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총선이 끝났다. 최악의 공천 과정 속에 국민의 무관심까지 더해져 정치가 크게 후퇴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우려가 있었지만 오히려 결과는 그 반대였다. 국민은 투표로서 국민의 무서움을 보여주었고, 20대 총선은 역사상 가장 충격적이고도 따끔한 결과를 보여주었다. 최악의 공천파동 속에 보여준 국민의 최선의 선택, 그 의미를 분석해보고자 한다.
1. 국민은 바보가 아니다: 공천활극의 참혹한 결과
‘영남은 새누리당의 영토, 호남은 더민주의 영토’로 굳어진 이후, 언젠가부터 총선은 국민의 투표싸움이 아닌 공천싸움이 되어버렸다. 이번 총선에선 그 추악함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는데, 새누리당의 친박/비박 간 공천갈등, 더민주의 분당과 비례대표 공천 갈등은 국민을 실망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래도 새누리는 과반은 물론 3/5인 180석도 노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것이 새누리는 물론 언론의 예측이었고, 이는 국민의 무서움을 간과한 결과라는 것이 드러났다.
결과는 참혹했다. 새누리당은 수도권 참패는 물론 대구와 부산, 경남에서도 치명적인 패배를 기록했고, 더민주는 정당투표에서도 국민의당에도 밀리는 등 이번 투표에선 ‘오만한 공천은 곧 총선 참패’라는 큰 교훈을 남겼다. 이전에는 정치인들이 말로만 ‘국민이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라며 국민을 무서워하는 척만 했었는데, 이번 투표로 아마 ‘국민의 무서움’의 실체를 확인했을 것이다. 국민은 더이상 공천만 해주면 찍어주는 바보가 아니다. 이번 총선은 그러한 국민의 무서움이 입증된 선거라고 할 수 있다. 전율이다.
2. 금이 가고있는 영호남의 지역구도
1990년 3당합당은 부마항쟁 등 민주화의 성지로 여겨졌던 부산/경남을 여권에 편입시킴으로써 철옹성 같은 지역구도를 완성시켜버렸다. 영남은 YS, 호남은 DJ. 미국과 소련의 정치적 대립 때문에 그어진 38선 만으로도 우리 국민은 충분히 고통받고 있는데, 또다른 정치적 대립 때문에 그어진 영호남의 38선은 우리 민족의 또다른 아픔이었으며 이후 25년간 후진적 정치의 근원으로 지적받아 왔었다.
이번 총선에선 더이상 유권자들이 자신의 지역만을 따라 투표하지 않음을 보여줬다. 대구의 김부겸(더민주), 홍의락(무소속), 전남의 이정현(새누리), 정운천(새누리), 영남에서 야권이 약 12석을 얻는 등 이번 선거에선 영호남의 38선이 조금씩 붕괴되고 있음을 보여줬다. 매우 기쁜 일이다. 게다가 국민의당의 등장으로 매번 2번만 찍던 호남 유권자들이 이번엔 3번에게 몰표를 줬고, 무소속 후보들이 11명이나 당선되는 이변을 보여줬는데, 이 역시 ‘당 이름’이 더이상 당선의 보증수표가 아니라는 증거였다.
3. 국민의당, 제 3의 선택으로 약진하다
국민의당이 처음 등장했을 당시 국민의당은 야권분열과 호남 기득권세력의 생명연장 외엔 아무 역할을 하지 못할 것이란 의견들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달랐다. 국민의당은 예상보다 더 크게 성공했고, 특히 호남 지역구 석권과 더민주보다 높은 정당 지지율(더민주 약 26%, 국민의당 약 27%)은 이들이 국민이 원하는 다른 열망을 담아내고 있음을 보여줬다. 그렇다면 국민의당 지지의 실체는 무엇일까?
난 그 원동력이 ‘호남 보수세력’과 ‘보수 개혁세력’이 만난 결과라고 추정하고 있다. 첫번째로 호남보수세력 또는 고령층의 선택이다. 사람들은 평균적으로 나이가 들수록 ‘보수화’의 경향을 보이는데, 도시보다 고령층의 비율이 높은 호남에게 ‘보수보단 진보세력이 더 많을 것이다’란 편견은 아마 착각이었을 것이다. 다만 그들에게 있어 보수란 ‘선택을 바꾸지 않는다’라는 관점에서 구 동교동계를 가리켰고 (마치 우리의 노래방에서의 선택이 더이상 업데이트가 되지 않듯!), 그런 의미에서 호남의 구세력을 흡수한 국민의당은 호남의 새누리로 입지를 굳히기 충분했다.
