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추억 속의 단어가 된 것 같은 솔로대첩을 기억하십니꽈? 때는 201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무리 봐도 세상이 망할 것 같지도 않고, 내가 학으로 변신할 징조도 안 보이길래 일찌감치 비연애인구 전용잡지를 기획하던 중 흥미로운 소식이 들려왔다. 크리스마스를 맞이하여 여의도 공원에서 ‘솔로대첩’이라는 것이 열린다나?
이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가슴이 두근두근거렸다. 아, 파올로 코엘료가 약을 판 것만은 아니구나. 내가 진심을 다해 무언가를 하려고 하면 정말로 온 우주가 그것을 이루어려고 움직이나?! 솔로대첩에서 <전방위. 무정형. 비연애인구 전용잡지 계간홀로>를 배포하는 것만큼 완벽한 발간이 어디 있으랴! 뭐 그런 생각에 무척 들떴던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기대감은 곧 행사에 대해서 알아보기 시작하자마자 바늘 맞은 풍선처럼 뻥 터져 팍 하고 쭈그러들었다. ‘솔로대첩’이라길래 홀로들이 스크럼을 짜서 연합한 뒤, 크리스마스의 번화가가 제 것인양 독점하는 연인들의 행진을 가로막는 정도의 패기를 기대했는데. 결국 또 하나의 ‘연인 되기’였다. 그것도 남녀가 양쪽으로 갈라져 대치하고 있다가 준비 땅 하면 달려가 즉흥적으로 쌍을 이루는, 초등학교 때 운동회에서 지겹게 했던 게임 형식이란다.
솔로대첩? 뭐랑 싸우는데?
‘대첩’은 곧 大捷, 크게 싸워 이긴다는 뜻이다. 혹은 큰 승리 그 자체를 뜻하기도 한다. ‘솔로대첩’이라고 하면 솔로가 크게 이긴다는 뜻 정도로 풀이할 수 있겠다. 그리고 ‘솔로대첩’이라고 이름 붙인 행사가 연인되기로 이어진다면, 승리 = 연인, 패배 = 홀로, ‘홀로 =연애를 하기 위해서 고군분투하는 연애상비군’이라는 도식을 되풀이할 뿐이다.
나는 크게 실망했고 솔로대첩에 참가하지 않았다. 그리고 모두가 알겠지만 2012년 제 1회 솔로대첩은 그렇게 화제만 남기고 처참한 실패로 돌아갔다. 가장 큰 문제는 성비가 맞지 않았고, 진행이 서툴렀으며, 시작도 전부터 성희롱이나 성추행의 우려가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안에, 이성애 중심적 연애지상주의의 문제점이 고스란히 압축되어 있다.
우선 ‘솔로대첩’의 형식에서 드러나듯이 우리 사회에서 홀로란 ‘남/녀’의 진영에 갈라져서 서로를 향해 달려갈 수 의지가 있는 ‘이성애자’들로만 가시화된다. 그곳에서는 오로지 ‘중간 지역’, 여성과 남성이 만나는 공간만이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성비불균형이 가장 큰 문제가 된다.
또한 성추행과 성희롱의 문제에서 로맨스와 폭력의 모호한 경계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다. 호감 표시와 추행의 경계는 그 결이 몹시 복잡하고 유동적이다. 연애가 적극적으로 조장되는 공간에서는 그 경계가 단일화 되고, 그 기준에 개인이 억지로 맞춰야 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가령, 솔로대첩에 참가했을 때 누군가 달려와 참가자를 끌어안았다고 하자. 그럴 때 불쾌감을 표시하면, 행사의 취지를 이해하지 못한 ‘예민종자’가 될 수 있다(미팅이나 술자리에서 벌어지는 스킨십 게임도 비슷한 예가 될 수 있다). 그 공간에 나온 여성들은 연애에 적극적으로 임하겠다는 의지를 내보였다는 이유로 일부 남성들에게 ‘멋대로 만져도 되는 여자’가 되고, 혹시 사고가 벌어졌을 때는 ‘그러게 왜 그런 델 나가서’라는 비난에 직면할 위험에 처한다.
한편 온라인상에서 일부 남성 회원들이 성희롱을 예고하자, 게이 남성들이 솔로대첩에 출격해서 그 남성 회원들을 성추행하겠다고 맞받아치는 설전이 있었다. 여기서도 사람들이 특정성별과의 연애 가능성을 곧 성폭력의 가능성과 연계하여 상상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러한 발언을 한 것이 진짜 게이 남성인지, 아니면 어디까지나 ‘드립’의 일환으로 제기되었는지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진위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젠더위계다.)
2014년에는 신촌 새마을 미팅 프로젝트라고 해서 지역의 상권들과 연계하여 맛집 탐방과 즉석 만남을 겸한 행사가 열렸다. 이 경우는 좀 더 치밀한 준비를 거쳤다. 성비 불균형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처음부터 남녀의 숫자를 제한하여 신청을 받고, 정해진 시간 동안 남녀가 각각 2인 1조를 이루어 지정된 식당을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형식을 택했다.
