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부딪히는 심리 문제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정서적 장애와 인지적 장애이다. 둘은 많은 경우에 함께 일어나고 때론 각각 일어난다.
- 정서적 장애: 주로 관계나 상황에서 ‘감정, 정서적으로 온 충격’이 심리(혹은 뇌)에 상흔을 남겨 그 사건이나 상황 후에도 계속 내부에서 영향을 주는 것이다. ‘감정 장애’라 할 수 있다. 즉 과거에 경험한 불쾌한 일이나 슬펐거나 충격적인 일이 남긴 감정적 충격이 그 후에 계속 뇌리에 남아 일상에서 문득문득 재경험되며 부정적 영향을 주는 것이다. 정서만이 아니라 몸의 느낌도 포함된다.
- 인지적 장애: 인지적 오류나 장애로 만들어지는 문제다. ‘생각 장애’ 혹은 ‘이해 장애’라 할 수 있다. 이것은 단독으로 일어난다기 보다는 앞서 말한 정서적, 오감적 충격과 경험에 수반되어 일어나는 경우가 많은데, 또한 순수하게 인지적인 오류 자체로 일어나는 경우도 있다. 간단히 말하면 ‘잘못된 생각’으로 힘들어하는 것이다. 우리는 보통 자기 생각이 잘못되어도 객관적으로 잘 보질 못하고 또 자기 생각을 잘 바꾸지 못한다. 이유는 생각을 ‘단지 생각’이 아닌 ‘나 자신’과 동일시하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두 번째 경우를 세밀히 살펴볼 것이다. 이것을 지칭하는 말로 ‘시나리오 장애’라는 말을 사용해본다. 다른 말로는 ‘각본 장애’라고 할 수도 있겠다. 즉 인간의 모든 관계와 세상이 돌아가는 것에 대해 우리 각자가 가지는 자기만의 혹은 집단과 사회적인 ‘잘못된 시나리오’에 의해 발생하는 장애다.
세상이 돌아가고 존재하는 것에 대한 나름의 시나리오를 가지는 자체는 결코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능동적으로 가장 적절하고 지혜로운 나름의 시나리오를 잘 구축하며 살아야 한다. 사실은 아주 효율적인 도구이다. 다만 ‘잘못된 시나리오’의 구축 혹은 시나리오의 ‘잘못된 사용’이 우리를 힘들게 할 수 있으므로 그것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가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나리오는 단지 시나리오일 뿐’임을 선명히 알아채는 게 우선이다.
삶의 시나리오
우리 모두는 세상이 돌아가는 것에 대한 자기 나름의 시나리오대로 산다. 개인 시나리오, 가족 시나리오, 공동체 등 집단 시나리오, 인류 전체의 시나리오 식으로 다양하게 존재한다. 어떤 시나리오든 절대적으로 옳은 시나리오는 없다. 다만 상대적으로 조금 더 적절한 그리고 반대로 덜 적절한 시나리오가 있을 뿐이다. 또한 다수가 공통으로 가지는 시나리오이냐 일부나 개인만 가지는 시나리오이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 마저도 상대적으로 변할 가능성은 항상 열려 있다.
중요한 것은 끊임없이 움직이는 관계와 연결 속에서 최적의 시나리오를 능동적이고 가변적으로 찾아가는 것이다. 어떤 시나리오든 잘 구축하고 선택하되, 절대화할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나름대로 파악된 시나리오를 소흘히 할 필요도 없다. 다만 가장 지혜롭고 적절하게 사용해야 할 뿐이다.
부모와 타인과 세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모든 시나리오는 엄격히 말하면 ‘사실’이 아니라 하나의 ‘신화’다. 물려받은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만들어지는 나 자신의 시나리오도 또 하나의 신화임은 동일하다. 개인적 시나리오와 집단적 시나리오가 모두가 그러하다. 단, 신화이되 상대적 차이는 있다. ‘어느 선까지는 유용하고 필요한’ 신화 즉 시나리오가 있고 ‘비교적 무용하며 불필요한’ 신화 즉 시나리오가 있다.