또한 정당투표에 있어 상당수의 새누리당 지지자들이 ‘지역구 투표는 1번, 정당투표는 3번’이란 의사를 확인할 수 있었는데, 어쩌면 새누리당에 몰표를 주기 싫은 유권자에게 ‘지역구 1번, 정당 2번’보다는 보다 쉬운 선택지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다시말해 국민의당은 보수거대야당으로서 ‘새누리당’밖에 찍을 수 없었던 보수경향 유권자들에게 국민의당은 새로운 선택지를 만들어 준 것이다. 이번 선거로서 국민의당은 ‘제 3의 선택’으로서 ‘제3당’의 자격이 있음이 드러났다. 여야가 법안처리를 위해선 국민의당의 협조가 필수적인만큼 앞으로 캐스팅보트로서의 국민의당 역할은 더욱 커질 전망이다.
4. 수도권을 싹쓸이 한 더민주와 참패한 새누리, 국민의당
수도권의 민심은 곧 미래세력의 민심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젊은 투표층이 많은 수도권에서 더민주는 새누리당의 두배가 넘는 의석을 차지함으로써 압승을 차지했다. 이에 비해 더민주는 호남에선 단 6석(국민의당 23석, 새누리당 2석)을 차지하는데 그쳤는데, 이는 더민주의 지역적 기반이 호남에서 수도권으로 옮겨왔음을 의미했다. 다양한 지역출신들이 모이기에 지역주의 투표성향이 강하지 않고, 대신 소셜미디어 등 정보에 강한 수도권 유권자들, 그들은 이번 투표에서 야권분열에도 불구하고 더민주의 압승, 새누리의 참패를 안겨줌으로써 오만한 공천에 대한 심판을 제대로 보여줬다.
이러한 승리의 원인은 김종인의 활약 때문일까 아니면 문재인의 활약 때문일까. 나는 이것이 김종인/문재인의 승리라고 이야기하기보다 박근혜의 자멸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친박 공천파동을 통해 텃밭이었던 대구마저 흔들리는 상황에서 수도권은 남아날리가 없었다. 그동안 꾸준히 제기되어 온 ‘1여 다야’의 유리한 구도에도 불구하고 (실제 그것이 안산 단원에서의 승리를 가져오기도 했다) 새누리는 참패를 하였으며, 이를 통해 선거구도보다 더 무서운 것이 ‘올바른 공천과정’이었음을 다시한번 보여줬다.
이번 총선의 최대의 성과가 아닌가 싶다. 수도권 정당으로 거듭난 더민주는 이제 더이상 호남지지에만 매달릴 것이 아니라 앞으로 영남, 충청, 강원, 제주 등으로 그 세력을 뻗어나가는 것이 올바른 길이 아닐까 싶다. 실제로 이번에 얻은 의석은 호남에선 6석에 불과하고, 영남에서 오히려 9석을 얻었다. 이제 ‘수도권화’되어가는 영남 대도시들의 민심을 확인하였으니, 앞으로의 행보에서 더민주가 어떻게 전국정당으로 거듭날 수 있을지 지도부의 행보가 더욱 중요한 시점이다. 더민주가 ‘다시 호남당’으로 돌아가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것은 수도권이 표를 몰아준 국민의 뜻이 아니다.
5. 절반의 승리에도 미치지 못한 정의당과 진보진영
이번 선거에서 (개인적으로) 슬픈 소식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아마 정의당과 녹색당의 성장실패일 것이다. 여당의 친박공천 파동과 야당의 집안싸움 속에 한 때 10%가 넘는 정당지지율을 보이며 10석까지 넘봤던 정의당은 막판 국민의당의 약진 속에 지역구 2석(심상정, 노회찬), 비례대표 4석에 만족해야 했으며 녹색당은 끝끝내 원내진출에 실패했다. 진보진영은 더민주가 김종인 영입으로 우클릭을 한 가운데 이들을 대체할 ‘선명한 야당’을 내세우며 자신들의 입지를 다져나가는 듯 했으나 유권자의 선택은 정의당/녹색당/민중연합당이 아닌 국민의당이었다.
이번엔 ‘종북’의 굴례라고 주장하기에도 그 근거가 약하다. 야당의 연이은 우클릭 속에 분명 외연을 확장할 기회가 있었던 선거였다. 하지만 왜 정의당과 진보진영은 쓰디쓴 결과를 맛봐야만 했을까? 아쉽지만 이번 선거에서 정의당과 진보진영은 ‘이슈 싸움’에서 졌다고 밖에 판단할 수 없을 것 같다. 여야의 공천 파동 속에 정책 선거는 이미 물건너간지 오래였고, 따라서 정책으로 선명성을 보이는데 실패한 진보정당들에게 유권자들이 굳이 표를 줄 이유를 찾지 못했던 것이다. 또한 진보진영의 주요 지지기반은 소셜미디어와 같은 누리꾼과 노동자 기반이 컸는데, 누리꾼은 더민주가, 노동자는 무소속 후보들이 표를 가져감으로써 정의당과 진보진영은 더욱 그 입지가 좁아졌다. 앞으로 미래정당으로 어떻게 외연을 확장할지, 진보진영의 통합에는 어떠한 선택들이 필요할지 깊은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6. 기타 이슈: SNS, 여론조사, 앞으로의 대권 양상
먼저 누리꾼들에게 인기를 끌었던 후보들의 탈락을 들 수 있다. 더민주의 정청래, 김광진 의원 등은 공천 과정에서 탈락하였으며, 필리버스터 스타 은수미 후보와 색다른 현수막으로 눈길을 끈 배재정 후보는 결국 고배를 마셔야 했다. 소셜미디어는 새로운 정치바람을 가져오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소셜미디어만이 세상의 전부인양 선거 형세판단의 왜곡을 가져오기도 했다. 반대로 여론조사는 소셜미디어와는 정반대의 결과를 내놓기도 했는데 (선거 전까지도 새누리당의 과반을 예상했으니 말이다.), 전화조사에 응대할 수 있는 유권자가 고령층과 전업주부 등 특정 계층뿐이란 점에서 앞으로 그 유효성이 다시금 재조명되어야 할 전망이다. (인터넷과 오프라인 여론조사를 황금 조합한 예측이 필요하다.)
