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즐거움을 찾길 권하기보다 되려 고통을 권하기도 한다. 피로를 권할 뿐 아니라 ‘아프니까’ 청춘이라고 아프라고 한다. 아둥바둥 살아야만 제대로 살고 있는 거라고 이야기 한다. 그런 고통들은 어디에서 온 건지, 왜 견뎌야만 하는 건지에 대해서는 잘 묻지 않고 그냥 ‘원래’ 그렇게 사는 게 좋은 것이라고들 한다.
물론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도 싫은 일은 딸려오기 마련이고 삶의 일정 부분은 고통일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이들은 가급적 줄이고 함께 극복해야 할 것들이지 고통 자체를 미화하며 대대손손 물려주거나 그런 것도 해내지 못하냐며 비난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을 것이다.
일례로, 내가 심하게 아팠을 때의 일이다. 당시 엄마는 여행 계획을 세워둔 상태였는데 내가 아프다는 것이 고민이 되셨던 모양이다. 생각 끝에 엄마는 “희생하고 참는 것만 해온 사람들은 결국 화병나더라. 엄마가 네 몫까지 이 여행을 즐겁게 갔다 와서 에너지를 전해 줄게”라고 하시더라. 엄마가 즐겁고 건강하니까 너도 금방 건강해질 수 있을 거라고.
당시 나는 새삼스럽게 이런 소리를 하시나 라고 생각하는 동시에 참 지혜롭고 용감한 엄마를 두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라는 이유 하나로 당연한 듯 본인의 삶을 통째로 박탈당하고 가족과는 상관 없는 본인만의 즐거움을 추구하는 데 있어 죄책감을 느끼는 경우를 많아 보았기 때문이다.
엄마라는 족쇄 “엄마라면 당연히…”
특히 자녀가 아플 경우 엄마를 ‘죄인’이라고 탓하는 분위기가 있는 듯 하다. 자녀가 아픈데 어딜 놀러다니냐고 비난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엄마가 자녀를 일부러 아프게 만든 경우가 아닌 이상, 왜 죄인이 되어야 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이런 때일수록 제일 부서지기 쉬운 사람인 엄마의 건강과 행복을 더 신경 써줘야 하는 것 아닐까? 엄마가 무한동력 로봇인 것도 아니고 엄마에게도 ‘재충전’이 필요한 것 아닐까?
유학 생활 중 아이가 크게 다쳐서 상심이 큰 엄마를 만난 적이 있다. 당시 상심한 엄마를 위로하고 엄마가 크게 소모되지 않게 돌보는 손길들은 많이 보았으나, ‘왜 아이를 잘 돌보지 못했느냐’라고 온통 책임을 전가하며 눈치 주는 소리들은 잘 들어보지 못했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엄마들을 자유롭게 내버려 두지 않는 것 같다.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는 하나의 사람이기 이전에 ‘엄마라면 ㅁㅁ해야만 한다’라는 답을 정해두고 그 족쇄에 엄마들을 몰아넣는다.
출산에 대한 강요부터 자연 분만, 모유수유 등 개인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선택하면 되는 영역에 대해 온 사회가 지나치게 간섭하며 압력을 넣는다. 출산 이후 커리어에 대해서도 엄마라면 당연히 희생해야 하는 영역이라고 이야기하며 한 개인을 ‘좋은 엄마’ 또는 ‘나쁜 엄마’로 취급할 뿐, 행복할 권리가 있고 자신의 삶을 살 권리가 있는 한 개인으로서 존중하지 않는다. 마치 보통 인간 외의 엄마라는 새로운 카테고리가 있는 것마냥 특별 취급한다. ‘너는 엄마니까..’ 라며
아빠보다 더 많은 양육을 지게 되는 엄마
최근 성격 및 사회심리학지(JPSP)에 실린 한 연구에 의하면 사람들은 실제로 ‘아빠’에 비해 엄마를 더 깊고 더 영속적이며 더 ‘실제적인’ 카테고리로 취급한다고 한다. 그리고 연구자들은 같은 양육자임에도 불구하고 아빠보다 엄마를 더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것으로 여기는 인식에서 여성들에게 양육의 부담이 가중될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다.
또한 아이들에게 엄마가 필요하다고들 이야기한다. 하지만 아빠의 역할 또한 중요하다는 이야기는 차치하더라도, 아이들에게는 ‘행복한’ 엄마가 필요하다는 점을 기억하자. 엄마가 불행할 때 아이도 불행해지기 쉬움을 보여주는 연구들이 있었다.
일례로 엄마에게, 양육자에게 ‘자신의 삶’이 있을 때 아이들도 행복해질 가능성이 높다. 한 저널 (Plos One)에 실린 연구에 의하면 ‘자식이 삶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부모일수록’ 자식을 통해 만족을 실현하려는 의지가 높았다고 한다. 억눌러진 욕망은 뒤틀린 방향으로 출구를 찾기 마련이다. 즉 자신의 삶을 가지지 못한 불행한 양육자가 자식과 오랜 시간 붙어있는다고 해서 좋은 교육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또 다른 양육자의, 사회의 직무유기가 고집하는 잘못된 환상이다.
어머니의 희생을 찬양하며 ‘날 위해 희생하신 어머니’류의 눈물 겨운 서사는 이미 익숙하다. 하지만 여기서 더 나아가 ‘이제 희생은 그만하시고 어머니의 삶을 사세요. 행복해지세요’가 되어야 할 것 같은데, ‘앞으로도 잘 부탁해요 흑흑’이러는 건 어딘가 좀 이상하다. 아픈 엄마를 안 아프게 해 주는 게 아니라 ‘아프니까 엄마다’ 그러니까 계속 아프세요 라고 하는 것 같다. 하지만 행복하고 즐겁게 엄마 하면 안 되는 걸까?