따라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다음과 같다. 타인과 나, 개인과 집단의 시나리오를 잘 조화하되, 불필요한 신화적 요소들은 계속 눈치채며 버려 나가기, 수정해 나가기. 그리고 자신과 세상을 위한 좀 더 조화롭고 진화된 시나리오를 계속 만들고 활용하기. 물론 그렇게 만든 어떤 시나리오도 언제든 수정과 버림이 가능하다. 최상의 시나리오는 ‘그때’에 가장 적절하면서도, 언제든 다음의 더 적절한 시나리오로 변할 수 있는 것이다.
시나리오 장애
‘시나리오 장애’ 혹은 ‘각본 장애’라는 개념은 기존 심리학 일부에서 사용되었던 것이기도 한데, 여기서는 그 개념만 빌려오고 필자 나름의 관점으로 접근하고자 한다.
시나리오 장애에 대해 일반적인 설명은 다음과 같다. 시작은 대략 한국 사회의 초등학생 시기에 해당하는 7세에서 11세 정도의 시기다(물론 그 이후에도, 심지어 성인이 되어서도 계속 발생할 수 있다). 이 시기에 아이(우리 자신)에게 일어나는 가장 큰 변화는 무엇이 있을까?
우선은 ‘언어적 영향’이다. 이 시기부터 각본, 즉 자신의 행동이나 역할을 규정하는 ‘언어적 규칙’에 지배를 받는다. 물론 그 전에도 언어의 영향을 받고 사용하지만 상대적으로 추상적이고 또 정교하지 못하다. 이 시기에는 아주 ‘구체적’이고 ‘조작적’으로 행해지는 것이다(피아제 인지발달 이론에서의 구체적 조작 단계). 여러 규칙에 따른 조작적 사유, 예를 들어 수학의 여러 개념과 연산, 사회적 혹은 윤리적 규칙 등을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또 다른 변화로는 ‘타인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역할도 수행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있다. 그 전까지는 ‘자기 자신’에게만 쏠려 있던 의식적 관심이 이제 외부로 향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즉 타인과 세상을 살피기 시작하고 규칙적인 혹은 일정한 시나리오로 돌아가는 세상의 구성원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외부의 시나리오’를 접하고 받아들이면서 이제 자기도 스스로 세상이 돌아가는 것에 대한 나름의 각본 즉 시나리오를 구체적으로 만들기 시작한다. 즉 나름대로 세상을 파악하는 것이다. 이러한 시나리오의 구축은 아주 유용한 기능이다. 왜냐하면 잘 파악된 시나리오는 자신이 타인과 세상과 맺는 관계와 반응을 좀 더 효율적으로 행하게 도와주기 때문이다. 이미 시나리오가 (제대로) 파악된 상황들은 좀 더 쉽게 임하는 게 가능하다.
문제는 이러한 시나리오가 잘못 만들어질 때이다. 그리고 이미 만들어진 시나리오를 잘못 사용하는 때이다. 이것을 통칭해서 ‘시나리오 장애’라 해 보자. 그리고 이 시나리오 장애는 두 영역으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병증의 시나리오 장애’이고 또 하나는 ‘일상의 시나리오 장애’이다. 아래에서 두 가지를 좀 더 깊이 다루어 보고 또 그 대응책과 해결책을 함께 보도록 하자.
첫째, 외부에서 주어지는 부정적 신화들
위에서 말한 시기에 우리가 받아들이는 시나리오는 부모와 사회로부터 온다. 그리고 아이인 우리는 그것에 대한 가부를 아직 선명히 판단할 능력이 없기에 거의 ‘그대로’ 받아들인다. 문제는, 그렇게 외부로부터 오는 각본들은 ‘진실 자체’가 아니라는 데 있다. 어떻게 보면 부모들만의 혹은 외부만의 ‘신화’에 불과하다. 그 시나리오들 역시 그들에 의해 만들어졌을 뿐이다. 내가 만들 듯이 말이다.
