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이야기는 개인적이고 경험적이며, 상식적이고 포괄적인 감상에 불과하다. 나는 후쿠시마를 사유하는 방법론이나 시각을 갖고 있지 않다. 내가 본 후쿠시마는 내가 가진 빈약한 지식이나 이론을 초과하는 엄청나게 큰 ‘덩어리’고 현재진행중인 사건이었다.
그럼에도 ‘언어도단’의 사건을 해석하려 드는 것은 연구자나 이론가의 운명이며 임무일 것이다. 기실 이미 여러 철학자·역사학자·문학자·사회과학자들이 무수히 많은 말을 후쿠시마에 대해 해 놓았다. 그 많은 말들 중에 적실한 것이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1. 무지
사실 후쿠시마에 같이 갔다온 연구 그룹은 원전 문제 같은 것과는 아무런 관계 없는 모임이다. 우리 공통의 관심사는 문학의 초국적 유통, 즉 세계적인 출판 자본주의와 독자·독서의 교호 문제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2011년 3월에 일어난 미증유의 비극적 사건이 멤버들 중에서 일본 도쿄에서 살고 있는, 또 앞으로도 아마 그렇게 할, 두 사람의 연구자에게 무언가 돌이킬 수 없는 큰 영향을 미쳤던 듯하다. 그 뒤로 신중하고 점잖은 두 연구자의 학문적 관심사와 세계와의 쟁투 방법이 바뀌었던 듯하다. 친구로서 그런 걸 관찰할 수 있었다. 2015년 9월 후쿠시마 행을 제안한 친구는 이제 총 8번 후쿠시마를 다녀왔다 한다.
일본 열도에서 가까운 태평양 연안, 특히 일본의 일이라면 매우 민감한 나라인 한국에 살고 있지만, 나는 후쿠시마에 대해 아주 일반적인 사실 외에는 무지했다. 지금도 대체로 그렇다.
우리 약한 개별자들이 몸 담은 이 폭력적인 세계에는 확실히 ‘인식의 국경’ 내지 ‘고통의 국경’ 같은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또 반대로, 사실 겨우 3박 4일 한 번 갔다온 사람으로서, 후쿠시마에 대해 무슨 말을 해야할지 특히 ‘당사자’들을 생각하면 아무 이야기도 할 수 없지만 이렇게 말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일본산 수산물을 늘 수입하고, 일본과 두 개 면의 바다를 공유하는 한국에서 ‘원전 폭발’과 그 후과에 대한 반응은 복잡다단한 것이었다. 내가 작년 9월 후쿠시마에 갔다 온 사실을 처음 SNS에 공개했을 때도 그랬다. 내 친구들에게 그것은, ‘대단한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 또는 무모하거나 유보 조항을 달아 ‘지지할만한’ 일이었다. 평소보다 ‘좋아요’도 적었다.
물론 내 자신도 그랬다. 그런 ‘위험한 곳’에 갈 것인가? ‘전적으로 내가 결정할 일’이었다. 그리고 제안자는 이 문제에 대해 아무말도 하지 않은채, 단지 우리가 그런 곳을 간다는 ‘사실’과 거기 시민단체의 안내를 받아 안전조치를 취한다는 것만을 적었다.
또다른 친구는 인문학자로서 미증유의 ‘현장’을 보게 될 것이라는 유혹을 하면서도, 내가 이리저리 묻자 귀찮은 듯 겨우, “저선량 방사능 피폭의 위험은 모든 개인한테 다르고, 통행 제한 지역에 갈 것인가 하는 것은 결국 오로지 네 개인의 판단에 맡겨야 할 문제”라 했다. (나는 내 친구들이 무책임하고 뻔뻔하다 느꼈다ㅎㅎ) 그런 상황 속에서, 또다른 친구(미국인)와 나는 어쩌면 ‘엉겁결에’ 후쿠시마에 따라 갔던 셈이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우리 속담이 생각난다. 물론 내가 간 곳은, 강남 같은 것이 아니었다.
