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는 콘텐츠를 위해 존재한다
1인기업은 자신을 파는 것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자신의 ‘콘텐츠’를 파는 것이다. 1인기업이 자신의 콘텐츠가 아니라 자기 스토리를 팔고 있으면 대단히 위험하다. 스토리는 곧 떨어질 장사 밑천이다. 그걸 믿고 덤벼서는 곤란하다.
물론 스토리도 유용하게 쓸 데가 있다. 스토리는 스스로를 자랑할 때가 아니라 콘텐츠를 효과적으로 보여주는 방법으로 쓰일 때만 유효하다. 즉 콘텐츠를 쉽게 이해하고 오랫동안 기억할 수 있게 도와주는 스토리라야 가치가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요새 강조되는 것이 ‘스토리텔링’이다. (알맞은 우리 말이 없을까 찾아봤지만, 별로 없어서 그냥 쓴다.)
스토리는 어떻게 콘텐츠를 강화하는가
그렇다면 스토리가 콘텐츠를 강화하는 예를 함께 보자. ‘장사지낼 장(葬)’ 자가 일상적으로 많이 쓰이는 한자이기는 하지만, 실제로 그것을 보지 않고 써낼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아래와 같은 스토리를 듣고 한번 도전해 보자.
쌍팔년도 이전이던가? 우리나라 TV에 미국 교양물이 연작으로 방영된 적이 있다. 제목은 ‘믿거나 말거나(Believe it or not)’이다. 세계적으로 희귀한 사건이나 현상 등을 보여줘서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켜주는 프로그램인데 당시 꽤 인기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한국에 대한 내용은 거의 없었지만 그 중에 하나 있던 게 꽤 충격적이었다. 한국의 전통 장례풍습이 무시무시하다는 얘기였다. 한국은 사람이 죽으면 바로 땅에 묻지 않고 야산에 시신을 가져다가 풀이며 나무로 덮어놓은 다음, 2년 이상 지난 후에 다 썩은 백골을 추려서 그제서야 매장을 한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촬영한 내용을 보여 주면서 나레이션이 흐르는데, 한국에 살던 나로서도 저게 도대체 무슨 소릴까 싶었다. 그래서 책을 찾아보니… 그건 모두 사실이었다.
원래 추운 지방에서 발원한 우리 민족은 죽은 후 육탈(肉脫)이 빨리 되어야 망자가 좋은 곳으로 간다는 믿음이 있었다. 그래서 사람이 죽으면 곧바로 땅에 묻지 않고 들것에 실어다가 야산에 놓고 풀과 나뭇가지로 덮어 가매장을 한다. 시신이 썩으면서 냄새를 풍기기 때문에 혹시 들짐승이 시신을 해칠 수도 있어서, 망자의 자손이 그 가묘 앞에 움막을 짓고 지켰다.
이 기간이 4계절을 두 번 반복하는 시간, 즉 만 2년이 넘는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삼년상’이라고 불렀다. 완전히 썩어서 육탈이 된 백골을 수습하여 땅 속에 매장하고 나면 망자의 자손은 할 일을 다하고 집으로 돌아간다. 이것이 ‘탈상’이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중국 문자인 한자가 이런 풍습을 아주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다. ‘葬’ 자를 보자. 시신(死)이 들 것(廾) 위에 실려있고 그 위를 풀(艸)이 덮고 있다. 들것은 ‘당까’라고 불리던 것―원래는 담가(擔架), 네모난 거적이나 천 따위의 양변에 막대기나 가벼운 관을 달아 앞뒤에서 맞드는 환자나 물건을 실어 나르는 도구―의 상형문자다.
자, 위 스토리를 듣고 나서 이제 다시 장사지낼 ‘장’자를 써보자. 어떤가? 이런 것이 콘텐츠를 뒷받침하는 실용적인 스토리의 힘이다.
무엇이 콘텐츠인가
지식노동자에게 콘텐츠는 지식과 경험이다. 물론 고객에서 공급하는 것은 서비스이므로 기존의 지식과 경험을 그대로 팔 수는 없다. 다만, 그가 가지고 있는 콘텐츠를 확인함으로써 고객은 1인기업에게 신뢰감을 갖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과거에 해 놓은 실적을 전시하는 포트폴리오가 콘텐츠의 전부는 아니다. 과거의 실적은 과거의 일일 뿐, 그 자체로 장래에 어떤 일을 잘 할 수 있다는 표지는 아니다.