앞서도 이야기했지만 어린 우리는 그것을 엄밀하게 판정하거나 거르고 수정할 능력이 아직 없다. 그래서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사실 이게 가장 큰 문제다. 그리고 단지 하나의 신화 혹은 시나리오일 뿐임에도 우리는 그것을 ‘절대적 사실 혹은 진실’로 받아들인다.
나이가 들고 경험치가 쌓이면서 자신만의 판단력과 사유의 힘이 커지며 기존에 받아들인 시나리오들을 수정하거나 폐기하거나 발전시키게 되지만, 많은 경우 타인의 시나리오 즉 하나의 신화에 불과했던 그것들이 그대로 ‘나의 절대적 시나리오’가 되어 버리기도 한다.
물론 이것도 우리가 세상에 대한 시나리오를 구축해 가는 효율적인 방법의 하나이다. 그 시나리오들이 어느 정도 이상 타당성과 효율성이 있다면 말이다. 문제는 그렇지 않은 경우이다. 우리가 자신도 모르게 무비판적으로 ‘세상에 대한 정확한 사실’라고 받아들이고 믿어버린 그것이 사실은 부모나 특정인들 혹은 사회의 ‘잘못된 시나리오’일 때, 특히 그 왜곡과 오류의 정도가 심할수록 우리는 더 고통스러워진다.
가장 흔한 예로, 어릴 때부터 부모로부터 부정적 영향을 많이 받은 아이의 경우가 있을 수 있다. 그 부모의 잘못된 시나리오에 의해 아이는 계속 ‘못난 아이, 나쁜 아이, 부족한 아이, 게으른 아이, 존재해서는 안 되는 아이, 태어나서는 안 되었던 아이, 어쩔 수 없는 아이, 아무 것도 못될 아이’등의 자아상을 주입받는다. 자신이 행하는 행동들에 대해서도 계속 부정적 반응이 온다. 또한 세상에 대해서도 왜곡된 해석과 관점을 계속 주입받는다.
아이는, 거기에 순응하기도 하고 혹은 반항하기도 어떤 경우이든 그 시나리오들은 아이의 의식 속으로 잠입되고 사실상 ‘학습’된다. 어떤 측면에서는 ‘세뇌’이기도 한데 앞에서 말한 무비판성 때문이다. 당시에는 그것을 막을 의식적 힘이 없기 때문이다. 받아들여야 하는 때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아이가 그런 부정적인 것들을 확실히 싫어하는 경우에조차 자기도 모르게 그 시나리오들을 믿기 시작한다. 이런 구조는 당사자를 상당히 고통스러게 한다. 왜냐하면 자신은 의식적으로 그 부정적 시나리오를 분명 싫어하고 거부함에도 불구하고 자신도 모르게 그것에 점령당하고 휘말리게 되기 때문이다. 일종의 모순 상황이 되는 것이다.
부모만이 아니라 학교의 선생들, 주위의 어른들, 또래 친구들 등도 그런 부정적 역할을 할 수 있다. 보통은 장기적이거나 강한 자극이 계속되면서 일어나기도 하지만 때로는 지나가면서 어린 나에게 툭 던져진 부정적 시나리오 한 가락이 평생 나의 뇌리를 장악하기도 한다. 모두가 그런 경험들이 있을 것이다.
사람만이 아니라 사회와 그 문화도 부정적이고 왜곡된 시나리오 즉 신화를 주입하는 역할을 한다. 그것은 어떤 집단적 혹은 사회적 관습이 될 수가 있고, 종교적 교리가 될 수도 있고, 문화적 관습이 될 수도 있고, 그 시대와 지역의 특정 사고방식이 될 수도 있다. 사실 한 사회에 존재하는 많은 편견, 차별, 혐오와 불합리하고 비이성적인 관습이 모두 이에 해당되기도 한다. 이런 경우는 일종의 ‘집단적 오류의 시나리오’가 되겠다. 시나리오가 모두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든 집단이든 상대적으로 왜곡되고 오류인 내용들이 있다는 말이다.
