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애는 아침 일찍 학원에 갔나 보다. 고등학생이 되더니 제법 공부에 열의를 보인다. 기특하다 싶었는데 방에 들어서는 순간 짜증이 밀려온다. 방이 엉망이다. 침대며 책상이며 바닥이며 어디 한 군데 정리된 곳이 없다. 바닥엔 머리카락이 널브러져 있고, 책상은 책상인지 화장대인지 모를 지경이다. 학용품과 화장 용기들이 어지럽게 뒤섞여 있다. 한숨이 절로 난다.
다정이는 모처럼 푸욱 잤나 보다. 느즈막하게 일어나서 엄마가 시킨 과업을 열심히 수행한다. 세탁기의 세탁물에 피존을 넣고, 재활용 쓰레기를 버리느라 현관을 나선다. 곧이어 외출 준비에 돌입한다. 예의 씻는데 한 시간, 말리고 고대하고 찍어바르는데 한 시간, 그렇게 두어 시간을 준비한 끝에 집을 나선다. 역시 바닥엔 머리카락이 낭자하고, 입었던 옷가지는 침대 위에 널브러져 있다. 아무리 잔소리를 해도 제대로 정리하는 법을 모른다. 으레 누가 해주려니 하는 심보다.
오늘도 아이들 때문에 웃고, 뿌듯해 하고, 화 내고, 실망하고, 속상해 하며 하루를 보낸다. 잔소리를 입에 달고 살지만 아이들은 도무지 나아지는 법이 없다. 짜증스럽다. 그러나 그 별것 아닌 일로 짜증을 내며 사는 게 도리없는 나의 일상이다.
오늘 따라 그 짜증이 새롭다. 문득 그게 현재의 내 삶이고, 살아가는 의미라는 생각이다. 있으니 사랑스럽고, 있으니 즐겁고, 있으니 짜증나고, 늘 제대로 하는 것이 없으니 졸졸 따라다니며 잔소리를 한다. 없으면 들지 않을 감정들이다. 그게 아이들이다. 늘 넘어지고 실수하고 교정해 주어야 한다. 그래서 아이들이고 그래서 사랑스럽다. 사랑이란 원래 그런 것일지 모른다.
에로틱 아이러니(erotic irony)라고 했던가. 사랑의 본령은 부족하고 부재한 것에 대한 연민이다. 우리는 늘 완벽을 추구하지만 불완전한 것에 더 반응한다. 영화나 드라마를 볼 때면 모든 걸 다 갖춘 악인보다 어딘가 빈 것 같고, 부족해 보이는 주인공에 마음 쓰인다. 예수를 사랑하는 마음도 같다. 완벽한 현현 대신 십자가에 못 박힌 형상이어서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당연히 살아 있어야 할 아이들, 그래서 늘 따라 다니며 뒤치닥거리를 하고, 잔소리를 하고, 짜증을 내야 할 아이들이 한 순간 사라진다면. 나는 살 수 없을 것이다. 아마도 단 하루도 제정신으로 버티지 못할 것이다.
그런 세월을 2년 동안이나 버틴 사람들이 있다. 별이 된 아이들을 가슴에 품고, 사는 게 사는 게 아닌 삶, 살았으되 죽은 삶을 살아 온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있다.
진작에 예매해 두었던 대구행 기차표를 물리고 서울로 올라간다. 아침에 안산은 못 갔지만 광화문 추모문화제까지 저버릴 수 없다. 누구는 정치적 행사여서 못 간다지만 나는 나의 소박한 정치와 소박한 사랑을 위해서 간다. 그 어떤 몹쓸 정치가 사랑을 잃고, 삶의 순간과 영원을 모두 잃어버린 사람을 외면한단 말인가. 그 몹쓸 정치는 도대체가 누구를 위하고, 무엇을 위한 정치란 말인가.
차창밖으로 빗방울이 뚝뚝 듣는다. 하늘도 슬퍼서 우나 싶다가 이내 마음의 행로는 아이들로 향한다. 다정이는 우산을 챙겨 나갔을까, 다애는 학원 끝나고 뭘 좀 먹었을까. 그런 아이들을 2년 동안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다. 앞으로도 영영 돌아오지 못할 아이들을 기다리고 기다리고 기다리다 지쳐 쓰러진 우리의 이웃이 있다. 우리가 해줄 수 있는 건 별로 없다. 다만 옆으로 다가가서 함께 비를 맞는 것밖에는.
원문: 최준영님의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