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 일은 태산 같고 갈 길은 천리 구만리인데 괜히 말이나 좀 보태보자 싶다.
[매일경제] 일상생활 속 나도 모르게 남용하는 ‘번역투’
- ~해지기 위해: ‘~해지기 위해’는 영어에서 ‘for’의 번역 투다.
- ~에 대하여/관하여: 여기서 ‘~에 대해’는 영어에서 ‘~about’의 번역체 표현이다.
- ~에도 불구하고: ‘even though’의 번역체다.
- ~로 인해/인한: ‘~로 인해 혹은 인한’은 ‘by’에서 나온 번역체다.
- ~에 비하여/비해: 여기서 ‘~에 비해’는 ‘of’의 번역투다.
(후략)
이 글은 일관되게 일상 생활 속에 남용되는 ‘번역투’라고 지적된 것들의 ‘원어’를 영어에서 찾는데, 내가 보기에는 일본어의 흔적도 꽤 많다.
- “~해지기 위해”는 영어의 “for”라기보다는 “~のために”
- “~대해서/관해서”는 “about”보다는 “~に対して/関して” (참고로 일본어에서 “대해서”랑 “관해서”는 엄연히 의미가 다른데, 한국어에서는 혼용되는 것 같다.)
- “~에도 불구하고”는 “~にもかかわらず” 등 거의 일대일 대응에 가까울 정도로 동일한 표현이다.
언어가 변천해 온 역사를 공부한 바가 없으니, 나는 저 ‘번역투’의 ‘원어’가 영어인지 일본어인지 규정할만큼 자신은 없다. 다만 내 수준에서는 두 가지를 추정할 수 있는데, 하나는 처음부터 영어가 아니라 일본어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다. 근대 한국어의 성립에 있어서 일본어의 어휘, 문법, 그리고 작문이 미친 영향은 이미 많은 사람들이 공부하고 있다. 저 일본어들의 대응물로서 “~하기 위해”, “~대해서”, “~에도 불구하고” 등이 고안되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또 다른 하나의 가능성은, 위에 대응된 일본어 자체도 “영어의 번역투”일 가능성인데, 이렇게 본다면 한국어의 ‘번역투’란 일정 정도 일본어로 인해 굴절된 형태의 영어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이처럼, 소위 ‘번역투’에 있어서는 어떻게 보더라도 일본어의 영향을 피해갈 수는 없다. 혹자는 식민지배의 잔재라고도 할 것이고, 혹자는 식민지적 근대 형성의 필연적 결과라고도 할 것이다.
어찌 되었든, 저렇게 명백한 일본어와의 관계에도 불구하고(!) 링크된 글이 일관되게 영어를 ‘원어’로 추적하는 태도는 적잖이 흥미롭다. 20세기 초반의 일본의 제국주의 지배가 기억에서 지워지는 지점에 미국이 그 자리를 대신하며, 냉전과 식민주의의 질서 속에서의 국제 상상이라는 게 결국 미국을 중심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헬조선의 한계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한편으론 글의 필자가 영어밖에 못해서 그럴 수도 있겠다 싶기도 한데, 그것도 까놓고 말해서 영어밖에 못하는 사람이 모든 ‘번역투’를 ‘영어’ 탓으로 돌리는 대담함을 가질 수 있는 것, 그리고 이 글이 SNS를 통해 공감/회자되는 것은 역시 (미국)영어 중심주의가 가능하게 만든 사태일 터이다.
흥미롭게도 영어로 공부하고 있는 나는 영어 글쓰기에서는 ‘번역투’라는 표현을 들어본 일이 없다. 링구아 프랑카로서 영어가 얼마나 포용력있는 위대한 언어인가! … 하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실은 그렇지는 않다. 영어는 꽤나 딱딱한 언어다. 좋은 영어와 나쁜 영어의 기준이 매우 명확하다.
일례를 들면 작문 교과서들은 일관되게 우리가 논문 쓸 때 자주 쓰는 표현 “in order to 부정사”를 그냥 “to 부정사”로 쓰라고 권한다. 마찬가지로 “for the purpose of” 역시 그냥 “for”로 충분하다고 말한다. 그 외에 수동태나 be 동사 구절보다는 동사구를 선호한다든가 등등. 물론, 여러 작가들이 여기에 어긋나는 표현들을 사용하는데, 그걸 두고서 “글이 안 좋다”고 말하는 경우는 봤어도 ‘번역투’라고 이름 붙이는 경우는 보지 못했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어에서 남용되고 있는 소위 ‘번역투’의 문제도 좀 다르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내가 보기에 번역투에 대한 불만은 일종의 언어순혈주의에서 비롯한다. 그러나 언어의 본질적 특성상, ‘순수하게 한국어’인 것은 한국어에 없다. 이것은 영어와 일본어도 마찬가지다. 그래도 순수한 한국어가 좋다는 분들은 “아이스크림” 말고 “얼음보숭이”를 드시면 되겠다.
요컨대 소위 번역투는 외국어에서 온 말이라서 문제가 아니라, 글이 소통되기 위한 최소한의 명료성을 해치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명료한 언어를 쓰기 위해서는 당연히 훈련이 필요한데, 한국어 작문 교육이 그 역할을 얼마나 담당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요는, ‘번역투 비판’ 말고 ‘명료한 한국어 작문에 대한 토론’이 있었으면 한다는 것이다.
원문: 손이레 님의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