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라는 명언을 굳이 꺼내지 않더라도 이쯤은 누구나 안다. 부장씩이나 되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지면에는 그만큼 큰 책임이 따른다는 것.
망각되는 언론의 책임
사실 이것은 비단 한현우 부장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 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람에게는 그만큼의 책임이 따른다.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람은 한정되어 있다. 언론인은 자신이 가진 지면만큼의, 또 분량만큼의 책임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중요한 소식을 고의로 흘려보내는 데에만 사용되어 왔다.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어버이연합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어버이연합이 보수정권의 목소리가 되었을 때 스피커 역할을 했던 건 언론이었다. 이들이 처음 주목을 받은 것도, 이들이 집회를 열 때마다 그들의 프레임과 이슈를 확산시킨 것도 언론이었다. 경찰서장을 폭행해도, 진보단체의 회원을 폭행해도 그들의 행위는 ‘충돌’이라는 이름으로 희석되었다. 반면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이른바 ‘어버이 연합 게이트’에 대해 KBS와 MBC는 매우 적은 양의 보도만 내놨을 뿐이다.
지난 413 총선에 대한 보도에서도 언론은 무책임했다. 야당의 필리버스터에 대해 제대로 보도한 지상파 메인 뉴스는 찾아보기 어려웠고, 양 당의 공천이 파열음을 낼 때 야당을 비판하는 데에만 집중했다. <뉴스타파>가 나경원 의원 자녀 특혜 관련 보도를 내보낸 다음 날, KBS, SBS, MBC 그 누구도 이런 의혹에 대해 입을 열지 않았다.
신문의 지면과 방송의 전파가 이런 식으로 낭비된 것은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다. MBC가 게임의 폭력성을 실험한다며 PC방의 전원을 차단했던 일이나, 알통의 굵기가 정치적 신념을 좌우한다고 했던 보도는 차라리 귀여운 수준이다. 종이신문의 상황이 위태롭다지만 신문 1면을 광고로 도배했던 3월 9일 자 중앙일보의 선택은 경악스럽다. 사회문제와 사건 보도에 사용되었어야 할 지면마저 기업의 광고지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 요즘이다. “지면은 곧 광고지다. 협찬 기사가 안 들어가는 지면이 거의 없다.” 한 경제지 기자의 말이다. (“광고지로 전락한 종이신문, 사회면까지 돈 받고 판다” 미디어오늘)
목소리를 잃은 사람들이 있다
덕분에 그들이 애써 보도하지 않거나 무시해왔던 사회적 약자, 소수자의 목소리가 담길 곳은 더욱더 사라져 갔다. 그들이 광고를 하거나, 간장을 두 종지밖에 안 줬다고 분풀이를 할 때에 정작 절박한 이들의 목소리는 무시당하기 일쑤였다. 아니, 무시당하지 않을 때도 있었다. 주류언론이 사회적 약자에 대해 보도할 때는, 오직 그들을 비난하고자 할 때뿐이었다.
지난 11월 민중총궐기에 대한 보도가 대표적이다. 공영방송인 KBS는 집회의 취지나 목적을 전하는 일을 망각하고 경찰의 과잉진압은 애써 지운 채, 경찰의 피해와 시민의 불편만을 강조했다. 집회 당일 KBS의 헤드라인이다. “서울 도심 대규모 집회, 격렬 시위에 부상자 속출”, “서울 시내 교통마비에 논술 수험생 발 ‘동동’”
균형 있는 보도는 없었다. 기계적 중립마저 없었다. 이렇게 누군가가 내고자 했던 진짜 목소리는 지면과 전파 위에서 삭제되었다. 언론지형 자체가 가파르게 기울어진 운동장이 되었는데, 이 운동장의 높은 곳에 위치한 사람들은 축구를 하는데 별 관심이 없어 보인다. 아래쪽에 있는 이들에게 연신 침을 뱉어댈 뿐, 공은 사이드라인 바깥쪽에만 머문다. 운동장에서 애꿎은 잔디만 뽑고 있다. 그렇게 써버릴 공이라면, 차라리 그것이 간절한 누군가를 위해 내어주는 게 어떨까.
어떤 것은 보도하지 않고, 어떤 것은 보도하지 않을 수 있는 선택권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선택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것. 이것은 그 자체로 권력을 의미한다. 언론은 그 자체로 권력이 되어 버렸다. 언론은 자신에게 주어진 지면 또 전파만큼의 책임을 다해야 한다. 잘생긴 내 친구 얘기를 전하는 것보다 더 가치 있는 이야기가 분명 있을 것이다. 다시 한 번 오래된 격언을 꺼낸다.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 정말이다.
원문: LUPINNUT.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