2. 공포와 일상성
사람이 아예 살지 못하는 4개 마을(町). 그리고 2011년 3월 11일 그대로 시간이 멈춘 채 방치된 바닷가 폐허와, 이제 세계적으로 상징적인 이름이 되어버린 ‘제1원전’ 정문 앞까지. 우리는 그곳을 걷거나, 또는 차에서 내리지 않고 통과했다.
물론 공포스러웠다. 그것은 주로 ‘방사능’ 때문이었다. 방사능이란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공기 중에 떠돌다 감기를 일으키는 바이러스도 아니고, 자외선처럼 피부에 닿는 느낌을 알 수 있는 기(氣)도 아니었다. 나는 내 비참한 과학 지식을 한탄해야 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방사능은 여러가지 방식으로 다르게 가시화돼 있었다. 우리는 사흘 내내 방사능 선량 측정기를 갖고 다녔는데, 조그마한 기계는 특히 숲이 가까운 길에서 삐 삐 삐 삑 소리를 내며 바빠졌고, 제1원전 정문 앞에서 미친듯 뛰어올라 ‘최고 기록’을 세웠다. 9점 몇이라는 그 선량은 ‘정상치’의 1000배쯤 되는 치수다. 이 수치는 계속 바람 방향과 위치에 따라 변하지만 무서웠다.
그런데 ‘잘 모른다’는 것은 비단 내 문제만이 아니라 지금도 지속되고 있는 ‘사태 전체’의 한 핵심이기도 했다. 세계 유일의 원폭 피해 국가 일본은, 세계 최고의 선진국이자 과학국가 일본은, 왜 그런 재앙을 당할 수밖에 없었는가? 그리고 왜 이 정도밖에 대처하지 못하는가? 이런 기초적인 의문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후쿠시마에서 일어난 핵 재앙은 인간의 인식과 문제 해결 능력 바깥에 있다고 보였다. (며칠 전에도 체르노빌에서 재앙은 계속 된다는 기사를 보았다.) 일본 정부와 도쿄원전은 그래도 뭔가 상대적으로 많은 것을 알고 있을 것인데, 그 속은 누구도 알 수 없는 것처럼 되었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과장된 공포와 은폐가 함께 존재하게 된 것이다. 결국 국가와 자본, 과학과 ‘역사’의 한계에 관한 것이 여기에 걸려있는 것이다.
후쿠시마 방문 첫날, 초행길인 미국인 친구와 나는 잠깐 고민했던 듯하다. 무엇을 먹고, 어떻게 입어야 하지? 거기서 만난 공무원이나 시민단체 활동가에게도 질문을 했었던 듯하다.
그러나 무지와 뒤얽힌 공포는 쉽게 와해되었다. 우리는 평소처럼 물과 생선을 마음껏 먹고 마셨다. 물론 그 ‘공포의 와해’는 거기 살고있는 사람들과의 만남 덕분에 그리 된 것이다. 20-30 km 밖에 가면 많은 사람들이 먹고 마시며 살고 있다.
물론 어떤 농수산물은 회피된다. 방사능 오염토를 산처럼 쌓아올린 그 곁에서 많은 이들이 일하고 있다. 살아있다는 것의 위대한 범용(凡庸)함과 일상성 덕분일 것이다. 그것은 누구도 부정하기 어려운 진리겠다. 그것의 제한성도 인식되는 한에서.
3. 세월호와 후쿠시마
그러나 일본 정부는 ‘귀환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한다. 후쿠시마 사람들 중에는 가족이 뿔뿔이 흩어진 사람들도 많고, 고향으로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사람들도 많다. 반면, 고향을 아예 떠나지 않았거나 여전히 고향 근처 가건물 집단 거주지에서 버티며 사는 이들도 있다.
