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새로운 아파트 모델하우스가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아파트를 둘러본 제 소감은 ‘좋지만 왜?’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번에 둘러본 곳은 실평수 125제곱미터나 112제곱미터로 꽤 큰집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인테리어도 훌륭했고 넓은 공간 때문에 여기저기 만들어 놓은 수납공간이나 드레스룸을 제외하고도 납득할 만큼의 주거공간들이 집안에 있었습니다. 사실 누가 봐도 그런 아파트는 첫반응이 ‘야, 좋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저는 제가 종종 느끼는 찜찜함을 다시 느꼈는데요. 참 좋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으면서도 왠지 싫은 겁니다. 그래서 왜 그럴까를 생각해 봤습니다.
그건 다름 아닌 누가 거기에서 사는가의 문제였습니다.
그곳엔 누가 사는가: 프라이버시가 없는 가족
실평수 125제곱미터는 통상 45평이나 50평 아파트로 말해지는 큰 아파트입니다. 그런 아파트를 나 혼자 쓴다면 참으로 사치스럽게 좋겠지요. 그러나 저라면 그렇게 살지 않을 것입니다. 제 필요에 비해 너무 크고 관리는 힘들 것이며 무엇보다 너무 비싸기 때문입니다.
이건 저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럴 것입니다. 그러니까 안내를 해주시는 분도 자녀의 수 같은 것을 묻습니다. 자녀라는 말이 등장하자 제가 왜 그 좋은 대형 평수의 아파트가 찜찜했는지 실마리가 풀리더군요. 대형 평수이지만 그런 구조로는 집의 공간은 한 덩어리고, 따라서 가족끼리 서로 부딪히게 되는 것을 피할 수가 없을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3월 16일에 <내 방의 품격>이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한 개그우먼 김윤희씨는 5억5천의 돈으로 이태원 경리단길에 4층짜리 협소주택을 지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녀는 그 집으로 이사하고 나자 아들과 싸울 일이 줄어들었다고 말합니다. 사춘기인 아이가 자기 공간을 가질 수 있도록 부모와 층수를 다르게 하여 떨어지고 나자 싸움이 줄어들고 더 가까워졌다는 것입니다.
저는 사람과 사람이 화목하게 살기 위해서는 너무 멀어서도 안 되지만 너무 가까워서도 안 된다고 종종 말하곤 합니다. 이 경우가 바로 사람과 사람이 멀어져서 더 가까워진 경우였습니다.
SBS에서도 얼마전에 <어쩌다 보니 개저씨>라는 프로그램을 방영했습니다. 이 프로그램의 주된 내용은 중년남성이 이유가 있건 없건 무례하고 강압적이며 부담스런 존재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내용 중 하나가 바로 사무실의 분리 문제였죠.
관리자는 감시를 위해서 혹은 거리를 가깝게 하기 위해서 사무실의 벽을 다 터버리려고 합니다. 휴게실 같은 구석공간을 만들 이유를 느끼지 않으며 회식에는 무조건 참가하라고 외치기를 좋아합니다. 그런데 젊은 세대는 그게 너무 싫은 겁니다. 그들은 관리자와 같은 공간에 있다는 것만으로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관리자가 자신들이 언제 드나들고 뭘 하는지를 다 본다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겠죠. 정도의 문제는 서로 다를 수 있는데 요즘 젊은이들은 전보다 훨씬 더 그렇습니다. 그래서 관리자는 자꾸 젊은이들에게 추근대는데 젊은이들은 도망가기 바쁜 광경이 자꾸 벌어집니다.
저도 기성세대입니다만 요즘의 어린 세대는 기성세대가 자랄 때와는 또 다릅니다. 지금의 중년 이상의 세대는 대개 큰 집에서 자라지 않았습니다. <응답하라 1988> 같은 곳에서 보여주듯이 한 방을 형제, 자매와 나눠서 쓰는 경우가 많았고, 그렇지 않다고 해도 집 자체가 작았습니다. 형편이 좋지 않은 사람들은 방 하나에 온 가족이 다 자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기성세대는 프라이버시가 없고 좁은 공간을 다른 사람과 공유하는 상황에 상대적으로 익숙합니다.
그런데 요즘의 아이들은 훨씬 프라이버시를 존중받으며 컸고 훨씬 자기 공간을 가지면서 컸습니다. 그러니까 오히려 자기 공간에 대한 갈망은 더욱 큰 겁니다. 그런 아이들과 아파트같은 공간에서 같이 살면 싸움이 나기 쉽습니다. 그런 공간에서 부모, 자식이 함께 할 때 엄마, 아빠는 자식이 뭘하는지 1분도 모르고 지나가지 않기 때문이죠.
