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매치 게임과 <비쥬얼드>
태초에 <샤리키>가 있었다…고 한다.
1994년 러시아 개발자가 만든 <샤리키>는 이른바 ‘3매치’ 게임의 조상으로 알려져 있다. 8×8 크기의 판 위에서 같은 색깔의 공을 모아 터뜨리는 퍼즐 게임으로, 3매치 게임의 원형이 대부분 담겨 있다.
이런 류의 게임이 널리 알려지게 된 계기는 <비쥬얼드>의 대히트였다. 미국 팝캡이 2001년 PC용으로 처음 내놓았고, 이후 시리즈를 거듭하며 아이팟, 아이폰, 페이스북 등 다양한 플랫폼에 이식됐다. 그렇다, 비행기 엔터테인먼트 시스템에도 있다.
아시아권에서는 2003년 게임보이 어드밴스용으로 <주키퍼>가 나와, 역시 여러 플랫폼에서 인기를 얻었다. 예전 LG전자 싸이언 휴대폰에 기본으로 탑재되면서 많이 알려지게 되었다.
3매치 게임의 자세한 역사는 게임에 대해 놀라울 정도로 많은 이야기를 전해주는 모크놀 블로그에서 확인할 수 있다.
<비쥬얼드>는 페이스북 소셜 게임과 아이폰 등장에 발맞춰 <비쥬얼드 블리츠>라는 새로운 형태로 재탄생했다. 페이스북이나 휴대폰 사용 중 잠시 즐기는 사용자가 대부분이란 점에 착안했기 때문인지, 1분이라는 플레이 시간제한을 두었다. 시간제한이 없던 기존 비쥬얼드와는 달랐다.
1분이라는 시간 제약을 둠으로써 캐주얼 게이머가(비쥬얼드 자체가 캐주얼 게임이긴 하지만) 자투리 시간에 쉽게 즐길 수 있도록 진입장벽을 낮췄고, 몰입도도 높일 수 있었다. 여기에 페이스북 친구와 점수를 경쟁하고 순위를 매긴다는 소셜 요소를 도입하고, 페이스북과 아이폰에서 결과를 서로 연동했다.
<비쥬얼드>의 성공으로 퍼즐 게임도 경영 시뮬레이션 계통인 <팜빌>, <시티빌> 등 ~빌 시리즈와 함께 소셜/모바일 게임 시장의 주력 장르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애니팡>의 혁신과 성공
<애니팡> 개발사 선데이토즈는 비쥬얼드의 성공 공식을 국내에서 재현하려는 노력을 많이 한 회사였다. 정확히는 소셜 게임의 가능성을 국내에 실현하려 노력했다고 보는 것이 맞을 듯하다. 국내에서 소셜 게임에 대해 가장 많이 고민한 회사가 있다면 선데이토즈는 그중 하나일 것이다.
<애니팡>은 2009년 페이스북 소셜 게임의 국내판이라 할 싸이월드 앱스토어에 처음 등장해 나름대로 성공을 거두었다. 그리고 2012년 ‘카카오 게임하기’에 등장하면서 말 그대로 세상을 바꾸는 대성공을 이뤘다. 카카오톡 소셜 그래프의 힘, 입소문을 극대화하는 하트 주고받기, 게임 플레이 욕구를 자극하는 1분의 플레이 시간제한과 하트 소멸 시스템이 <애니팡>의 대표적인 성공 요인으로 꼽힌다.
<애니팡>은 처음 카카오 게임하기에 등장했을 때부터 표절 논란이 있었다. <비쥬얼드 블리츠>나 우가의 페이스북 게임 <다이아몬드 대쉬>와 비슷하다는 논란이었다.
3매치 방식 퍼즐 맞추기, 1분으로 제한된 플레이 타임, 블록이 터질 때의 화려한 시청각 효과 등 대부분 게임의 구성 요소는 <비쥬얼드 블리츠>에서 가져왔다. 한 판 할 때마다 하트가 사라지고, 일정 시간을 기다려야 다시 생기며, 하트가 떨어지면 플레이할 수 없는 ‘하트 시스템’과 친구끼리 하트를 주고받는 한 걸음 더 나아간 소셜 요소는 <다이아몬드 대쉬>에서 빌려왔다.