2020년에 도쿄에서 올림픽이 열린다는 것이 일본 정부와 자본에겐 중요한 문제이리라. 도쿄는 올림픽을 앞두고 건설을 중심으로 벌써 ‘호경기’ 분위기가 나고 있다 한다. 따라서 원전 사고가 마치 없었던 일처럼 생각하고 싶은 어떤 일본인들과, 사고를 우경화의 매개로 삼고 싶어하는 권력의 그림자도 느낄 수 있었다. 우리가 도쿄에서 후쿠시마로 간 날은 일본 국회에서 안보법안이 통과된 날이었다. 둘의 복잡한 연관성이 일본 정치의 핵심일 것이다.
도대체 이 하나도 정돈되지 않은, 검은 용기에 든 오염토는 차곡차곡 쌓아뒀지만 산처럼 시커면 그것을 처리할 데는 도무지 없는, 이 일본답지(?) 않은, 카오스는 뭐냐?
그래서 마지막 날, 나는 일본 정부의 정책을 비판하는 시민단체 활동가에게 무식하고도 단호하게(?) 물었다. “무엇부터 어떻게 해결해 나가기를 바라시는 건가요?” 그는 원전 인근 고등학교에서 평생 교사로 일하던 60대 여성이었는데, 3.11 이후에 인생이 바뀌었다 한다.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우선은 제대로된 진상 조사와 진심어린 사과”라 했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그때 나는 속으로 ‘울컥’했다. 2014년 4월에 300여명의 학생·시민이 수장된 세월호 사건과 그 처리과정을 떠올리며. 한국에서는 세월호 생존자와 유가족들이 오히려 파렴치한이나 죄인처럼 돼 있다. 민주주의가 취약했고 비극적 사건이 많은 한국에서는, 피해자가 숨죽이고 사는 역사가 되풀이돼 왔다. 일본에서도 후쿠시마 출신 청년들이 출신을 숨긴다 한다. 원전 사고에 관련해서도 처벌받은 공무원과 책임진 도쿄원전 간부가 하나도 없다고 들었다. (수천 명의 피해 주민들이 정부를 상대로 집단 소송을 진행중이다.)
그렇게 권력과 정부는 비슷하다.
4. 상상
나처럼 둔한 자라도 후쿠시마에 가면 아마 큰 영감을 얻을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은 평생의 삶을 강타 당하는 경험을 하게 될지 모른다. 미증유의 재난과 한계상황이 던져다 주는 크나큰 주제들이 거기 있기 때문이다. 국가·사회·기업, 그리고 인간 개별자들과 바다·숲·동물·식물에 관한. 또 인생을 바쳐 싸우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후쿠시마에 가보라 권유하지는 못한다. 나이가 어릴수록 더 그렇다. 그리고 도쿄의 친구가 2015년 8월 메신저로 내게 했던 말을 나도 똑같이 할 수 있다. ‘방사능은 사람마다 다르게 작용해서, 어떤 사람은 적은 피폭에도 병이 생길 수도 있다.’
대신 꼭 한번 ‘상상’해보라는 권유는 하고 싶다. 5년간 방치된 승용차와 잡초로 덮인 유령 마을과, 시간이 완전히 멈춘 채 방사능 오염수를 내뿜는 죽음의 태평양 바다와, 또 거기에서 목숨을 걸고 돈을 버는 노동자들과, 차 타고 20분만 나오면 아무일도 없는 듯 아무것도 모르는 듯 살아가는 많은 아이들과, 재앙 이후 버려졌던 많은 개와 고양이들과, 그리고 그런 믿기 어려운 이야기가 있는 곳을 사랑하는 사람이나 친구와 함께 걷는 상상을.
그리고 생각해보기를. 우리 경상도 동남해안에서 지금도 열심히 전기를 생산하는 낡은 원자력발전소들과, 원자력이야말로 값싸서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원문: 천정환님의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