새롭게 정비된 ‘여소야대’의 국면 속에 앞으로 남아있는 흥미로운 점은 제 1당이 누가 될 것인지와 국회의장은 어느 쪽이 차지할지 여부이다. 현재는 새누리당 122석, 더민주 123석으로 더민주가 1석 앞선 1당을 차지하고 있지만, 무소속 후보들의 합류에 따라 이는 곧 바뀔 수도 있을 전망이다. 문제는 그 시점이 언제냐인데, 만약 박근혜 대통령의 반대 속에 무소속 후보들의 복당이 5월을 넘기게 된다면 국회의장은 야당의 몫이 될 것이며, 이에 따른 후폭풍 역시 만만치 않을 전망이다.
꾸준히 제기되어온 소선거구제의 개편 역시 큰 관심거리이다. 지금까지는 소선거구 제도에서 많은 이득을 취하여 온 거대 양당이 이를 개편할 이유가 없었지만, 20대 총선에서 캐스팅보트를 쥐게된 국민의당 입장에서 보자면 소선거구 제도보단 중/대선거구제가 그들에게 훨씬 유리하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를 통해 ‘사표방지 심리’가 없어질 경우 국민의당의 제 3당으로서의 입지는 더욱 견고해 질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민의당이 특정사안에 대해 협조하는 대신, 정의당 등과의 연합을 통해 소선거구제의 개편을 이뤄낼지 여부가 큰 관심사이다. 만약 이에 성공할 경우 국민의당의 정치적 위신은 더욱 올라갈 전망이다.
마지막으로 대권 가도를 1년 앞둔 시점에서 새누리당과 더민주는 비상등이 켜졌다. 새누리당은 이번 총선 참패를 통해 김무성 대표와 친박계 모두 치명상을 입었으며, 오세훈 전시장 역시 총선에서 패배함에 따라 강력한 대선후보가 없는 무주공산의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반기문 사무총장의 조기 영입이나 정의화의장 또는 유승민의원 중심의 제 3세력의 등장 등 복잡한 권력지형 변동이 예상되는 상황이다.
더민주 역시 상황이 복잡하긴 마찬가지이다. 수도권 승리를 누구의 기여로 볼 것이냐, 그리고 호남 패배와 저조한 정당투표의 원인을 누구의 탓을 돌릴 것이냐를 놓고 또 한번 큰 홍역을 치를 예정이다. 김종인 대표는 꾸준히 호남의 ‘반문재인 정서’를 강조해온 가운데 여당의 과반저지를 자신의 공으로 강조하며 더욱 당권을 강화할 것으로 보이며, 호남지지에 정치생명을 걸었던 문재인 대표는 수도권 지지자들의 많은 지지에도 불구하고 호남의 지지철회에 큰 타격을 받은 모습이다. 반면 김종인 대표에게도 비례공천 파문에 따른 처참한 정당투표 결과와 기존 야권지지층 이탈에 대한 책임이 있기에 그가 전당대회에서 다시 당권을 잡을 수 있을지는 여전히 미지수이다.
국민의당 안철수 후보는 탄력을 받았다. 선거 전까지만 하더라도 본인마저 노원에서 낙선하며 정계은퇴를 해야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있었지만, 이번 선거에서 호남에서의 예상 외의 압승과 높은 정당투표율은 그가 아직 매우 강력한 대선주자임을 다시한번 입증했다. 비록 정동영 국민의당 후보가 아슬아슬하게 당선하긴 했지만 그 또는 천정배 의원이 대권가도를 흔들기는 쉽지 않아보인다. 앞으로 안철수 의원이 여당과 야당 사이에서 어떠한 정치적 ‘사이다’를 보여주느냐에 따라 야권의 단일후보 대세가 안철수가 될 것인지, 아니면 문재인 또는 제 3의 인물이 될 것인가 판가름나지 않을까 싶다.
총평을 하자면, 이번 선거는 ‘우매한 국민은 없고, 받들어야 할 국민만 있다’라는 좋은 교훈을 가르쳐 준 투표였다.
원문: T-Robotic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