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요한 경우, 천천히 최상의 답을 정리하는 게 나에게도 가장 이롭다
오래전에 신문 칼럼에서 보았던 한 교환 교수의 이야기가 있다. 대략 다음과 같은 경험담이었다(기억을 되살려 쓰는 것이므로 만약 당사자께서 본다면 당시 세부 내용 그대로가 아닐 수는 있다. 하지만 맥락은 같다).
교환 교수로 미국에 간 그는 수업 하나를 맡았다. 대학 1학년 수업이었다. 주제로 미리 제시해 주었던 한 사회 문제에 대해, 한 명씩 나와서 자신의 생각을 밝히고 해결책에 대해 말하고 또 토론해야 했다. 어느 정도는 표준적인 내용과 해결안이 이미 나와있는 주제인지라 교수는 학생들이 수월하게 발표와 토론을 진행하리라 예상했다 한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나와서 말하는 내용들이 하나같이 시답잖고 ‘대학생이 맞나?’라고 생각할 정도로 실망스러웠다고 한다. 한국 학생들 같았으면 이런저런 자료를 미리 찾아서 내용과 해결책들을 보고, 그걸 정리해와서 깔끔하게 발표할 것인데 그 미국 학생들은 그렇지 못했던 것이다. 수업의 전반과 중반에 걸쳐 학생들이 하나마나한 이야기들을 발표하고 또 토론하는 것을 계속 보면서 교수는 점점 지루해져 ‘차라리 내가 답을 이야기해 줘 버릴까?’라는 생각도 했다 한다.
그런데, 수업의 후반에 접어들자 놀라운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단다. 도저히 정리되지 않을 것 같은 내용들이 정리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아주 훌륭한 결론까지 내더란다. 오히려 미리 외부 자료를 찾아 정리한 경우보다 더 훌륭하게 말이다. 가만히 살펴보니, 시답지 않았다 생각했던 발표들이 진행되면서 학생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던 게 아니었다. 서로가 서로의 생각을 공유하고 또 그것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고유한 생각을 구축하고 다시 그것을 발표하면 또 그것을 바탕으로 계속 정리하면서 핵심에 다다렀던 것이다.
한국 학생들은 이런 경우 미리 만들어져 있는 내용과 정답을 외부에서 찾아서 그걸 정리하고 발표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내용은 훌륭하지만 그것은 스스로 만든 것이 아니다. 만약 그 자리에서 다른 주제를 준다면 자력으로 그와 같은 아웃풋을 만들지 못할 것이다.
그에 반해 미국 학생들이 가졌던 가장 큰 차이점은, 비록 처음엔 뭐가 뭔지도 잘 모르는 수준에서 출발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해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동시에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내용들을 자기 것으로 흡수해서 활용할 줄 알았던 것이다. 심지어 자기가 모르거나 자기와 반대와는 내용까지도 말이다. 그래서 계속 조금 전보다는 한 단계 더 발전하고 정리된 생각을 구축할 줄 알았던 것이다.
즉 ‘생각을 하고 답을 얻기 위해 자신의 것만이 아니라 타인의 것도 함께 이용’할 줄 알았던 것이다. 이것은 단지 이론으로만이 아니라 체화되어야 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 자신이 옳다는 것, 자신이 안다는 것을 주장하는데 급급한 게 아니라 효율적인 방법으로 제대로 된 결론을 이끌어 내는 것이 자신과 타인 모두를 위한 것임을 아는 것이다.
왜 우리는 그토록 빨리 ‘유일한 정답’을 결정지으려 하고 또 ‘정답자’가 되려 할까?
