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5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은 대중적으로도 아주 널리 알려진 사람이다. 그는 과학을 전공하는 여동생에게 질문을 받았다.
“이해하기 어려운 책을 읽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지?”
그가 준 답은 이랬다.
“그 책을 읽다가 도무지 뭐가 뭔지 모르겠거든 거기서 멈춰. 그리고 처음부터 다시 읽도록 해. 그걸 다 읽을 때까지 반복하는 거지.”
완전한 이해란 없다
뭔가 이해했다는 것은 언제나 어느 정도 오만이다. 완전한 이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언제나 유한한, 우리가 보지 못한 더 큰 그림이 있다. 우리가 한 문장을 읽거나 몇 페이지의 글을 읽었다고 하자. 우리는 그것을, 즉 그 설명이나 그 묘사를 이해했다고 느낀다. 어느 정도까지는 사실이다. 완전한 이해가 아니라는 것이지 이해가 아니라는 것도 아니다.
다만 시간이 지나면서 책의 뒤쪽의 내용이 점점 더 이해가 안 간다면 이해가 너무 작았기 때문일지 모른다. 애초에 그 글을 쓴 사람과 공감할 수 없기 때문일 가능성도 있다. 어떤 사람에게는 설명인 것이 어떤 사람에게는 전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이해가 가는 설명을 읽을 때 우리는 여기에서 저기로, 이 점에서 저 점으로 가는 것이 당연하다고 느낀다. 이런 문장을 보자.
청담동에서도 비싸기로 유명한 집에서 살며 비싼 자동차를 몰고, 자기와 비슷한 사람들과 매일 차를 마시며 잡담을 즐기는 A 씨는 허영이 있다.
그럴 듯하다고 느낄지 모르나 내 입장에서 이 문장은 두 개의 사실을 겨우 겨우 잇는다. 하나는 부자라는 사실이고, 또 하나는 A는 허영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두 가지를 늘어놓을 때 어떤 사람은 ‘이러저러하니까 저런 건 당연하지’라고 생각하고 어떤 사람은 ‘그건 편견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저런 문장은 설명이라기보다는 기껏해야 특이한 사례 하나이며, 다음에 비슷한 사람이 나와도 그나 그녀가 허영에 차 있다는 근거는 없다.
첫 번째 사람에게 위의 문장은 설명이고 두 번째 사람에게는 그렇지 않다. 첫 번째 사람에게 여기에서 저기로 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두 번째 사람에는 여기에서 저기로 가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다. 정도의 문제일 뿐 우리는 언제나 위와 같은 문제를 겪는다.
비약이 없는 설명, 혹은 논리적 전개는 있을 수 없다. 여기에서 저기로 가기 위해 필요한 중간 단계의 수는 언제나 무한하다. 아침마다 닭이 울기 때문에 당신은 닭이 우는 소리를 듣고 지금이 아침이라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흄이니 러셀이니 하는 사람들이 강조한 것처럼 아무리 많은 경험도 법칙을 완전히 증명하지는 않는다. 매우 그럴 법하다는 것에 멈출 뿐이다.
우리는 언제나 더 큰 박스를 상상할 수 있다
아이들은 상상력은 뛰어난데 경험이 적으며, 어른의 질문에 답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어린이를 위한 책은 비약이 심하지만 아이들은 설명이 안 되는 수많은 이유를 상상해낼 수 있다. 점과 점이 연결 안 되는 이유는 그들이 바보라서가 아니라 오히려 너무 똑똑해서 그렇다. 실제로는 궁극적으로 어떤 점도 완전히 연결되지 않는다.
불행하게도 어리석은 어른일수록 아이들의 상상력을 제약하는 데 최선을 다한다. 자기 눈에 다른 길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그걸 보는 아이를 꾸짖지 말아야 한다. 그들은 뭔가를 가르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머리에서 빼내는 것이다.
어른이나 선생만 그런 것이 아니다. 책도 그렇다. 어떤 책들은 그것을 읽는 독자에게 아주 많은 상상력을 빼앗아간다. ‘이것은 당연히 저것이고 그것은 변할 수 없다’는 생각을 더 강하게 한다. 그런 지식을 얻을 때 사람들은 기뻐하고 두 개의 점을 다르게 이으려는 사람을 비웃는다. 이런 식으로 지식을 배울 때 같이 어리석음을 배우기도 한다. 상상력을 제약당하고 눈이 먼다.
