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업에서 발표 한 번 망했다고 “내 인생은 이제 망했어. 아무도 이런 나를 채용하려 하지 않겠지”라며 난리법석이었던 사람을 본 적이 있었다. 발표뿐 아니라 작은 실수 하나에도 삶이 끝장난 것처럼 쉽게 좌절하고 기분이 오락가락하던 사람이었다.
이런 사람이 있는 반면 중요한 일에서 크게 미끄러지고 난 후에도 ‘그럴 수도 있지 뭐’, ‘다음에 더 잘 하면 돼’라며 잘 넘어가는 사람들도 있다. 왜 어떤 사람들은 작은 일에도 쉽게 좌절하는 반면 어떤 사람들은 덤덤하게 넘어갈 수 있는 걸까? 소위 ‘멘탈이 강하다’고도 하는 이들의 비결은 도대체 뭘까?
이런 질문을 던지면 사람들은 흔히 ‘자존감’을 떠올린다. 자존감이 높은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좌절을 덜 하고 자신에게도 너그러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는 어느 정도 맞는 말이다. 하지만 또 어느 정도는 틀린 말이기도 하다.
자존감이란
앞서 간간히 언급하기도 했지만, 우선 자존감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조금 짚고 넘어가도록 하자. 평소에 자존감이 낮아서 문제인 것 같다는 상담을 종종 듣기도 한다. 어떻게 하면 자존감을 높을 수 있겠냐는 질문도 자주 받는다. 많은 사람의 고민이 되는 이 자존감은 도대체 무엇일까? 자존감은 높을수록 반드시 좋을까?
자존감이란 무엇일까? 일반적으로 심리학에서 정의하는 자존감이란 ‘긍정적인 자기지각’이다. 내가 나 자신을 가치 있는 사람으로 여기는지에 대한 것이다. ‘근거 없는 자존감’이라는 말이 유행했는데, 사실 어폐가 있는 게 원래 자존감이라는 게 보통 별로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자존감은 그냥 내가 ‘주관적’으로 판단하는 것으로, 연구에 의하면 각종 능력이나 성취 수준 등과 큰 상관이 없다. 공부도 잘 하고 운동도 잘 하지만 “그치만 나는 내가 싫어”라고 할 수 있고, 반대로 크게 내세울 건 없지만 “그래도 나는 내가 좋아”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흔히들 이 자존감이 ‘높을수록’ 좋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존감을 높이는 방법도 많이 찾는다. 하지만 중요한 사실은 자존감이 높다고 해서 꼭 좋은 게 아니라는 것이다.
자존감에 대한 오해
심리학자 바우마이스터는 자존감이 만능키가 아님을 강조한다. 자존감을 실제로 높이는 처치를 했을 때 수행 성과가 좋아졌다거나 실제 어떤 유익이 있었음이 확인된 바가 별로 없음을 지적하기도 했다. 또한 리어리 등의 학자들은 자존감이란 ‘원인’이라기보다 이미 (주관적으로) 즐겁고 만족스럽게 잘 살고 있는 삶의 ‘결과’에 가깝다고 이야기한다. 자존감이 문제라고 느낀다면 자존감 자체보다 그 ‘인생’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자존감에 확실한 효능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뿐만 아니라 ‘높은’ 자존감을 유지하는 데에는 상당한 비용(예컨대 그만큼 많은 주위의 인정을 바라는 등)이 들어간다는 점도 지적되곤 한다. 이런 맥락에서 심리학자 크로커는 자존감의 높낮이보다 자존감의 ‘안정성(단단함)’, 자존감의 원천과 유지 방식이 훨씬 중요하다고 이야기 한다.
일례로 높지만 건강하지 않은 자존감의 예들을 살펴보자. 자존감이 높아도 주변의 인정을 통해서만 자신에게 만족할 수 있는 등 자존감의 원천이 지나치게 ‘외부’에 있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이 경우 나가는 사람의 말 한 마디에 자존감이 솟아올랐다 추락하는 등 자존감이 불안할 수 밖에 없다.
이런 사람들은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만들기도 한다. 심리학자 크로커의 연구에 의하면 주위 사람들에게 쉽게 화를 내거나 공격적인 태도를 보이는 사람들은 자존감이 낮은 사람이 아니라 자존감이 ‘불안한’ 사람이었다. 자존감이 낮지만 안정적인 사람이 자존감이 높지만 불안정한 사람보다 적은 공격성을 보였다. 높고 불안한 자존감보단 낮고 안정적인 자존감이 차라리 더 나을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바우마이스터 등의 연구에 의하면 가정폭력범을 포함 타인에게 폭력적이거나 갑질하기 좋아하는 사람들도 자존감이 낮기보다(자신이 진심으로 가치 없는 인간이라고 여기기보다), 자신은 분명 엄청난 사람인데(이건 기정사실) 자신의 대단함을 충분히 ‘받들어’주지 않는 주변 인간들이 나쁜 거라고 생각하는 경향을 보인다. 추구하는 방법도 이상하고 연약하고 무너지기 쉬운 자존감이긴 하지만, 스스로를 보통 이상으로 대단하게 여기는 등 높낮이를 따지면 분명 ‘높은’ 자존감이다.