살아가면서 우리는 매 순간 ‘정답’을 찾아야 한다. 정답은 항상 고정되어 있지 않다. 상황에 따라 계속 변해간다. 그래서 정답은 정해진 그 무엇이라기보다는 ‘항상 움직이는 지금 이 순간에 가장 적절하고 최선인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런 정답을 구하는 상황도 가지로 구분이 된다. 하나는, 정해진 시간 안에 신속하고 정확한 답을 찾아야 하는 경우다. 이럴 땐 당연히 주어진 조건 안에서 최선의 정답을 찾아 적용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런 상황에서 중요한 것은 ‘속도와 적절한 시기’이기 때문이다. 물론 기본적인 정답으로서의 요소는 충족해야 한다.
또 하나는, 굳이 그렇게 빨리 정답을 결정하고 주장할 필요가 없으면서 가장 최선의 답을 찾는 경우이다. 관계와 일상과 일에서는 사실 이럴 때가 많이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한 없이 늘어지는 건 아니다. 이럴 때조차도 비록 급하진 않지만 시간상, 상황상의 마지노선은 분명 있게 마련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 중요한 것은 그 정답의 ‘내용’이지 ‘내가 얼마나 빠르게 나만의 정답을 말할 수 있는가’는 아니다.
문제는 명백히 두 번째 상황에 속하는 경우들에서조차, 우리가 너무 급하게 혹은 강박적으로 ‘최종적으로 옳은 정답’을 결정하고 또 강하게 주장하려는 부분이다.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있는 ‘빠른 정답자’가 되기를 원한다. 그런데 이 경우 우리가 진짜 하고 싶어 하는 건 ‘올바른 정답 구하기’라기보다는 ‘내가 옳다’는 것을 되도록 빨리, 되도록 강하게 주장하는 것이겠다.
여기엔 세 가지 욕구가 섞여 있다. 하나는 ‘빨리’ 그렇게 말하고 싶은 것. 또 하나는 ‘옳다’를 주장하고 싶은 것. 마지막으로 ‘나’를 강조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하면 주객이 바뀐 것이다. 본래 목표로 해야 할 것은 사라지고 엉뚱한 것이 목표가 된 것이다.
현재 한국 사회와 그 구성원인 우리들에게 왜 이런 성향이 강하게 생긴 걸까?
‘빠른 정답과 정답자’를 필요로 하던 시대, 그리고 왜곡된 문화들
전후 몇십 년 동안 우리 사회는 빠른 정답과 빠른 정답자들을 필요로 했다. 그것은 하나의 능력이었다. 주어진 시간 안에 그나마 가장 적절하고 효과적인 답을 찾고 그것을 주장하고 실행하는 것. 그 덕분에 아주 빨리 발전을 이룰 수도 있었다.
더하여 왜곡된 유교 문화와 기형적 군대 문화의 영향도 적지 않았다. 치우친 가부장적 문화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경우는 ‘빠름’의 문제보다는 다양성과 배려를 고려하지 않는 문화 그리고 지나치게 대접받는 ‘결정권자의 권위’ 등이 문제다. 즉 그 결정이나 선택, 정답이 정말 적절하고 가장 효과적이어서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허락된 ‘결정권자’가 내린 것이기 때문에 즉각적으로 구성원들이 복종하고 일률적으로 받아들이고 실행되었던 것이다. 심지어 그 결정권자의 진짜 실력이나 능력이 부족한 경우에도 말이다.
이런 문화에서는 정답을 정하는 과정은 다분히 독단적이고 주도적이어야 했다. 내가 혹은 내 무리가 답을 최대한 빨리 내놓고 주장해야 했다. 다른 이들이 내놓은 내용, 자료, 정답은 듣지도 않고 고려하지도 않았다. 그럴 시간이 없었고, 그럴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그런 의식, 그런 문화가 아니었다. 그래서 다른 내용과 답들을 기꺼이 들으며 그것을 내 것으로 소화하고 그 바탕에서 더 완전한 나의 답 혹은 우리의 답을 만드는 과정이 훈련되지 못했다. 우리 모두가 그랬다.
