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한국사회를 뜨겁게 달군 인공지능과 이세돌의 역사적인 승부는 결국 인공지능의 승리로 끝났다. 인공지능은 ‘도착한 미래’로 다가왔고 그것이 인간에 도움이 될지 위협이 될지는 인류의 숙제로 남았다.
대국 중 필자에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바둑이 끝났을 때였다. 이세돌은 평소처럼 복기하고 싶었지만 상대가 없었다. 알파고가 그 수를 왜 거기 두었는지 알 수 없었다. 이 장면을 보며 더글러스 애덤스의 소설이자 영화로도 친숙한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영화에서 인간은 뛰어난 인공지능 ‘깊은 생각(Deep Thought)’에게 삶과 우주의 의미를 묻는다. 그러자 인공지능은 750만 년 동안 우주의 모든 데이터를 분석한 뒤 그 질문의 정답은 ‘42’라고 답한다. 왜 그게 정답인지는 아무 설명이 없어 인간은 허탈해한다. 두 장면을 통해 내릴 수 있는 결론은, 결국 답을 구하는 것은 인공지능의 능력일지 몰라도 그 답을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인간의 몫이라는 것이다.
이 영화를 비롯해 많은 SF 영화들이 인공지능을 소재로 삼아왔다. 영화 속에 등장한 최초의 인공지능은 1927년 독일영화 <메트로폴리스>의 로봇 ‘마리아’이니 인공지능은 거의 영화의 역사와 함께 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초기 영화에서 인공지능은 인간들의 폭력을 부추기는 마리아처럼 대부분 악역을 맡았으나 최근엔 인간의 친구, 절대자 등 다양한 배역을 소화하고 있다.
과학자들은 인공지능을 인간의 능력을 기준으로 약인공지능, 강인공지능, 초인공지능의 세 단계로 나누지만, 영화는 그렇게 구분하기 쉽지 않다. 인간보다 지능이 떨어지는 약인공지능은 작품을 통해 인간에게 시사점을 주기 힘들어 잘 캐스팅되지 않고, 강인공지능과 초인공지능은 경계가 모호하기 때문이다. 그 대신 필자는 영화 속에서 인공지능이 맡아온 역할을 기준으로 인공지능을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해봤다.
인간과 공존하거나, 인간을 제거하거나, 인간과 결합하거나.
지금까지 많은 SF 영화들이 미래를 곧잘 정확하게 예견해왔는데 과연 인공지능에 대한 예측도 맞을지는 앞으로 더 지켜봐야 한다. 다만 예측이 맞고 틀리고를 떠나서 지금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인간에게 생각해 볼 만한 시사점은 던져줄 수 있으리라 믿는다.
1. 인간보다 더 인간을 닮은 피조물
인공지능과 인간의 차이점을 이야기할 때 사람들은 흔히 감정을 이야기한다. 인공지능이 인간의 감정까지 흉내 낼 수는 없다고 자신한다. 이세돌이 “인공지능은 바둑의 아름다움을 모른다”고 한 말도 같은 맥락이다. 하지만 많은 영화는 현대사회에 인간이 잃어버리고 있는 것이 감정이어서 오히려 인공지능이 인간보다 더 인간다울 수 있다고 말한다.
“울 수 없다는 건 잔인한 거야. 이 슬픔을 표현할 길이 없어.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모두 떠나고 말겠지?”
<바이센테니얼 맨>의 인공지능 로봇 앤드류는 자신이 아버지처럼 여기는 리처드의 딸이 죽자 슬픔에 잠겨 이렇게 말한다. <A.I.>의 인공지능 로봇 데이빗 역시 자신을 입양한 인간 엄마로부터 사랑이라는 감정을 학습하고는 그 감정을 놓지 않는다. 그 엄마는 진짜 아들이 퇴원하자 데이빗을 버리지만 데이빗은 엄마가 죽은 뒤에도 1,000년 이상 살면서 엄마를 그리워한다.
<바이센테니얼 맨>의 마지막 장면에서 앤드류는 사랑하는 여자와 함께 늙기 위해 인간이 되기로 결심한다. 그를 인간으로 인정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법정에서 앤드류는 판사 앞에서 이렇게 진술한다.