엄마에게 타의에 의한 희생을 강요하지 말라
엄마뿐 아니라 학생, 직장인 등 다양한 역할들에서도 의무와 희생만을 지나치게 강요하며, 늘 시험대에 올려 평가하듯이 이런 관문을 거쳐야만 ‘제대로 된ㅁㅁ’라고 한다. 반면 행복에 대한 권장은 짜다. 실제로 에드 디너 등의 연구에 의하면 우리 사회에서는 행복한 사람을 ‘이기적’이라고 보고 행복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비교적 크다. 그리고 그 끝에는 괴로움만을 느끼며 ‘열심히 살았지만 난 아직도 내가 왜 사는지 모르겠어’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자발적인’ 희생은 아름답지만, ‘타의’에 의한 희생은 착취다. 어떤 희생을 ‘당연’하게 여기며 희생하지 않았다고 비난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또한 굳이 무엇이 ‘제대로’인지를 가린다면, 고통에 신음하며 꾹 참고 견디는 것보다 스스로가 너무 즐거워서 몸과 마음이 자연스럽게 움직여서 하는 쪽이 더 진짜가 아닐까?
이런 깨달음에서 개인적으로 남편과 자주 하는 다짐이 있다. 서로를 위하되 자기자신을 버리지 말자. 우선 각자의 인생을 가지자. 자신의 꿈과 행복을 챙긴 온전한 개인이 모여야 비로소 행복한 둘이 되니까. 힘들 때는 서로 돕되 서로의 희생을 알아주고 당연시하지 말자.
사실 기본적인 것일진데 개인의 삶에 너도 나도 숟가락 얹고 ‘당연한 희생’왜 하지 않냐며, 특히 엄마들에게 어찌 감히 자기 커리어 등 자신의 인생을 가지려 하냐고 인간으로서의 당연한 욕구를 이기적이라고 하는 모습들을 보면 통탄스럽다. 이래서 자신의 삶을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듯 보이는 어른들이, 그 어른들 밑에서 대리만족의 매개체로 신음하는 자식들이 바글바글한 거구나 싶다.
참고로 결혼은 서로가 서로를 행복하게 해주려고 하는 것이어야지 본인을 위해 남의 귀한 인생 일방적으로 희생시키려고 하는 게 아닐 것이다.
엄마에 대한 소회
개인적인 경험담일 뿐이지만 적어본다. 내가 속한 가정은 엄마 아빠 다 일로 바빴다. 하지만 엄마가 좀더 대외적인 활동들로 바쁜 편이었고, 도시락도 늘 아빠가 싸주던 가정에서 컸다. 그래서인지 육아는 기본적으로 엄마 쪽 책임이라던가 애는 엄마 손에서 커야 잘 큰다던가 하는 전제가 잘 와 닿지 않는다.
아빠는 무대에서 빛나는 엄마를 자랑스러워했다. 콘서트장이나 행사장에서도 온 가족이 함께 응원했던 기억들이 지금도 소중하다. 육아, 당연한 희생 등의 이름으로 엄마의 날개를 꺾으려 하기보다 그 누구의 희생도 당연하지 않고 우린 모두 각자의 삶을 살 권리가 있다고 배웠던 나날들이었다.
그런 교육은 나에게도 좋은 방향으로 작용했다. 자식에게 모든 것을 바친 만큼 집착하고 대리만족을 바라는 부모를 겪을 일이 없었다. 큰 결정에서도 내 의사는 대부분 존중되었고 엄마 아빠의 자유는 내 자유이기도 했다.
반대로 부모가 자식들에게 모든걸 쏟아 붓고 24시간 붙어있지만 서로 잔소리와 불평만 가득하고 정작 진솔한 대화도 없는 집들을 여럿 본적 있다. 그들은 내게 너네는 부모가 다 바빠서 어떡하냐며 걱정했지만, 우린 같이 있는 시간만큼은 대화도 많았고 행복했다.
물리적으로 몇 시간 붙어있느냐와 가정의 화목이 비례하지 않다는 걸 어릴 때 깨달았다. 그래서 아직도 애들한텐 그런 게 중요하다며 부모, 특히 엄마의 24시간을 애들한테 바치라는 강요들이 잘 이해되지 않다. 행복한 엄마의 모습을 본 게 내가 받은 최고의 양육이었다.
또 집착과 사랑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흔히 좋은 양육이라고 강요되는 것들을 보면 강박과 집착에 가까운 것들로 보인다. ‘니 인생은 니 꺼, 내 인생은 내 꺼’가 모토이신 부모님을 만나 행운이라 생각한다.
자기 삶이 있고, 나보다도 더 삶을 즐기면서 사는 부모님의 모습이 나이가 들면서 더 보기 좋고 지금은 고맙기도 하다. 자식들에게 여러 가지 형태의 이상한 기대나 대리만족을 걸지 않는 기반은 무엇보다 부모님 스스로의 행복인 것이다.
참조 문헌
- Park, B., Banchefsky, S., & Reynolds, E. B. (2015). Psychological essentialism, gender, and parenthood: Physical transformation leads to heightened essentialist conceptions. Journal of Personality and Social Psychology, 109, 949-967.
- Brummelman, E., Thomaes, S., Slagt, M., Overbeek, G., de Castro, B. O., & Bushman, B. J. (2013). My child redeems my broken dreams: On parents transferring their unfulfilled ambitions onto their child. PloS one, 8, e65360.
- 에드 디너, 로버트 비스워스 디너 공저 (2009). <<모나리자 미소의 법칙>>, 20세기북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