과거엔 어느 정도 이 방법도 통했다. 지금보다는 훨씬 단순한 세상이기도 했고 또 경쟁자들도 많지 않았다. 문화적으로도 용납되었다. 무엇보다도 그게 익숙했다. 빠른 결정과 일사불란한 행동은 다분히 효율적이었다. 마침 환경적으로도 그런 결정들이 어느 정도 이상의 효과를 만들 수 있기도 했다.
하지만 세상은 바뀌었다.
이제 ‘정답’을 만드는 데 있어 다른 방법론, 다른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 이제는 그것이 능력이다.
이제 많은 것이 바뀌었다. 내부적으론 사회의 모든 분야가 엄청 복잡해졌으며, 외부적으론 국제 사회에서의 경쟁자들도 많아졌고 심지어 이미 우리를 치고 앞서 나가는 나라들도 있다. 더 이상 ‘과거의 방식’은 통하지 않는다.
그리고 꼭 이런 국제적 정세나 시대의 문제가 아니더라도 더 이상 이전의 문화(왜곡된 유교적, 군대 문화의, 왜곡된 가부장제의)로 살아가면 안 된다. 왜냐하면 그런 문화는 결국 나와 너, 우리 모두를 고통스럽게 하고 힘들게 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미성숙의 문화였다.
그 문화와 방법론이 이전에 어느 정도 통하긴 했지만 그것이 최상의 것은 아니었다. 할 수 있었다면 좀 더 성숙하고 좀 더 효율적인 ‘정답 만들기’ 문화를 처음부터 만들어야 했다. 시대가 바뀌어서 그래야 하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그래야 했다.
‘빨리 정답 정하기’, ‘너무 빨리 최종적으로 옮음을 주장하기’는 너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문제이다.
그런데 이 문제는 특정인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사실은 이 사회에 속한 우리 모두의 공통 문제이다. 어떤 사안이 생겼을 때 되도록이면 ‘빨리’ 정답을 정하고, 그리고 그것을 강하게 주장해야 하고, 그렇게 ‘나’를 강조하는 문제 말이다. “나는 괜찮은데 네가 문제야. 너의 태도를 고쳐.”라고만 하는 게 아니라 내 쪽도 같이 살펴보아야 한다는 뜻이다.
SNS가 발달한 지금은 이 현상을 관찰하기에 더 좋다. 독자들은 최근에 온라인 상에서 달아올랐던 몇 가지 사회적 이슈들을 떠올려 볼 수 있을 것이다. 어떤 것은 문화적 문제였고 어떤 것은 유명인과 관련된 문제였다. 또 어떤 것은 정치적 문제였고 어떤 것은 종교적 문제이기도 했다. 역사적 문제도 있었고 윤리적 문제도 있었다.(이 글에서 특정 사건을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는 이유는 그러한 이슈는 항상 새롭게 등장하고 지나가기 때문이다)
어느 경우에서든, 내가 그리고 우리 사회가 얼마나 ‘급하게 최종적으로 옮은 정답’을 내리려 했었는지 한 번 되돌아보자. 유명인들의 스캔들, 정치인과 정치적 상황, 소수자 인권과 관련된 여러 사회적 이슈 등등. 그리고 꼭 그런 큰 사건들만이 아니라 나와 지인들만 연관된 소소한(하지만 당사자들에겐 큰) 일들도 마찬가지다. 크기만 다르지 똑같은 현상이다. SNS상에서의, 직장에서의, 학교에서의, 여러 공동체에서의, 가정 등등에서의 그 모든 오해와 섣부른 단정, 만들어지는 소문과 편견과 뒷담화. 그리고 이어지는 상호 불신과 서로 주고받게 되는 상처.
