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 방송국 피디로부터 다큐멘터리의 방향 설정을 위한 사전취재 요청을 받았다. ‘N포 세대의 연애와 결혼’을 주제로 한 다큐라고 했다.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어 만남에 응했다.
‘지금’을 대표하는 사례와 징후적 현상을 기록하고, 앞으로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 좋은 다큐멘터리라고 생각한다. 특히나 공중파에서 방영될 다큐멘터리라면 후자에 방점이 찍혀야한다고 본다. 그런데 N포 세대라는 말은 이미 탄생한지 수 년이 지난 언어다. 아직까지 그 용어를 활용하여 새로운 다큐를 기획하는 것은 낡게 느껴진다.
무엇보다 ‘포기’라는 말이 연애, 결혼, 출산에 붙는 것이 내게는 어색해졌다. 포기라는 언어에는 마땅히 해야만 하는 일이거나 스스로 갈망하는 일인데 도저히 여건이 안 돼 하지 못하게 됐다는 뉘앙스가 느껴진다. 그런데 연애, 결혼, 출산이 요즘 세상에서도 ‘마땅히 해야만 하는’ 일이던가?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다?
픽업 아티스트들의 활동과 데이트 폭력 및 성범죄 사례를 목격한다. (다수의 한국 여성과 마찬가지로) 안전이별에 실패하고 협박과 폭언, 스토킹에 시달리며 눈물의 시간을 보낸 경험도 있다. 그 과정에서 웬만하면 연애 안 하고 살겠다고 다짐하게 됐다.
근데, 그래도 충분히 즐겁다. 재밌는 콘텐츠는 넘쳐나고, 카톡 채팅방에서 수시로 낄낄대는 재미와 종종 동네 친구들을 만나 맛집 탐방하고 맥주 홀짝이는 즐거움이 쏠쏠하다. 흥미로워 보이는 스포츠에 입문했다가 금방 그만두는 취미(?)도 생겼다. 요즘엔 스케이트 보드를 배우기 시작했다.
결혼? 행복해 보이는 부부가 내 주변에는 세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로 드물다. 과정을 생각하면 더 귀찮다. 지인이 결혼을 위해 학력, 경력, 재산, 건강상태 등을 입사지원서 쓰듯 문서로 만들어 시어머니 앞에서 프레젠테이션 했다는 것을 듣고 헬조선 결혼문화에 더욱 치를 떨게 됐다.
출산? 성긴 사회안전망, 무한 경쟁 사회의 면면을 생각하면 아이 낳는 것이 아이에게 못할 짓 같고, 지구적 관점에서 생각하면 이미 인구가 넘치게 많은데 굳이 나까지 인구수를 늘리는데 일조해서 지구를 더 힘들게 해야 하나 싶다.
그러니까 새로 만들어지는 다큐멘터리가 “불쌍한 청춘들이 경제사정 때문에 연애와 결혼 문제를 ‘포기’하지 않게 도와주자!”는 프레임으로 제작되지 않기를 바란다. 가장 우려되는 것은 ‘불쌍한’ 청년들의 사례들을 포획하여 전시하는 또 다른 프로그램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선택’과 ‘고군분투’가 보고 싶다
제작진이 시청자더러 연민하라고 던지는 떡밥으로서의 청년의 모습보다는, 주어진 상황 속에서 나름의 선택을 하고, 그 선택에 책임지며 그 안에서 기쁨을 찾아 살아가는 사람들의 분투를 목격하고 싶다. 포기가 아니라 선택이다. 연애·결혼·출산으로 ‘정상가족’을 이루지 않아도 보람을 느끼며 살 수 있음을 보여주는 실험적 공동체의 사례를, 그들 일상에서의 행복과 구체적 갈등을 시청하고 싶다.
그리고 그런 청년의 생명력을 꺾지 않기 위한 행정적 뒷받침은 무엇일지(특히 부동산 문제 좀 어떻게 안될까여…), 구태의연한 기존 주장의 답습이 아닌 미래지향적 대안 모색을 보고 싶고, 그것들을 이미 요구하고 있는 청년단체들이 더 많이 소개되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이런 이야기를 피디에게 주저리 주저리 떠들었는데, 이런 내용이 과연 반영 될는지, 다큐를 기다려봐야겠다.
원문: 최서윤님의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