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빙 고프만(1922-1982)은 캐나다 출신으로 시카고 대학에서 공부한 사회학자다. 이 사람만큼 현대사회의 정체성에 대해 예리한 통찰을 했던 학자는 없었다. 그럼에도 그의 중요성은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그가 주목한 것은 ‘자기 연출(Self Presentation)’이라는 분야였다. 그의 책 『자아표현과 인상관리(The Presentation of Self in Everyday Life)』(1959)에는 영국의 전통적인 귀족 저택에서 일하는 하인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책에 의하면 유럽의 저택에는 하인들만을 위한 통로와 출입구가 따로 있다.
복도나 책꽂이 뒤, 혹은 계단참의 구석배기 같은 곳이 하인들을 위한 출입구고 그 출입구들은 하인들 숙소로 연결된다. 중간중간에는 바깥의 동태를 확인하기 위한 구멍들도 뚫려 있다. 그 구멍 역시 눈에 띄지 않게 잘 숨었는데, 심지어 초상화의 눈을 통해서 관찰하도록 되어 있는 곳도 있다.
이 비밀통로와 관찰구멍의 용도는 바로 저택에 거주하는 귀족과 그들의 손님들 눈에 띄지 않게 저택을 관리하기 위함이다. 손님이 음식을 흘리거나 뭘 잘못 깨거나 어질러 놓으면 하인들은 관측창을 통해서 위치를 확인하고 아무도 없을때 비밀출입구로 잘짝 나와서 청소를 해놓고 사라진다.
심지어 요리를 올릴 때도 복도를 이용하지 않고 부엌(이라기 보다는 조리장)과 식당 사이를 직접 연결한 비밀통로로 음식을 이동한다. 그래서 번거롭게 냄새를 피우거나 남들 눈에도 띄지 않게 음식을 내놓고 식사가 끝나면 역시 조용히 치워버린다.
어떤 사람들은 이 시설을 원래 목적이 아닌 악의적 용도로 사용하기도 한다. 그렇다. 영국 추리소설이나 호러 영화에 등장하는 대저택의 비밀통로는 원래 귀신이나 살인자들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이들 관리인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그런데 이 저택 시스템은 무대 시스템과 거의 같은 방식으로 움직인다. 주인님과 손님들에게 드러나는 저택 공간은 무대의 전면이다. 집사들은 거기서 일종의 공연을 한다. 물론 그들이 맡은 배역은 조용하고 침착하고 충직한 관리인이라는 배역이고 관객은 주인님과 손님들이다. 공연이 끝나면 관객들 몰래 슬쩍 무대 뒤로 빠져나간다.
주인님과 손님들의 눈에 띄지 않는 비밀통로와 식당, 관리인 숙소는 당연히 무대의 후면에 해당한다. 이 무대의 후면에서는 또 다른 공연이 펼쳐진다. 관리인들은 여기서 자기들의 무용담을 동료 관리인들에게 펼쳐놓는다. 자기가 어떻게 곤란한 상황을 슬기롭게 해결했는지, 그 장면에서 자기가 어떤 대사를 읊었는지 동료 배우들에게 자랑하는 것이다.
삶의 무대의 전면과 후면
고프만은 이 저택의 구조가 우리들 삶의 구조와 동일하다고 봤다. 우리 모두에게는 각자의 무대와 그 무대의 전면/후면이 있다는 것이다. 전면에서 우리는 관객을 위해 공연한다. 후면에서는 공연을 준비하고 평가하고 재충전한다. 무대의 후면에는 동료 배우(고프만은 이들을 공모자라고 불렀다)가 있다. 이들은 배역을 연습하고 입을 맞춘 다음 무대 앞으로 나선다.
이런 무대는 하나뿐이 아니다.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최소한 대여섯 개의 무대가 있다. 무대는 관객에 따라서 달라진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한 가족의 가장이고, 회사원이며, 고교동창 친구와 대학동창 친구들 모임에 참여하고 있다면, 그의 무대는 대충 4개쯤 된다. 가족이라는 무대에서는 가장이라는 배역을 맡는다. 그래서 가장답게 행동한다.