반대로 부모도 아이들에게 자기가 뭘 하는지 다 알려주게 됩니다. 그래서 보기만 하면 공부하라고 말하는 엄마가 부담스러워 자기 방에서 꼼짝도 안 하는 아이들이 생기고 자식들 공부하라 해놓고 자기는 거실에서 티비보는 게 꺼림직해서 자기 집인데도 부모도 되도록 구석에서 꼼짝 못하는 경우가 생깁니다.
아파트에 살며 분리되어 있기 위해 지출하는 비용
물론 이렇게 살면 불편하죠. 저는 한국에 이렇게도 학원과 술집이 많은 이유 중의 하나는 이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결국 불편하니까 가족들이 집에 안 가는 겁니다. 5억이나 10억씩 때로는 그 이상의 돈을 들여서 융자 내서 산 집인데, 그 집을 지키는 사람은 하나도 없거나 종종 가정주부 한 명만 그 집을 독차지 합니다. 그리고 아이들은 아침에 나가서 심야에 이르도록 학원으로 뱅뱅 돌죠. 학원다니기는 힘들겠지만 요즘 아이들은 오히려 그걸 즐기기도 하는 것 같더군요.
그 이유는 그래도 집에 있는 것보다는 마음이 편하기 때문입니다. 부모의 잔소리가 확실히 줄어드니까요. 학원에서 뭘하고 있건 부모는 자식이 학원다니고 있다고 하면 일단은 다 공부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수업을 어떻게 듣는지, 오며 가며 얼마나 시간이 낭비되는지 같은 것은 일단 눈에 보이는 것은 아니니까요. 아이도 잔소리할 것이 뻔한 부모와 얼굴 마주 대고 있는 것보다는 바깥이 더 좋은 것입니다. PC방 같은 곳이면 더 좋겠지만 학원이 부모가 있는 집보다는 차라리 더 좋은 것이죠.
거의 같은 이야기는 남자들에게도 성립합니다. 남자들이 집에서 원하는 것 중의 하나는 자기 공간을 가지는 것입니다. 여자들은 집에서 하루 종일 일을 했다고 해도 기본적으로 자기 혼자 있었고 남편은 바깥에 있다 왔습니다. 그러니 또 다시 자기 혼자만 있고 싶어하는 남자가 섭섭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직장생활이란 대개 다른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일하고 감시당해야 하는 시간입니다.
그러니 누구의 시선도 신경 쓰지 않는 곳에서 한가하게 시간을 쓰고 싶은데 집에 돌아와서도, 비록 그것이 가족이라고 해도, 또 다른 사람이 내 일거수 일투족을 모두 보게 되는 상황에 처하면 그게 싫은 겁니다. 그런데 한국의 아파트에서는 대개 그게 안 됩니다. 그러니까 집에 안 들어가는 것이죠. 지하실이나 옥탑방이라도 있으면 가고 싶은데 말입니다. 한국남자가 돈을 내고 공간을 대여하는 가장 흔한 방식이 바로 술집에 가는 것입니다. 술까지 마시고 나면 정말 남의 시선이 주는 스트레스로부터 더 많이 벗어납니다.
이렇게 생각하고 이걸 전체적으로 보면, 한국 사람들은 아파트에 살면서 많은 비용을 지출하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바깥에서 술 먹고 학원비를 내느라 돈을 엄청나게 씁니다. 게다가 큰 집이 비싸서 융자까지 내서 집을 사니까 이자도 내야 합니다. 개인 공간이 없는 주거는 가족의 화합을 망가뜨립니다. 그렇게 살다보면 돈도 듭니다만 돈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도 생길지 모릅니다.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한국이 이렇게 사는 근본적인 이유는 한국의 아파트값이 상승해 왔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불편과 비용에도 불구하고 아파트 값의 상승이 그것을 보상해 준다고 한국 사람들이 믿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많은 사람들이 그저 타성에 젖어서 그래도 아파트가 좋다라는 말을 반복하는 것도 사실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통상의 아파트는 기본적으로 프라이버시를 가질 수 없는 집입니다. 그러니까 기본적으로 혼자 사는 집인 것입니다. 그게 아니라면 부부만 살거나 아이가 아직 어린 집에서나 문제가 크지 않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오직 소형 평수만이 경쟁력을 가집니다. 사실 요즘 대형 평수 아파트는 이미 인기가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대형 평수에서 혼자 사는 독신자가 한국에 몇 명이나 있겠습니까?
집이란 게 그저 한밤중에 들어가 잠이나 자는 곳이라는 의미뿐이라면 그래도 괜찮지만 요즘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여가시간이 늘었습니다. 그래서 집의 의미, 집의 용도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가만히 고민해 보면 설사 그 이유는 잘 모르겠다고 해도 대형평수의 아파트는 비싸기는 엄청나게 비싼데 별로 그 안에서 행복하고 편안하지 않다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바로 좋은데 행복하지 않은 겁니다.