글의 첫머리에 나왔던 한 한국 교환 교수의 경험에서 처럼, 사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최대한 여러 입장과 주의를 듣고, 상황과 정황을 파악하고, 자료와 정보를 취합해서 그를 바탕으로 가장 적절한 ‘결론, 정답, 판단, 선택’을 내리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하는 게 나에게도 가장 유리하고 이익이 된다. 최소한의 정보와 관점만 가지고 내리는 답과 최대한의 정보와 관점을 가지고 내리는 답 중 어느 것이 더 효율적이고 적절한지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그러나 보통 우리는 어떻게 하는가? ‘지금’ 내가 알고 있는 것만을 가지고 우선 빨리 답을 내리려 한다. 아직 아무것도 모르면서 내가 가진 첫 번째 느낌이나 초기의 짐작을 가지고 이미 ‘최종 답’을 내려 버린다. 마치 누가 옳고 그른지, 무엇이 맞고 틀린 지를 결정하지 못하면 뭔가 잘못하는 것 같고 뭔가 문제가 있는 듯 느낀다. 이건 사실 그동안 받아온 사회적 세뇌 때문이다. 왜곡된 문화 때문이다. 옳은 방법, 좋은 방법이어서가 아니라 그렇게 하는 게 몸과 마음에 익숙해진 것이다. 하지만 주의해야 한다. 익숙한 것이 옳은 것은 아니다.
좀 더 정보를 모으려 하고 다른 의견을 들으려 하면 뭔가 ‘내가 부족해서 그런가? 내가 확신이 모라자나?’하는 느낌이 오기도 한다. 그렇게 하려는 타인에 대해서도 그렇다. 뭔가 부족하니까 빨리 결정과 선택을 못하고 정답을 못 내리는 것이라고 느낀다.(이러한 느낌도 물론 왜곡된 것이다)
그리고 그 후에 취합하거나 보게 되는 주장과 자료도 내가 ‘그럴 것이다’라고 짐작한 색깔에 맞는 것을 주로 보게 된다. 다른 주장이나 반대 주장은 의도적, 비의도적으로 피하기도 한다. 심지어 보아도 안 본 게 되기도 한다. 새롭게 보게 된 그 내용과 자료들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기존의 답이 바뀌지 않는다. 내가 정한 ‘옳음’이 새로운 정보로 인해 변화하는 과정이 일어나지 않는다. 사실 나는 이미 ‘최종 정답’을 정해 놓은 것이다. 그 후의 정보 취합 과정은 일종의 요식행위라고 할까.
하지만 그렇지 않다. 빨리 최종 답을 정하지 않는 것이 뭔가 ‘모자라서, 부족해서, 몰라서’ 그런 게 아니라는 말이다. 적절하고 좋은 답을 내리려면 우리는 모두 충분한 정보와 시간과 숙고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 그렇지 않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게 정상이다. 그게 당연하다. 그리고 (빠른 결정이 필요한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곤) 그에 걸리는 시간과 노력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다. 들인 만큼 내게 이롭고 유용한 결과를 가지게 된다.
어떻게 ‘정답’을 찾는 게 가장 이익일까? (다시 주의: 익숙한 것이 옳은 것은 아니다)
우선은 ‘최종적 옳음’을 좀 유보하자. ‘최종적 정답’을 너무 빨리 확정 짓지 말고 여유를 가지자.
그렇게 하려면 내가 ‘옳음과 정답’을 정하는 기존의 방법과 과정을 잘 관찰해야 한다. 그래서 앞서 말한 그런 오류가 있다면 나의 이익을 위해서도 바꾸어야 한다. 왜냐하면 더 이상은 통하지 않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본래부터도 통하지 않았었다. 내가 그 오류에 매몰되어 있으면 다른 이들이 항상 더 적절하고 효과적이며 정확한 답을 가질 확률이 많아지게 되기 때문이다. 만약 그와 내가 직접적으로 경쟁 등의 대응을 하게 되는 상황이라면 당연히 내가 지게 된다.(물론 많은 경우 꼭 이런 대결의 관점으로 볼 필요는 없지만 스스로 경각심을 일으키기엔 이게 좋다)
그 오류란, 앞서 말했듯이 너무 ‘빨리’ 정답을 정해 버리려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미 답을 안다’를 믿고 주장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즉 ‘나는 이미 옳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다. 밖으로 직접 표현하지 않는 내부에서 스스로 그런 느낌을 가지고 싶어 한다. ‘나는 옳은 답을 이미 알고 있다’고 스스로 믿고 싶어 하는 심리. 안 그러면 뭔가 불안할 것 같은 마음. 그리고 이 모든 것은 결국 ‘나’를 주장하고자 하는 오류와 연결된다. 나를 주장하는 것이 나쁘다거나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그게 아니라 ‘최대한 효율적이고 정확한 답’이 필요하고 그게 목적이라면 그 본래 목적에 집중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익숙한 것을 옳은 것으로 여기는 오류’도 잘 살펴야 할 부분이다.