가족 무대의 공모자는 상황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 배우자다. 쉽게 말해 아빠와 엄마는 아이들 앞에서 일종의 공연을 하는 것이다. 그는 회사에서도 역시 또 다른 배역을 맡는다. 공모자는 동료(그중에서도 특히 믿을 수 있는)들이고 관객은 직장 상사이거나 고객들이다. 그의 배역은 충실한 부하 혹은 성실한 직원 같은 것이다.
고교/대학 동창이라는 관객들 앞에서 그가 맡은 배역은 같은 학교 경험을 공유하는 친구다. 동창을 만나면 순식간에 그 시절의 역할과 배역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물론 씁쓸하게 그 배역을 포기하는 사람도 있고, 졸업 후의 사회·경제적 지위 변화에 맞춰 역할 조정이 이루어지기도 한다. 어쨌거나 여기도 배역이 있고, 그 배역을 제대로 알고 거기에 맞춰서 행동해야 한다.
그에 의하면 자기 연출은 언제나 1) 배역, 2) 공모자(혹은 각본), 3) 관객을 필요로 한다. 이것은 연극무대의 기본 구성요소와 동일하며, 이 세 가지 요소 중 하나라도 없다면 자기 연출은 무의미하다. 각각의 무대에는 그에 맞는 배역과 대본이 따로 있으며, 만약 A라는 무대에서 해야 하는 배역을 B라는 무대에 가서 하는 눈치없는 짓을 하면 사회생활에 애로사항이 꽃핀다.
우리가 사회화 된다는 것은 결국 우리에게 주어진 배역이 무엇인지, 그 배역에 맞는 대본이 무엇이며 누구와 공모해야 하는지, 그리고 가장 중요한 관객이 누구인지 깨닫고 배우는 것이다.
사회화: 배역, 공모자, 관객, 그리고 대본의 이해
초등학교 2학년에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갔을때 내 경험을 대입해서 설명해보자. 나는 그 당시 ‘전과(표준전과, 동아전과)’가 뭔지 몰랐다. 학교 공부란 교과서와 선생님이 가르침이 전부라고 알고 있었다. 이전 학교에서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런데 새로 전학간 학교에서는 수업을 통해서 듣고 교과서에서 읽은 정보만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과제가 주어졌다. 더더욱 놀라운 것은 다른 급우들은 모두 그 어려운 숙제를 해오는 것이었다!
내가 뭘 몰랐을까, 뭘 배우지 못했을까. 한동안 헤메다가 옆자리 친구에게 “어떻게 그 숙제를 했느냐?”고 물었다. 그 친구는 내 질문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간신히 내가 전과의 존재를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세계로 나를 안내해주었다. 알고 보니 선생님이 내주시는 과제와 답은 모두 전과에 그대로 있었다.
학교라는 무대에서 내가 맡은 역할은 학생이었다. 나는 내 배역과 대본이 교재와 선생님의 가르침 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무대에는 ‘전과’라는 다른 대본이 있었다. 선생님도 다른 학생들도 실제로는 전과라는 대본에 근거해서 과제 부여와 제출이라는 공연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닫고 나서야 간신히 나도 다른 급우들과 나는 공모자가 될 수 있었다.
대본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이 대본은 절대로 무대 전면에서 드러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대본은 연습할 때나 무대 뒤에서 보고 읽는 것이고, 무대 앞에 나서면 마치 대본은 없는 것 처럼 행동해야 한다. 그래야 공연이 진행된다. 이 규칙을 따르지 못하는 자에게는 다양한 처벌이 내려진다. 만약 내가 선생님에게 “이번에 내주신 과제는 표준전과의 몇 페이지에 있는 거냐”고 질문을 했다면, 그 이후 내 삶은 아마 상당히 암담해졌을 것이다.
반복적으로 이 규칙을 따르지 못하는(혹은 거부하는) 자에게는 결국 아무런 배역도 맡기지 않는 처벌이 내려진다. 그것이 보통 말하는 ‘사회적 매장’이다. 이 처벌의 청소년기 버젼은 ‘왕따’이고 말이다. 군대에서 교범대로만 행동하려는 사람들, 회사에서 규정대로 하려는 사람들, 상대방의 말을 곧이 곧대로만 믿으려는 사람들이 겪는 고초들은 모두 이 대본을 숙지하지 못했거나 대본 노출 금지의 규칙을 따르지 못함에서 기인한다.