가령 한국 사회에는 한국 사회 나름의 집단적 오류 시나리오가 있다. 안에서는 그게 오히려 상식인 듯하고 횡행하지만 조금만 성숙한 다른 사회에 가면 그들도 과거에 거쳤던, 그리고 이제는 벗어난 미성숙한 신화들이라 할 수 있다. 대표적인 것이 나이 차이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문화, 사회 여러 영역에 여전히 존재하는 군대 문화, 여전히 강력한 남녀 성별의 차별, 개인 간에 존재하는 지나친 침해, 부모와 친척들의 과도한 간섭, 장애인과 성소수자 등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차별 의식 등이다. 물론 한국만이 아니라 어느 사회든 이러한 미성숙한 시나리오와 성숙한 시나리오를 사회 발전 정도에 따라 다양하게 품고 있다.
둘째, 나 스스로 만드는 부정적 신화들
그런데 이렇게 외부에서 주입된 시나리오들만이 문제가 아니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그렇게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우리 자신이 또 ‘병증의 혹은 오류의 시나리오’를 만드는 것도 문제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외부로부터 받아들인 시나리오가 그렇게 되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에 바탕해서 내가 스스로 만들게 되는 시나리오다. 두 가지는 서로 연관성을 가지기도 하고 따로 존재하기도 한다.
아이였던 그리고 더 자라서 어른이 된 현재의 우리가 ‘스스로’ 가지는 모든 부정적이거나 오류인 자기상과 세계관, 가치관과 상황판단 등이 이에 해당된다. 처음 시작은 외부에서 받아들인 것이지만 어느 순간 이후부터는 ‘내 것’이 되어버린 것이다. 문제는, 내가 가진 시나리오가 뭔가 잘 맞지 않는 것 같고 부족한 것 같지만 내가 여전히 그것을 고집하고 고수하게 될 때다. 여기엔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 하나는’내가 가진 시나리오는 내가 최선을 다해 만든 것이므로 맞는 것이다’라는 믿음이다.
또 다른 이유는 ‘내 시나리오는 곧 나 자신이다’는 동일시 관념이다. 즉 잘못된 시나리오임에도 그것과 나를 무의식적으로 동일시해 버렸기에, 시나리오를 부정하는 것은 나를 부정하는 것이라 여기게 된다. 그래서 ‘나’를 지키기 위해 잘못된 시나리오를 지키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아이러니하게 실제로는 지키는 게 아니라 나를 해치게 됨에도 말이다.
예를 들어 자신에 대해서 부정적 자아상을 가지고 있거나 세상에 대해서 불필요한 부정적 관점 등을 가진 이가 있을 때, 그가 그 때문에 힘들고 괴로워하므로 친구나 지인이 도움말을 주고자 하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아니야, 너 괜찮은 사람이야, 멋진 사람이야” 혹은 “이 상황은 이러저러하게 괜찮아”는 식으로 좀 더 바람직한 시나리오를 주려 하지만 오히려 본인은 받이들이지 않고 부정한다(겉으로 볼 때는, 부정할 수도 있고 받아들이는 척할 수도 있다). 부정적 상황이나 현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경우는 상식적으로 보면 이상하지만 그 기제를 알면 이해가 된다. 즉, 본인을 괴롭히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부정적 시나리오이지만 그 시나리오가 이미 ‘나의 시나리오’가 되었기 때문에 그리고 그것과 자신을 동일시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 시나리오가 ‘맞다’고 여기고 믿기 때문에 본인은 그걸 고수하고 고집하게 되는 기제다. 실제 맞는 게 아니라 단지 ‘익숙할 뿐’인데 ‘익숙한 것이 곧 옳은 것’이라는 오류로 그렇게 여기는 것이다.
사람은 어떤 식이든 자기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세상을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시나리오를 필요로 한다. 그래서 다른 시나리오로 바꾸지 않는 한 기존의 것을 계속 의지하게 될 수밖에 없다. 즉 그 시나리오가 정확하거나 좋아서가 아니라 ‘어쨌든 우리는 시나리오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기존 시나리오대로 나와 세상을 보는 것이다. 그러나 본질적으론 특정 시나리오가 있든 없든 우리는 아무 문제 없이 존재할 수 있다.