“로봇으로 영원히 사는 것을 포기하고 인간으로서의 죽음을 택한 이유는 인정받기 위해서입니다. 제가 누구인가에 대해 찬사나 평가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단순한 진실을 인정받는 것이 제 목표입니다. 그걸 이루기 위해 저는 고귀하게 죽는 길을 택했습니다.”
고귀한 죽음을 위해 영생을 포기하는 로봇이라니. 이쯤되면 감정이 부족한 것은 인공지능이 아닌 인간이다. 미래사회 인간은 기계처럼 살고 오히려 인공지능이 인간처럼 살지도 모른다. 영화 속에서 인간은 뒤늦게 인공지능을 통해 잃어버린 감정을 재발견한다.
감정을 갖게 된 인공지능은 인간이 될 권리를 얻게 되기 위해 인간과 대결하기도 한다. 디스토피아를 그린 많은 영화들은 인공지능과 인간의 대결을 그리고 있는데 이때 갈등은 인공지능을 인간과 차별하는 인간의 분리정책에 인공지능이 저항하면서 시작된다. 이 분리정책을 인간은 그동안 순혈주의 파시즘과 아파르트헤이트 등을 통해 역사 속에서 지겹게 목도해왔다.
“나는 너희 인간들이 믿지 못할 것들을 봐왔어. 오리온의 어깨에서 불타는 전함 같은 것들. 그 모든 기억이 곧 사라지겠지. 빗속의 눈물처럼. 이제 죽을 시간이야.”
<블레이드 러너>의 인공지능 로이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남긴 대사다. 그는 인간처럼 되고 싶었지만 결국 실패하고 죽음 앞에서 스스로 고귀해지는 길을 택한다.
이 영화에서 인간과 구분하기 힘든 외모를 가진 유전자 복제 인공지능 ‘리플리컨트’는 수명이 4년에 불과하다. 이들은 인간처럼 오래 살고 싶어서 인간이 사는 도시로 찾아온다. 인간은 특별 형사를 고용해 이들을 추적한다. 영화에는 인공지능을 인간과 구분하기 위해 튜링 테스트를 실시하는 장면이 여러 차례 등장하는데 레이첼은 심지어 자신이 인공지능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가 발각되기까지 한다.
이 영화의 감독판은 리플리컨트를 쫓는 데커드 형사 역시 리플리컨트라는 것이 함의돼 충격을 줬다. 결국, 인간과 인공지능을 구분할 수 있는 ‘인간성’이란 하나의 알고리즘에 불과할뿐 누구도 확신할 수 없는 것이다.
리플리컨트의 전단계 인공지능은 <엑스 마키나>의 에이바다. 아름다운 외모의 에이바는 아직 기계적인 외형이 남아 있어 인간처럼 보이지 않지만, 튜링 테스트를 통과하는 것을 넘어 창조주와 테스터를 이간질하는 지적 능력을 갖췄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에이바는 인간의 피부를 부착해 외견상으로도 진짜 인간처럼 보이는 자신의 모습을 거울을 통해 바라보며 흡족해한다.
인간과 사랑의 감정을 교류하는 인공지능도 있다. 영화 <그녀>에서 인공지능 운영체제인 사만다는 수십만 명의 남자들과 동시에 사귈 수 있다. 사만다와 사랑에 빠진 편지 대필작가 데오도르는 목소리뿐인 그녀에게 이렇게 고백한다.
“나는 다른 누구도 당신을 사랑하는 것처럼 사랑한 적이 없어.”
인공지능은 심지어 도덕적으로 최고의 경지에 오르기까지 한다. 박성환의 소설 <레디메이드 보살>을 각색한 김지운 감독의 영화 <천상의 피조물>(옴니버스 영화 <인류멸망보고서> 중 두번째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천상사 가이드 로봇 RU-4는 어느날 긴 수행에 들어간다.
“나는 무엇입니까? 어디서 나서 어디로 가는 것입니까?”
인공지능 로봇은 질문을 던지고 승려들은 로봇을 인명 스님으로 부르며 추종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선 마침내 해탈의 경지에 오른 인공지능을 볼 수 있다.
원문 : 유창의 창작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