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5월, 내가 다니는 학교에서도 학내 추모 행사 개최, 총학생회와 교수들의 성명 발표 등을 두고 많은 논란이 일었다. “추모하지 않을 자유”를 주장하는 대자보들이 나붙었다. 모임, 술자리, 강의실, 과방에서 “세월호”라는 단어는 금기가 되었다.
고작 학내 추모공간을 만드는 일, 아이를 잃은 부모들을 학교에 불러 이야기를 듣는 일이 그렇게나 많은 사람을 불편하게 만드는 일임을 그때 처음 알았다. 참사 이후 겨우 한 달이 흐른 시점이었다.
그때 이 대자보를 썼다.
그대, 자유로이 슬퍼하라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이르는 예수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세워진 대학에서, 학생회장의 추모가 ‘정치적 행동’이라 지탄받았다. 누군가는 국가의 추모 국면을 두고 ‘슬픔을 강요하는 사회’라며 ‘슬퍼하지 않을 자유’가 침해당하고 있다 분노한다.
이들의 항변은 타당한 것인가. 대등하지 않은 위치에서 그들에게 슬픔을 ‘강요’한 권력은 과연 실존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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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주장하는 억압이란 실상 타인들이 자유롭게 표출한 슬픔으로 형성된 분위기, 또는 공적 책임을 갖는 기관의 추모에 지나지 않는다. 그에 대한 ‘개인적인 염증’을 그들은 ‘자신에 대한 억압’으로 표출한다.
나는 죽어간 아이들과 내몰린 부모들을 위해 눈물 한 방울 떨구지 않을 당신들의 자유를 존중한다.
그러나 우리에게 희망을 부여할 능력이 없는 사회에서, 왜 우리는 당신들의 안온(安穩)과 만족을 위해 거짓 웃음을 지어야 하는가. 당신들은 무슨 권리로 우리의 슬픔과 분노조차 억누르려 하는가.
슬픔이 꼴사납다 느낀다면, 당신들이 비호(庇護)하는 체제가 가져다 줄 수 있다는 그 희망으로 슬픔을 감화시켜 보아라. 누가 시키지 않아도 사람들이 행복에 겨워 웃고 노래하는 사회를 만들어라.
그러할 의지도 능력도 없는 당신들은 그 대신 저 슬픔을 미개하고 불온하다 비난한다. 이 정권의 수장(首長)과 더불어 ‘사회 분열’로 자유로운 개인들을 겁박하고, 타인의 자유로운 슬픔을 ‘위선’이라 비하한다. 투사(鬪士)가 되지 않을 것이라면, 일상의 사소한 기쁨이라도 누릴 것이라면, ‘흉탄에 부모를 잃은’ 대통령보다 슬픔을 이야기할 자격이 없다며 타인의 자유를 재단(裁斷)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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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으로 자유로운 개인은 오직 타인의 자유를 해치지 않는다는 격률에 따를 뿐, 구조 밖에서 독립적으로 사고하고 비판한다. 자신과 타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어떠한 권력이나 체제에도 타협하거나 굴종하지 않겠다는 용기가 자유주의자의 품격이다.
“당신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지만, 당신이 그것을 말할 자유를 위해서 목숨을 걸겠다”던 볼테르의 자유 앞에서, 정권을 비호하고 약자를 짓밟을 명목으로 내건 당신들의 자유는 너무나 저열하고 나약하다.
당신들이 말하는 ‘자유’가 잘못된 체제를 비판하지 않는 대가로 개인이 얻는 이기적인 면죄부(免罪符), 안전한 사회에 대한 시민적 책임을 유기한 것을 반성하지 않을 알량한 자유라면, 나는 차라리 자유롭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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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슬픔은 우울함과 패배감의 형태로, 정권이나 기득권에 대한 어떠한 책망도 내포하지 않은 채 자기반성의 틀 안에서 빙빙 맴돌다 금세 공중에 흩어지기를 요구받는다.
“세월호 사회분열, 경제에 악영향”이라는 대통령부터 “풍악놀이가 웬말이냐”라며 추모곡을 준비한 음악인을 풍악꾼 취급한 여당 시장후보까지, 감히 슬픔의 ‘형식’을 강요하는 모든 억압에 나는 저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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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자유롭다면, 고개를 들어 저 슬픔의 맨얼굴을 보라.
가수가 되면 할머니의 불편한 무릎을 고쳐드리겠다고 약속했지만, 수학여행 전에 쓰던 자작곡도 완성하지 못하고 떠난 다운이의 천진한 눈을 보라. 학생증 꼭 쥐고 돌아왔다는 재강이의 유난히 까맣고 또렷한 눈을 보고, 의젓하고 속 깊어 보이는 장환이의 선한 눈을 보라. 어린 지훈이와 분향소에 나란히 놓인, 이름 없이도 부자지간임을 알 것 같은 아버지의 단단한 입매를 보라.
그대 자유롭다면, 문 밖으로 나와 저 슬픔의 소리를 들어라.
교통사고보다 못한 것으로 딸의 죽음을 표현한 국영방송사 앞에 영정을 들고 선 예은이 아버지의 분노를 들어라. 청와대 앞에서 영정을 끌어안고 딸의 마지막 노래를 들어달라 외치는 보미 아버지의 울음을 들어라. 전경의 방패에 밀려 떨어뜨린 영정을 허겁지겁 주워 들고 입을 맞추는 부모들의 숨죽인 흐느낌을 들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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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것은 내 어버이도, 내 동생도, 내 자식도 아니다. 그렇기에 평생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안고 살아갈 어떤 가족들과 달리, 나는 나의 이기적인 일상을 영위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기억하겠다. 내가 겨우 스물 남짓한 나이에 생생히 보고 들은 처절한 슬픔을. 분향소에서 눈부시게 웃는 어린 영정들을 차마 바로 보지 못하고, 사회의 못난 선배로서 죄의식에 덜덜 떨며 흘리던 눈물을.
그러나 나는 내 몫의 죗값을 치르겠다. 벼랑 끝에 내몰린 부모들과 함께 서서 자유롭게 울고 웃고 분노하고 비판하고 저항하겠다. 사회에서 가장 약한 자의 자유를 이야기하겠다. ‘가만히 있으라’는 사회가 다시금 희생시킬 미래의 어떤 생(生)들을 구하여 평생 갚아 차마 다 못 갚을 그 목숨값을 치르겠다. 그것이 내 자유의 값임을 알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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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로운 그대들은 삶을 오롯이 내던지는 투사(鬪士)가 되지 않아도 좋다. 사랑해도 좋고 웃어도 좋고 ‘풍악’을 울려도 좋다. 가슴 미어지게 울어도 좋고 뜨겁게 분노해도 좋다.
다만 자유에 대한 그대의 책임만을 다하라.
그대 지금 선 그 자리에서 자유롭게 슬퍼하라.
그해 교정에서의 경험은 나에게, 공동체의 부재 이전에 ‘자유의 부재’로 다가왔다. 그 속에서 내가 한 인간으로 온전히 설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그래서 스물두 살의 내가 썼던 이 대자보는, 사실 그 누구보다 나 자신에게 전하는 글이었다. 불안 속에서 내가 택한 답은 타인에 대한 연민이나 동정이 아니다. 삶이 존중받는 사회를 향한 욕망, 그리고 그 욕망을 표출하고 선동할 자유다.
그리고 이 답은 지금까지와, 앞으로 나의 삶에 있어 하나의 무거운 기준이 되었다.
원문: 한지은님의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