시나리오는 도구일 뿐이지 우리의 존재성을 좌우하진 않는다. 상황에 대한 시나리오 장애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일상에서 수많은 상황을 맞이한다.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도 여기에 포함된다. 그러한 상황과 관계에 대한 해석에 잘못된 시나리오 혹은 비효율적인 시나리오를 적용하는 경우이다. 진행되는 흐름에 대한 파악이 잘못되는 경우이다. 본래 존재하는 시나리오는 그게 아닌데 내가 가진 것으로 적용하고 해석하는 것이다. 그런데 내 시나리오가 본래 시나리오와 멀면 멀수록 병증은 깊어지며, 당연히 과정과 결과도 잘못될 수밖에 없다.
병증의 시나리오 장애에 대한 해결책
모든 시나리오가 병증은 아니다. 하지만 ‘병증인 시나리오’는 존재한다. 즉 오류가 큰 시나리오이다. 사실이 아닌 자기만의 신화적 성격이 강한 경우이다. 자신의 잘못된 시나리오를 고수하고 고집하는 것은, 나에게 당장의 심리적 안정과 만족감을 줄진 모르지만 결국엔 고통과 손해를 끼친다. 관계와 상황을 어렵게 만들고 비효율적이게 만든다.
다른 누구가 아닌 나 자신을 위해서, 나의 이익을 위해서 우리는 잘못된 시나리오의 문제를 최대한 해결해야 한다. 어떤 생각과 방법들이 도움이 될까? 앞서 썼던 내용들을 정리하면 곧 그 방법들이 된다.
1. 시나리오는 시나리오일 뿐이다.
나와 타인들이 세상에 대해 만든 시나리오는 각본이다. 즉 ‘절대 사실’이 아니다. 그렇다고 ‘허구’라는 말도 아니다. 사실이냐 허구이냐를 따질 것 없다. 시나리오는 그냥 시나리오일 뿐임을 알면 된다. 시나리오는 우리가 삶을 더욱 유용하고 효율적으로 살아가기 위해 만들고 사용하는 도구이다. 우리가 할 일은 시나리오를 만드느냐 아니냐가 아니라 ‘잘 만들고, 잘 사용’하는 것이다. ‘나’는 시나리오대로 사는 존재가 아니다. 내가 시나리오를 만들고 고치는 주체이다.
2. 시나리오와 나를 동일시하지 않는다.
세상에 대한 나의 시나리오는, 나와 타인과 관계와 세상이 돌아가는 것에 대한 나의 고유한 ‘해석’이다. 내가 만들었고 내가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 시나리오가 ‘나’는 아니다. 나는 시나리오 따위로 제한되거나 한정되는 그런 하찮은 존재가 아니다. 그것을 품으며 그 너머에 있는 존재이다.
시나리오와 나를 동일시하겠다는 것은 마치 세상 전체를 책 한 권과 동일시하겠다는 것과 같다. 비효율적이며 바보 같은 짓이다. ‘나’는 내가 가진 혹은 타인들이 가진 몇몇 시나리오 따위가 아니다. 그 시나리오들은 그것들대로 인정해 주자. 그러나 그것과 나를 동일시하진 말자. ‘전부’로 여기지 말고 ‘절대’로 여기지 말자.
3. 주입된 외부 신화 시나리오들을 구분한다.
내가 스스로 만든 내 안의 시나리오라면 그나마 대접할 의의가 있다. 그러나 내가 만든 것도 아닌 단지 외부에서 주입된 신화에 불과한 것들을 나의 시나리오로 여기는 것은 바보짓이다. 내 것도 지금 절대화, 전부화 하지 않으려 하는데 하물려 바깥의 것들이야 말할 것도 없다. 더더구나 그건 ‘그들의 신화’가 아닌가 말이다.