들어간 가게에서 랜덤으로 테이블에 앉혀 4명이 함께 식사를 하거나 차를 마시게 했다. 후기를 살펴보니 사전 신청을 통해 성비를 맞추었고 식사와 차를 제공했기 때문인지, 2012년의 처참한 실패(=비둘기 대첩 등으로 불리기도 했다)보다 비교적 괜찮은 평가를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이 프로그램은 ‘신촌 솔로대첩’이라고 불렸지만 정식 이름은 ‘새마을 미팅 프로젝트’로, 명명에서부터 자신들의 의도를 명확히 밝히고 있다. 이 ‘새미프’ 프로젝트는 비단 이 행사뿐만 아니라 비슷한 형식으로 미팅 프로그램을 운영해왔다. 이 홈페이지에서 제공하는 행사의 의도(‘내수 경기 침체’, ‘저출산’, ‘만혼화’의 해결)는 현재의 연애 이데올로기가 요구하는 것과 정확히 일치하고 있다.
내수 침체, 저출산, 만혼의 배후
‘내수 경기 침체’, ‘저출산’, ‘만혼화’. 연애 지상주의에서 홀로들이 자주 뒤집어쓰게 되는 혐의들이다. (심지어 최근에는 연합뉴스에서 이런 비혼 선호 현상이 결혼하기 힘든 농촌 총각들에겐 ‘상처’가 된다는 기사를 썼다. 논리적으로 상관이 없는 사실들을 엮는 오류에 빠진 것은, 비혼이 사회적 문제라는 강력한 편견 때문이리라.) 90년대~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연애가 이렇게까지 모두의 필수 과제는 아니었으며, 초등학생들까지 ‘모태 솔로’라는 단어를 즐겨 쓰고 친구를 놀리는 데 사용하는 현상이 기승을 부리지는 않았다.
그러나 연애와 소비가 적극적으로 만나서 결탁하고, 연애를 한다는 것이 곧 소비로 이어지면서 기업은 적극적으로 연인들을 자신들의 고객으로 유치하고 판타지를 판매하기 시작한다. 그렇지 않으면 ‘화려한 홀로’라도 되기를 강요 받으면서 어떻게든 지갑을 열려고 하는데, 안타깝게도 살기는 더욱 팍팍해지니 결혼은 늦어지고 출산율도 낮아진다. 그럴수록 더더욱 연애와 결혼을 선택하지 않는 홀로들이 원인으로 지목 당한다. 삼포세대인 홀로는 그러한 현상의 원인보다는 결과에 가까운데도 말이다.
물론 ‘새미프 프로젝트’는 그러한 삼포세대에게도 희망을 주겠다는 취지에서 기획되었다. 계간홀로에서는 늘 ‘연애하지 않을 자유’에 대해서 말하지만, 이 목소리의 뒷면은 ‘우리의 연애를 가로막는 억압’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그토록 연애하라고 등을 떠밀면서도, 정작 한편으로는 우리의 자유로운 사랑을 가로막고 착취하는 것들. 고용 불안정이나, 특정 성적 취향에 대한 억압, 비만 인구나 장애 인구에 가해지는 연애 금기… 지금 이 순간도 너무나 뻔뻔스럽게 벌어지는, 이중의 억압들 말이다.
연애하지 않을 자유
나는 말하고 싶다. 너무나 많은 기회비용 때문에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 삼포세대가 있다. 사랑을 불가능하게 하는 구조를 은폐하고, 그것을 개인의 능력 부족으로 돌려 비난하고 조롱하는 시선이 존재한다. 그것에 동의하지 않으며 저항한다. 삼포세대가 그 이유로 차별 받아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마찬가지로 모든 기회를 박탈당한 삼포세대가 간절하게 연애를 꿈꿀 수 있다. 연애가 의미하는 바는 각자에게 너무나 다른 색깔일 테니까. 어떤 어려움으로 연애를 포기한 이들이 있다면, 다른 방식으로 연애를 가능하게 하는 방식도 필요하다. 하고 싶은 사람은 해야 하고, 하기 싫은 사람은 하지 말아야 한다. 다만 연애를 하고 있거나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계급을 나누는 기준이 되지 않도록, 그것이 차별과 억압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계속해서 이야기하고 나누고 들어야 한다.
연애를 하면 좋은 점이 분명 존재한다. 누군가에게는 연애가 삶의 전부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좋다’에서 멈추지 않고 ‘그러니까 연애해’ ‘연애하지 않는 너는 불쌍해’로 넘어가는 것이 연애지상주의의 문제점이다. 나는 이 연결고리를 끊고 싶다.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를 모두 ‘무죄’로 석방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