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진보’다?
활동을 하며 만난 사람들 중에는 일베나 새누리당에게 상처를 받은 사람들보다 같은 진영의 사람들에게 상처를 받은 경우가 훨씬 많았다. 내가 좋아하는 친구 D는 종종 “마이크, 피켓, 펜을 내려놓았을 때 사람들이 변하는 모습이 무섭다”며, “다른 무엇보다 그런 모습에서 인간에 대한 회의감이 든다.”고 말한다.
카페 활동을 하면서도 여러 번 비슷한 감정을 느꼈었는데, 사람들에게 상처란 상처는 다 줘놓고서 자신이 박근혜를 욕한다는 이유 하나로 스스로를 ‘진보적 인간’이라 자처하는 모순을 많이 접했다. 그래서 작년에 “진보는 정치적 입장만이 아니라, 구체적 삶의 태도이다.”라는 입간판을 쓴 적이 있다. 의견이 분분하기도 했지만, 꽤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는 것을 보면서 비단 우리만의 회의감이나 불편함은 아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체 그들이 말하는 ‘진보’란 무엇일까? 투표로 민주주의를 ‘실천’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의회 민주주의만이 ‘정치’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박근혜를 욕하며 비판적 잣대를 들이대는 사람이 ‘진보적 인간’일 것이다. 우리의 유일한 ‘적’은 새누리당이며, 그들을 처치하는 게 세상을 바꾸는 일이니까. 설사 그가 평소에 어떤 식으로 주변부의 사람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든 상관없이 말이다.
민주주의란 개개인의 주체적 삶과 목소리가 정치로 퍼지는 것
나는 민주주의나 정치를 그렇게 협소한 개념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과두제를 전제로 누가 통치하느냐의 차이로 ‘민주주의’의 달성 유무를 가리는 것을 거부한다. 나는 풀뿌리 민주주의를 꿈꾸며, 더디더라도 개개인의 주체적 삶과 목소리가 정치로 퍼지는 것이 민주주의와 정의의 실현이라고 생각한다. 불가능하지도, 이상적이지도 않다. 그런 민주주의를 위해서 작은 단위에서부터 공동체를 일구며 살아가는 많은 선배들이 있고, 기웃거리며 함께 하려는 청년과 청소년들이 있다. 우리도 있다.
내가 소수정당을 지지하는 이유는 농민, 청년의 목소리를 ‘대신 내주는 정치인’을 원해서가 아니라, 농민과 청년과 여성과 소수자들이 ‘직접’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정치 시스템’을 원하기 때문이다.
작년에 ‘더민주’ 청년위원회에서 활동한다는 한 이십대 청년이 카페에 와서는 “요즘 청년들이 어떤 고민을 하는지 들어보려고 왔다”고 말을 했는데, 나는 그 말이 무척 묘하게 들렸다. 요즘 청년들의 고민을 들어보고 싶다는 그의 태도에서는 ‘미래의 정치인’이라는 위치만 있었지, 동시대의 구성원으로써 자신의 고민과 입장이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왜’ 정치를 하려는 건지 궁금했다. ‘청년’들을 대변하겠다고 나선 새누리당 ‘청년’ 후보 조은비 씨에게 느꼈던 모순과 비슷한 지점일 것이다.
최근 <전태일 평전>을 다시 읽게 되었다. 전태일은 중학교도 제대로 나오지 못하고, 근로기준법 하나만을 몇 년 동안 닳도록 읽은 사람이었다. 그는 ‘맑스’나 ‘민주주의’, ‘정치경제’를 알지는 못했어도, 그 사상을 온 몸으로 살아낸 사람이다. 책을 쓴 조영래 선생님은 그에게 공부는 ‘사투’ 그 자체였다고 말했는데, 나는 전태일의 사상이 치열한 사투 속에서 무르익어 가는 모습을 보면서 공부는 삶과 부딪혀가면서 해나가는 거라는 걸 다시 한 번 배우게 되었다.
교통비를 털어서 더 가난한 사람들에게 빵 한 조각이라도 나누고 매일 두 시간이 넘는 거리를 걸어 다녔던 ‘생생한 사랑’의 언어는 그 어떤 사상과 구호보다 가슴을 울린다. 전태일은 정치적 구호를 외치진 않았지만, 또 정치인을 잘 알거나 선거운동을 하거나 시사이슈에 밝지도 못했지만, 삶으로 부딪치며 가장 정치적인 삶을 살았다고 생각한다.
삶의 정치를 주장한다
선거철이 되니, 여기저기서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 터져 나온다. 청년들보고 정치에 관심을 가지라고 윽박지르는 소리도 여전하다. 집에서, 학교에서, 자기 삶에서 자기 요구대로 살아본 적이 없는데, 자기의 목소리가 없는데 정치에서 어떤 목소리를 낼 수가 있을까. 시험 답안처럼, 있는 것들 중 그나마 맞을 만한 걸 고르라는 것이 ‘정치 참여’인가?
그래서 우리는 계속 ‘삶의 정치’를 주장한다. 자기 삶으로부터의 고민과 목소리가 없으면, 정치참여도 없다. 나는 여전히 ‘발화’가 아닌, 구체적 삶의 ‘태도’가 민주주의의 기반이라고 생각한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저지르는 폭력,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저지르는 배제와 억압을 경험하며, 추상적인 개념을 독점하면서 자의식에 심취한 사람들이 ‘대놓고 나쁜놈들’보다 더 무섭다는 걸 느끼기 때문이다. 우리의 정치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원문: 홍승은님의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