하지만 게임 아이디어 자체는 저작권으로 보호하지 않는 것이 법원의 대체적 판결 방향이고, 자체적 동물 캐릭터와 디자인을 가진 애니팡을 표절로 판단하기는 무리가 따랐다. 무엇보다 선데이토즈의 천재성은 <비쥬얼드 블리츠>와 <다이아몬드 대쉬>의 핵심 아이디어 두 가지를 결합할 생각을 했다는 점이고, 선데이토즈의 천운은 그때 마침 <카카오톡>이란 모바일 플랫폼이 있었다는 점이다.
현명한 아이디어와 행운의 결합은 거대한 성공을 가져왔고, 표절 논란은 자연스레 묻혔다. 냉정히 얘기하자면, 세상이 뒤바뀌는 상황에선 대부분의 사안은 사소한 것이 될 수밖에 없다. 카카오톡과 <애니팡>의 시너지는 세계 인터넷/모바일/게임 업계의 주목을 끌었고, 이런 결합은 대세가 되어 라인이나 위챗에도 이어졌다.
<캔디 크러시 사가>의 새로운 혁신, 하지만 그 이후는?
3매치 장르의 문법이 어느 정도 굳어졌다는 생각이 들 무렵, 생각지도 않았던 혁신이 일어났다. 킹닷컴이 만든 마성의 게임 <캔디 크러시 사가>다.
<캔디 크러시 사가>는 1분이라는 시간의 제약이 아니라 말을 움직이는 이동 횟수를 제약함으로써 새로운 종류의 긴장감을 창조해냈다. 일정한 모양과 크기 판 위에서 빠르게 손과 눈을 움직이며 느끼는 압박감 대신, 제한된 말 이동 횟수 안에 다양한 말판 위에서 여러 장애물을 헤치며 퀘스트를 완수해야 한다는, 이전과는 다른 종류의 압박감을 제시했다. 리더보드의 점수 순위가 아니라 지도 위에서 누가 더 멀리 갔는지를 보여줌으로써 경쟁을 시각화하는 방식을 바꿨다.
그 덕택에 어색한 현지화에도 불구하고 카카오 게임하기 매출 순위 상위권을 장시간 지킬 정도로 국내서도 그 마성을 아낌없이 보여주었다.
<캔디 크러시 사가>가 승승장구하는 가운데 등장한 <애니팡 2>는 캔디 크러시 사가의 문법을 거의 그대로 도입했다. 그리고 집중적인 비난을 받는다. 영감을 받은 것과 영향을 받은 것과 장르의 표준 문법을 도입한 것과 모방과 표절의 경계는 대부분 애매하다.
그럼에도 아쉬움은 남는다. <애니팡>은 소셜 게임과 스마트폰 게임 초창기 우후죽순 쏟아져 나오던 다양한 아이디어 중 핵심적인 것들을 제대로 결합하는 선구안을 보였다. 그건 혁신이었고, 그 결과물은 오늘날 우리가 사는 모바일 세상의 한 부분을 만들어냈다.
<캔디 크러시 사가>를 ‘참고’해 만든 <애니팡 2>는 어떤 혁신을 사용자에게 보여줬는가? 다음 퍼즐 게임을 고민하는 개발자에게 영감을 줄 수 있을 정도로 전체 게임계의 자산을 보다 풍성하게 했는가? 더 이상 작은 스타트업이 아니라 상장까지 한 마당에, 상대적으로 풍성한 자원을 제대로 활용했다고 자신할 수 있는가?
아직은 우리 기업이 모바일/게임/인터넷 산업/생태계에 더 기여할 여지가 있다고 믿고 싶다.
원문: 한세희 님의 Mediu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