이는 맛집이라고 소문난 식당에서 음식을 사먹는 것과 비슷하다. K, M, S 방송국에 나온(혹은 곧 나올) 집이라는 스펙을 가진, 3대 전통의 유구한 스토리를 가진 맛집이라고 해서 일부러 찾아갔지만 결과적으로 실망하는 경우도 꽤 있다. 이걸 방지하기 위해 사람들은 사전 확인작업을 한다. 우선, 방문 후기를 참고한다. 다른 고객들의 평가를 들어보는 것이다. 가끔 블로그 포스팅이나 댓글을 꾸며내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 속성상 오랫동안 많은 수의 조작을 만들기는 어렵다. 여기까지가 스토리다.
영리한 식당은 사용하는 식자재의 구입경로, 보관상태와 조리과정을 자세히 밝히기도 한다. 그리고 자기집 메뉴가 다른 집의 그것과 어떻게 다른지를 보여준다. 사장과 요리사의 요리에 대한 애정과 철학을 묘사하기도 한다. 아주 구체적으로. 그런 콘텐츠가 고객에게 신뢰를 준다.
콘텐츠는 그 주인의 지식뿐 아니라 일에 대한 관점, 세계관, 태도, 개성 따위를 종합적으로 보여준다. 그래서 더더욱 중요한 선정기준이 된다. 업무 파트너라고 해서 지적인 능력만 보고 결정하지는 않는다. 오래 쌓인 콘텐츠는 지식 그 이상을 보여준다. 콘텐츠를 보면서 고객은 정보를 얻을 뿐 아니라 그 제공자의 관점에 동의하게 되고, 개성에 끌리게 된다. 이런 정서적 동조는 1인기업이 가진 업무능력에 대한 신뢰 그 이상의 것이다. 그래서 1인기업의 마케팅은 ‘콘텐츠 마케팅’으로 귀결된다.
콘텐츠를 공개해야 고객이 온다
가끔 자신의 콘텐츠를 밝히는 것을 꺼리는 전문가들이 있다. 그 자체로 영업비밀이 된다고 믿는 경우다. 과연 그럴까?
내가 독립을 준비하면서 KOTRA에 아프리카 비즈니스 칼럼을 연재할 때다. 예전 직장의 선배가 해외에서 메일을 보내왔다.
“까를로스(내 가명이다),
너무 그렇게 자세하게 알려주지 마.
밑천 떨어져.”
내 회신은 이랬다.
“사이먼(선배의 가명이다),
그 정도가 밑천이면 장사는 뭘로 하라고.
이건 밑밥이야.
좀 뿌려줘야 손님이 꼬인다니까.”
(우리는 이 정도로 경제적인 커뮤니케이션을 구사하는 사이다…)
라디오나 TV에 나와서 법률상담 하는 변호사를 생각해 보자. 변호사가 청취자 사연에 아무리 자세하게 설명을 해준들, 그 사연의 주인공이 혼자 문제를 풀어나갈 수 있을까? 서점에 가도 법률을 설명해 놓은 책들은 많지 않은가. 하지만 아주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런 설명만 보고 혼자 대처할 수 있는 일반인은 거의 없다. 의사도, 컨설턴트도 마찬가지다.
전문가가 콘텐츠 공개를 통해 역량을 보여주기는 하지만, 고객의 구체적인 문제는 현실적 맥락(Context) 속에 존재하므로 고객이 전문가의 콘텐츠를 스스로 변용하여 문제를 풀 수는 없다. 전문가는 그런 존재다. 문제가 생긴 청취자는 결국 라디오나 TV에 등장했던 전문가를 찾아간다. 본인이 ‘알고 있는(!)’ 최고의 전문가니까.
프로는 스펙이나 스토리로 자신의 능력을 주장하지 않는다. 자신이 가진 콘텐츠를 보여주면 된다. 과거에는 콘텐츠를 들여다 볼 수 없으니 스토리를 들었고, 스토리를 믿기 어려우니 스펙을 따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콘텐츠를 보여줄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바로 소셜 미디어에 글을 써서 말이다. 1인기업은 자고로 ‘써야’ 한다. 기-승-전-글쓰기다. (뭘 어떻게 써야 할지는 다음 글에서 계속.)
원문: 개발마케팅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