이렇게 모래 위에 높이 쌓은 자존감들은 늘 불안하며 높더라도 별로 좋을 게 못 된다. 좌절을 맞이했을 때 매우 쉽게 꺾이며, 꺾였을 때의 모습 또한 보기 좋지 않다. 불안하고 높은 자존감을 지키려 조금이라도 누군가 자신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불같이 화를 내는 등 매우 ‘방어적’인 모습을 보이게 되기도 한다.
자존감의 높낮이 < 자존감의 원천과 안정성
따라서 앞서 살짝 언급했지만 학자들은 자존감의 높낮이보다 자존감을 ‘건강하게’ 추구하고 있는가의 여부가 훨씬 중요하다고 이야기 한다. 예컨대 굳이 누구랑 비교해서 우월감을 느끼지 않아도, 또는 애써 합리화하지 않아도 스스로의 삶에 만족할 수 있게 살고 있게 되는 것 말이다. 무엇보다 실제로 즐거운 일을 하고 있는가, 좋은 친구들이 있는가의 여부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또한 자존감 이전에 자신에 대해 ‘현실적인 기대’를 갖는 게 우선이다. 만약 완벽주의자의 경우처럼 1등이 아니면, 뭐든지 한 방에 해내지 못하면 나는 쓰레기라는 말도 안 되는 기준을 갖고 있다면 (사회가 이런 기준을 들이밀 때도 역시) 어떻게 해도 ‘건강한’ 자존감을 갖긴 어렵다.
삶에 대한 겸손, 즉 삶이 항상 내 뜻대로 되는 건 아니며 그래도 괜찮다고 여길 줄 아는 것, 내가 늘 대단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할 줄 아는 것 또한 중요하다. 이런 겸허한 태도는 앞서 언급한 지혜로운 사람들의 특징이다. ‘성숙’해지기 위한 출발점으로 불리기도 하며 자존감을 이야기 하기 이전에 우선 살펴봐야 하는 부분이다.
정리하면,
- 자존감이 낮아서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이 어쩌면 자존감 자체의 문제가 아닐 수 있다.
- 그보다 자신에게 지나치게 높은 기준을 들이밀거나 과도한 통제욕을 갖고 있는 건 아닌지,
- 가만히 있어도 내 삶이 좋을 수밖에 없는 재미 요소들이 나의 생활 속에 있는지, 나는 어떤 무엇을 통해(남들과의 비교? 다른 사람에 대한 험담?) 주로 뿌듯함을 느끼는지 등을 먼저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 계속해서 자존감 때문에 고민이라면 먼저 삶에 대한 기준과 태도들부터 점검해 보는 것도 좋다.
우리는 모두 불완전한 인간
다시 너그러워지는 것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와보자. 텍사스 대학의 심리학자 Neff와 동료들은 사람마다 타인을 향해 이해심 있고 너그럽게 대하는 정도가 다 다르듯, ‘자신’을 향해서도 너그러운 정도 또한 사람마다 다르다는 점을 확인했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심하게 굴지 않을 거면서 유독 자신의 실수에 대해 ‘어쩜 그렇게 못난 짓을’, ‘넌 이제 끝났어’라며 스스로에게 강한 비판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너도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하나의 불완전한 인간일 뿐. 모두가 그렇듯 너도 얼마든지 실수할 수 있고 그건 자연스러운 일이야. 괜찮아’라며 스스로를 다독일 줄 아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연구자들은 이 너그러움이 삶의 좌절을 성공적으로 견디는 데 중요한 열쇠가 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자신에 대해 친절하고 너그러운 사람들, 즉 자신도 인간임을 인정, 자신의 단점들에 대해 깊은 이해심을 보이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같은 실패를 겪어도 훨씬 잘 견뎌내는 경향을 보였다. 같은 좌절을 겪어도 자신에 대해 너그러울 줄 아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부정적 정서를 덜 느끼고 더 빨리 극복했다.
한 가지 더 흥미로운 사실은 자신에 대해 너그러워지는 것이 여기저기서 중요하게 강조되는 ‘높은 자존감’보다도 좌절을 막는 데 더 효과적이라는 것이다.
자존감보다 너그러움이 중요
앞서 말했듯 자존감은 ‘스스로가 얼마나 멋지고 가치 있다고 느껴지는가’와 관련된 주관적인 판단이다. 자존감이 높은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뿌듯함’, ‘자랑스러움’ 등의 감정을 더 자주 느끼며 자기비하가 덜 하다.