집은 좋은데, 집에 사는 사람은 행복하지 않은 모순
아파트 평수는 클 필요가 없습니다. 더 커지면 물론 약간은 더 프라이버시가 보장되지만 그렇게 되면 관리도 힘들고 무엇보다 굉장히 비싸지기 때문입니다. 신혼부부가 빚내서 50평짜리 아파트에 사느니 10평짜리 20평짜리 아파트에 살고 그렇게 해서 절약한 돈의 일부로 더 좋은 차를 사고 카페나 식당에 더 자주 가고 이따금 펜션에 놀러가는 쪽이 훨씬 더 이득이 됩니다.
이것은 요즘은 집에서 짚신 안 만들어 신고 슈퍼에 가서 채소를 사다 먹지 텃밭에서 다 길러서 먹지 않는 이유와 거의 같은 이유입니다. 바로 공간의 아웃소싱인 것이죠. 공간을 독점으로 가지고 있는 비용이 너무 크니까 소유하지 않고 필요할 때마다 대여하는 것입니다.
서구에서는 똑같은 논리로 타이니 하우스 운동을 합니다. 단독주택에 사는 서구인들도 공간을 아웃소싱하여 아주 작은 집에서 살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아이들이 벌써 중고등학생 수준으로 커진 가족이 아파트를 엄청난 돈을 내고 사서는 그 안에서 버글거리며 사는 모습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일 것입니다.
일본에서는 단독주택이 주거의 대세입니다. 그 단독주택은 대개 작은 땅에 이웃집과 가깝게 지으며 보통 2층이나 3층입니다. 협소주택도 많지만 협소주택이 아니라고 해도 거의 협소주택에 가깝습니다. 한국의 전원주택들보다 훨씬 작습니다. 예를 들어 제가 일본에서 살 때 찍었던 동네의 풍경을 하나 보여주자면 이렇습니다.
이 집이 가지는 단점도 물론 있습니다. 그러나 일본집이 이런 모양을 가지면서 가지는 장점 중의 하나가 바로 집안의 공간이 이리저리 구분되어 가족들이 아파트에 사는 것보다는 훨씬 더 프라이버시를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너무 비싸지면 안 되지요. 그러니까 땅이 작고 옆집과도 달라붙은 집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아파트는 아파트의 장점이 있지요. 어떤 사람들에게는 아파트가 답일 수가 있습니다. 나이든 부부들이 종종 은퇴하고 한적한 곳에 전원주택을 짓지만 실은 노인들은 관리가 힘든 단독주택이 답이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이의 나이가 중고등학생 이상인 자녀가 있는 경우에는 아파트는 답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런 가족에게는 비싼 아파트에 사는 것이 돈 낭비입니다. 문제해결을 위해 은근히 돈을 쓰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대안이 거의 없습니다. 아파트 이외의 주거는 별로 발달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죠. 단독주택은 엄청 비싸거나 아주 외진 곳에 있고요.
제 경우에 고민하다가 찾은 답은 복층 주인세대라고 불리는 집이었습니다. 복층 주인세대는 단독주택은 아니지만 집안에 1, 2층이 따로 있어서 혼자 있고 싶을 때에는 집안에서도 따로 가 있을 공간이 어느 정도 있기 때문입니다. 2층도 있고 넓은 베란다도 있으니까요. 위에서 소개한 협소주택도 하나의 답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만 요즘은 아파트가 내부적으로 2층을 이룬 곳도 있더군요. 그러나 물론 어떤 집이건 이런 집들은 한국에서 쉽게 구할 수 없습니다.
집의 미래
아파트에 살기때문에 지출하고 있는 비용이 얼마나 되는가 하는 가는 쉽게 산수가 되어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단순히 단독주택으로 이사간 사람들과 비교해서도 답이 잘 안 나옵니다. 왜냐면 지금 단독주택으로 이사가기 위해서는 또 지출해야 하는 비용이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주거문화가 아파트 중심이기 때문에 지출해야 하는 비용이지요.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런 비용들은 아파트값의 상승으로 어느 정도 정당화되어왔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이제 더 이상 사실이 아닙니다. 지역마다 격차는 있지만 한국의 아파트 가격은 이미 7년 이상 제자리입니다. 오른 곳도 있지만 크게 떨어진 곳도 있습니다. 아파트 가격상승이 손실을 보전해주는 시대는 이미 끝났습니다.
이 때문에도 한국 사람들이 주거에 대한 고민이 더욱 절실해졌습니다. 아파트를 짓는다고 해도 복층구조를 가진 아파트를 짓거나 프라이버시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찾고 있습니다. 그냥 살던 대로 살면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큰 낭비를 하게 될 것입니다.
어쩌면 가까운 장래에는 자식이 중고등학생에 이르면 두 개의 작은 아파트를 나란히 임대해서 같이 쓰는 그런 일이 생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것은 한국의 기형적 주거문화가 만들어 낼 수 있는 기형적 미래입니다. 한국을 아파트로 채웠으니, 산과 강에 적응하면서 살듯 거기에 또 적응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죠 .
원문: 나를 지키는 공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