연극의 대본은 배우들의 실체와는 조금씩 다르다. 그러니까 공연이라고 하는 것이겠지만, 사회생활을 하면서 많은 경우에 무대에서 공연하는 내용과 무대 뒤에서 오가는 내용이 다르다는 사실은 분명히 확인되었다. 이것을 표리부동, 위선, 가식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사회생활이라는 공연이 꼭 그렇게 비위 상하는 모양새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보통 어떤 사회에서 근본 전제로 삼고 있는 사실들, 그 사회의 가치와 선호 같은 것들이 모두 이 무대 뒤의 논리들이다. 우리 사회에서 누구는 그것을 코드라고도 부르고, 누구는 그것을 국민정서라고도 한다.
자기 연출 개념의 탄생
무대 뒤 대본을 숙지해야 하는 더 중요한 이유는 바로 무대에서의 공연내용에 따라서 나에 대한 평가가 내려진다는 사실 때문이다. 관객들과 공모자들이 내 공연을 보고 평가한 결과가 바로 내 객관적 정체성(Me myself)이다. 이것은 보통 실제 내가 스스로 생각하는 나(주관적 정체성, I myself)와는 다르다. 하지만 이 객관적 정체성은 내 주관적 정체성을 포함한 내 존재에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한다.
가장 극단적인 예는 낙인효과(Stigma effect)이다. 낙인은 어떤 집단(고프만 식으로 말해서 어떤 무대와 공모자들)에서 한 구성원에게 강제로 부여하는 역할이다. 일단 이런 식으로 한번 배역이 주어지면 그 배역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이 낙인효과의 힘은 정말 대단하다.
1973년에 데이빗 로젠한이 실시했던, 멀쩡한 사람들에게 정신병자 흉내를 내고 정신병원에 입원하도록 한 실험을 생각해보자. 실험참가자들이 훌륭하게 정신과 질환을 흉내낸 덕분에 그들은 모두 정신병 환자로 진단받았다. 입원 후, 이 피험자들은 자신이 거짓으로 증상을 흉내냈으며 사실은 멀쩡한 사람이라고 밝히고 퇴원하려고 했다. 하지만 병원에서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의 말과 행동은 모두 정신과 질환의 일부로 진단되었다. 쉽게 말해서 정신병자가 정상인 척 흉내내는 것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똑같은 예는 여기저기에 있다. 한번 범죄를 저지르면 그 다음에는 전과자라는 낙인이 주어져서 정상적인 생활을 하는데 방해가 된다. 냉전시대에는 한번 빨갱이로 낙인찍히면 무슨 짓을 해도 결국 더 교활한 빨갱이가 될 뿐이었고 말이다. 낙인효과가 긍정적인 방향으로 작동하면 보통 피그말리온 효과(Pygmalion effect)라고 말하는 결과가 되기도 한다. 즉 어떤 집단에서 리더로 키워지면 (바보 천치가 아닌 이상) 리더 역할을 한다.
인터넷에서의 자기 연출 시대에 이것은 단순히 운 없는 일부 사람들만의 이야기만이 아니다. 귤이 회수를 건너서 탱자가 되는 이미지의 변환 역시 바로 이 과정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그의 이론을 받아들여 1974년에 슈나이더(Mark Snyder)라는 심리학자가 자기 연출(Self monitoring)이라는 개념을 발전시켰다.
덧
모든 종류의 소위 ‘엑스파일’이 일으키는 파문의 원인은 그것이 새로운 사실을 드러내서가 아니다. 바로 무대 뒤에서 왔다갔다 해야 하는 대본을 무대 전면에 던져넣었기 때문에 벌어지는 것이다. 모두들 지적했듯, 그 내용은 항간에 돌아다니는 소문과 카더라 통신의 집대성이다.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무대 전면에서는 그걸 드러내지 않아야 했다. 그게 공연의 규칙이었다. 누군가 그 규칙을 어기면서 무대에 혼란이 벌어진 것이다.
원문: 싸이코짱가의 쪽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