하지만 자존감이 높은 경우 주변의 인정을 포함해서 높은 자존감에 부합하는 ‘증거’들을 끊임없이 갖다 대야 하는 등 유지비가 많이 든다는 이야기를 했다. 자존감이 추락하는 사건이 생기면 그만큼 더 큰 좌절을 맛보게 된다는 단점도 있다. 자존감이 높은 사람들은 어떻게든 자존감의 추락을 막기 위해 실패 시 ‘내 잘못이 아니야’라는 책임 회피나 ‘애초에 그 일은 나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았어’ 같은 각종 합리화 전략을 더 많이 쓰기도 한다. 하지만 자존감은 낮을지언정 자신에 대해 너그러운 사람은 이런 류의 정신승리를 잘 보이지 않는다.
듀크 대학의 심리학자 Leary는 사람들에게 ‘인생 최대 실패’ 같은 걸 떠올리게 하고 스스로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해보라는 등 자존감을 높이는 처치를 하거나(자존감 조건), 애써 자신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보다 자신도 한낱 인간이며 얼마든지 실수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라는 처치(너그러움 조건)를 했다.
그 결과 실패 후 자존감을 높인 사람들은 자신의 프라이드를 방어하는데 급급, 자신의 책임을 부인하는 반면, 자신에 대해 너그러워질 기회를 가진 사람들은 자신의 책임이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전자에 비해 훨씬 부정적 정서를 덜 느끼는 모습을 보였다. “내가 잘못한 게 아니야! 나는 멋진 사람이야! 내가 그랬을리 없어!”라며 도망치기보다 자신의 실패를 바라 보고 “그때는 분명 내가 이런저런 잘못과 실수를 했어. 하지만 괜찮아.”라고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한 발 더 나아가 이들은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는 만큼 자신의 단점을 ‘개선’하겠다는 의지 또한 더 강하게 보였다. 예컨대 성적이 낮게 나왔을 경우 자존감을 높이는 처치를 한 사람들은 ‘나는 똑똑한 사람이야. 고로 내가 못한 게 아니라 시험문제가 유독 어려웠던 거야’ 같은 생각을 통해 위안을 얻고 넘어가는 반면, 자신에 대해 너그럽게 생각해본 사람들은 ‘누구나 미끄러질 수 있어. 다음에는 더 잘 하면 되지’라며 실제로 더 오랜 시간 공부하는 모습을 보였다. “실패했어. 하지만 괜찮아. 다시 하면 돼”라는 게 이들의 사고방식 이었다.
흔히 생각하는 것과 다르게 스스로를 심하게 몰아붙이고 채찍질하는 것보다, 또는 덮어놓고 나는 멋진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보다 자신에 대해 깊은 이해심을 발휘할 줄 아는 것, 모두 그렇듯 자신도 인간이기에 완벽할 수 없다는 걸 인정하는 ‘현실적인 자기인식’을 갖는 것이 정신건강을 지켜주면서 자기발전적인 행동을 할 수 있게 도와준다는 것이다.
겸손
정확한 자기인식은 사실 ‘겸손’과도 맞닿아있는 것 같다. 앞서도 말했지만 사실 우리가 뭐 그렇게 위대하고 대단한 존재라고 늘 성공만 하는 게 당연하다며 그러지 못하면 ‘못난 나’라고 실망하나 싶기도 하다. 생기는 게 당연한 자잘한 실패에 늘 좌절하는 거야 말로 비현실적인 자기인식이자 엄청난 ‘오만’이 아닐까?’
한 가지 더 중요한 사실로 자신에 대해 너그러울 줄 아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타인에게도’ 너그러운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자신에게 너그러울수록 타인에게도 더 좋은 평가를 내리며 심지어 자신에게 적대적인 대상에 대해서도 앙심을 품는 정도가 덜 하다는 연구 결과들이 있었다. 진정한 겸손뿐 아니라 타인을 향한 너그러움 역시 우선 나 자신에 대해 현실적인 기준을 적용하는 것에서부터 온다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인생에서 늘 고군분투하느라 힘들었을 자신과 주변 사람들에게 “당신이나 나나 헛점 많은 인간일 뿐. 내가 때때로 실수하고 다른 사람들을 상처 입힐 수 있는 것처럼 당신도 그렇겠지요. 괜찮습니다.”라는 작은 너그러움을 선사하며 함께 좌절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워져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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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eary, M. R., Tate, E. B., Adams, C. E., Batts Allen, A., & Hancock, J. (2007). Self-compassion and reactions to unpleasant self-relevant events: The implications of treating oneself kindly. Journal of Personality and Social Psychology, 92, 887-9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