설명이 점과 점을 잇는 것이며 그것은 언제나 비약을 동반한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그러니까 그런 설명이 계속 해서 이어지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1부터 100만까지 나오는 주사위를 던져서 1이 나올 확률은 아주 작지만, 100만 번 이상 던진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마찬가지로 작은 설명, 작은 비약 하나하나가 너무나 확실해 보여도 건물을 쌓아 올라가듯 계속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긴 설명, 혹은 하나의 학문체계를 만들려고 하는 사람은 그 기반을 아주 튼튼하게 만들려고 한다. 점과 점을 아주 튼튼히 잇는 것이다. 그 부분을 대충 이해하면 나중에 문제가 생긴다.
우리는 처음으로 돌아가야 할 필요가 있다. 이제 처음 부분을 읽으면 왜 불필요하게 자세해 보이는 이야기를 여기저기 집어넣었는지 좀 더 이해된다. ‘이건 당연한 거 아냐? 뭘 이렇게 길게 설명한 거지?’라고 생각했지만, 그건 당신이 점과 점을 너무 쉽게 이어서 그렇다.
다시 읽기가 어려운 이유
이제 이 글을 쓰기 시작하게 만든 진짜 질문을 던지고 이 글을 정리해 보자. 문제는 ‘우리는 처음부터 다시 읽기를 못한다’는 것이다. 적어도 의도적으로 그러는 사람이 거의 없다. 너무 어렵고 많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이 있다. 왜 그럴까? 실패해야 다시 시작하기 때문이다.
다시 시작한다는 말은 처음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책을 다시 읽는 것이다. 사업의 기본을 다시 점검 하는 것이다. 우리가 너무 쉽게 이었던 점들을 다시 점검해보는 것이다. 예를 들어, 당신은 어쩌면 인간을 돈을 주면 기계처럼 움직이는 존재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래서 사업이 망했을지도 모른다. 그런 걸로 망하고 다시 시작하면 이제야 점과 점 사이에 문제가 있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반면 사업이 그럭저럭 굴러가면 당신은 말단의 문제에 집중하는 데 바빠 기본적인 것을 다시 생각하지 못한다. 엄두가 안 난다. 건물을 100층까지 올렸는데 2층에 문제가 있으니 다 허물고 다시 짓자는 말을 들으면 대부분 그렇다. 건물이 무너지고 나서야 ‘그래 2층을 그렇게 지으면 안 되는 거였지’ 인정한다. 그런 나태가 회복불능의 피해를 입혀도 말이다. 실패하고서도 그 이유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도 많다. 그래도 처음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삶이란 곧 사업이 아니다. 당신의 정신이나 지식체계를 생각해 보자. 당신은 의도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여러 가지를 배우면서 컸다. 그러면서 얼마나 허술하게 점과 점을 이어왔는가. 얼마나 많은 것이 편견인데도 그냥 삼켜버렸는가. 소위 당신의 가치관이라는 것은 얼마나 잡동사니가 가득 찬 쓰레기통인가.
한국에는 사람이 결혼을 해야 어른이 된다는 말이 있다. 결혼을 안 하면 어른이 안 된다거나 결혼만 하면 훌룡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아니지만, 부모가 되는 것과 아이를 키우는 것에 연관해서는 이 말이 진실이라고 생각한다. 아이에게 관심이 있는 어른은 아이에게 뭐라도 하나 가르치려고 하면서 인생을 복기하기 때문이다. 책을 처음부터 다시 읽는 것이다. 당신의 인생 첫 페이지로 돌아가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책을 다시 읽는 것은 삶을 복기하는 일
물론 삶을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복기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책을 처음부터 다시 읽는다는 것은 쉽지 않다. 우리는 책을 끝내고 싶어 하고 다음 책으로 넘어가고 싶어 한다. 이렇게 읽다가는 책의 앞부분만 읽다가 시간이 끝나겠다는 생각을 하면 마음이 편치 않다. 그러나 뜻밖의 답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왜 항상 우울하고 화가 났는지, 왜 그렇게 성공과 돈에 미쳐 있었는지, 답이 거기 있을지 모른다. 나와 상관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누군가를 만나서 포옹 한 번 하는 것이 당신 인생의 돌파구라는 것을 이제 깨달을지도 모른다. 당신을 이용해 먹는 악당을 친구로 생각하고 당신에게 호의적인 친구를 조롱하고 비웃었다는 것을 깨달을지도 모른다.
많은 사람이 책의 맨 앞으로 돌아갔던 게 축복이라고 말한다. 실패가 꼭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들의 눈에는 계속 그럭저럭 성공하고 그럭저럭 버텨서 책의 맨 앞, 인생의 맨 앞에 다시 가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불쌍하게 보일 것이다.
원문: 나를 지키는 공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