내가 왜 타인들의 신화 따위에 흔들리고 갇힐 것인가. 그럴 필요 없다. 그들은 자신들의 신화 속에 갇혀 살라고 하자. 그들의 몫이다. 나는? 나는 불필요한 타인과 세상의 신화, 시나리오 속에 들어갈 필요가 전혀 없다. 물론 사회생활을 하고 관계를 맺다 보면 어쩔 수 없이 타인과 사회의 말도 안 되는 시나리오에 응하거나 연관될 때도 있긴 있다. 그럴 때 조차도 겉으로는 사회적 의무를 다하기 위해 어느 정도 선까지는 응해주든 혹은 반대하든 상관 없이 내 마음속에서는 그 신화적 시나리오를 완전히 인정하거나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4. 나의 시나리오 중 신화적 시나리오를 꾸준히 버리고 수정한다.
남의 시나리오만이 아니라 나의 신화적 시나리오도 꾸준히 버릴 건 버리고 수정할 건 수정해 나가자. 나 자신을 위해서. 본래 처음 만들어진 시나리오도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처음 만들어졌다고 해서 더 절대적이거나 더 정확하거나 더 중요한 것이 결코 아니다. 그냥 ‘처음에, 초기에’ 만들어진 것일 뿐이다. 우리가 사람을 만나는데 그를 먼저 만났다고 해서 그가 무조건 그 후에 만나는 사람들보다 더 귀하고, 더 중요한가? 아니다, 말도 안 된다. 그렇다면 시나리오도 마찬가지다.
물론 이상 네 가지만이 ‘병증의 시나리오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들은 아니다. 각자의 지혜에 의해 얼마든지 다른, 더 좋은 해결책들을 만들어 낼 수 있다. 그러면 또 그 새로운 방법들도 사용하자.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의 행복’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좀 더 정확하고, 정밀하고, 성숙한 시나리오를 만들어 사용하면 타인과 세상도 좀 더 행복해지게 되어 있다.
일상의 시나리오 장애와 그 해결
일상의 시나리오 장애는, 앞서 말한 병증의 시나리오 장애와 본질적으로 다르진 않다. 다른 건 ‘정도(degree)’라 할 수 있다. 즉 그 변형, 오류, 착각의 정도가 어느 선이 이상으로 심하면 병증의 장애가 되고 아니면 그냥 소소한 일상의 장애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오히려 일상에서의 소소한 시나리오 장애로도 어려움을 곧잘 겪곤 한다. 나 스스로의 사소한 오류, 부부나 가족이나 동료 사이의 소소한 충돌, 사회 생활을 함에 있어서 경험하는 작은 어긋남 등이 그것이다.
완전한 시나리오는 없다. 조금 더 적절하고 능숙하고 적합한 것이 있을 뿐이다. 나의 시나리오가 꼭 완벽해야만 하는 게 아니다. 조금 어긋나거나 착오가 있어도 괜찮다. 그게 정상이다. 사실 누구의 것이든, 어느 것이든 절대적 시나리오는 없으며, 나만이 아니라 모두가 각각의 시나리오를 만들어 사용해 가되 어느 것이든 소소한 오류나 착각은 있는 게 정상이다. 오히려 이렇게 알고 이런 마음으로 사는 것이 더 자연스럽고 정신 건강에도 좋으며 삶을 더 유연하고 풍요롭게 사는 비결이기도 하다.
그런 와중에도 내가 필요하면 나의 시나리오를 좀 더 효율적이고 효과적이고 실용적이게 만들 수 있다. 못할 것 무엇인가. 안 할 것도 없다. 다만, 그런 소소한 차이나 다름을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는 않고 말이다. 뭐 좀 다르다고 해서 큰 일 나는 것도 아니다. 사실 우리의 시나리오는 서로 다 다르다. 같은 게 오히려 이상한 것이다.
만약 내 일상의 시나리오 중에 좀 멈추거나, 버리거나, 고칠 것이 있다면 그러면 그렇게 하자. 일상의 경우도 위 병증의 시나리오 장애의 해결책으로 제시된 4가지 해결책을 적용하는 부분은 동일하다. 그렇게 일상에서도 좀 더 유연하고 성숙한 삶의 시나리오를 사용하고 또 계속 만들어 가자.
원문: 필로 이경희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