스스로를 살펴보자. 내가 가진 부족한 정보와 생각으로 섣부르게 내린 결론을 이미 최종 정답으로 여기고 그것을 주장하는 패턴을 가지고 있지 않은 지. 제대로 된 답이 목적에 아니라 ‘내가 옳다’를 믿고 싶음에 불필요하게 사로잡혀 있는 것은 아닌 지. 그 패턴 때문에 내 답과 반대가 되거나 수정이 필요한 정보와주장이 그것을 보면서이미 옳음’을 지키기 위해 기존의 정답을 바꾸지 않고 있지는 않은 우리는 ‘나와 나의 주장’과 ‘되도록 정확한 답, 선택, 결론’ 중에 어느 것이 더 중요한지 엄중하게 판단해야 한다. 나를 위해서. 너를 위해서. 모두를 위해서.
우리의 목표는 가장 최선의 ‘의견과 생각과 정답’들이지 ‘나와 나의 주장의 무조건 옳음’이 아니다. 둘을 혼동하지 말자.
내 생각, 내 의견, 내 정답을 ‘나’와 동일시하고 그리고 나의 자존심과 동일시해 버리고, 그것을 지키려 하는 우리의 패턴을 자각하자. 즉 ‘나’를 그런 식으로 지키려 하는 무의식적 욕구이다.(물론 나의 이익을 위해 의도적으로 고집하는 경우는 예외이다)
우리가 선명히 알아야 할 것은, 실제 문제를 해결해야 할 때는 그게 전혀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이다. 오히려 반대로 손해를 끼치는 경우가 많다. 최종적으론 나와 타인 모두 피해와 고통을 준다. 우리가 정말 해야 할 것은 ‘누가 옳으냐 그르냐, 맞느냐 틀리냐’를 빨리 결정하거나 겨루는 것이 아니라, ‘내가 옳다’를 빨리 보여주는 것도 아니다. 나와 너를 포함한 우리 모두를 위해 효과적이고 정확한 의견, 생각, 정답을 함께 도출해 내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1. 내 주장, 내 생각, 내 의견, 내 정답과 ‘나’와의 동일시에서 좀 더 자유로울 필요가 있다.
2. 진짜 이기적인 것은, 내가 모르거나 나와 반대되는 내용과 주장과 정답을 가장 잘 이용하는 것임을 알자. 그래서 나의 생각, 의견, 정답을 더 정교하고, 적절하고, 쓸모 있게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항상 ‘최종적인 답을 천천히 구하고, 그 답이 구해질 때까진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아님을 주의하자. 각 단계에서 그에 맞는 ‘가장 효과적인 단계별 정답’을 유동적으로 찾아 잘 이용해야 한다. 다만, 그와 별개로 계속 더 나은 답, 더 효과적이고 더 실용적인 답을 찾아가는 것을 멈추지 않는 것이다. ‘끝까지 정답이란 없다’고 여기자는 말이 아니다. 그게 아니라 매 단계, 매 수준, 매 상황에서의 최상의 정답은 꼭 찾고 또 실제 적용하고 결과를 얻되, 그와 별개로 항상 더 나은 정답에 대한 가능성을 열어 놓는 것이다.
미국 학생들이 했던 것?: 제대로 된 소통으로 저절로 중심이 잡히게 하다.
결국 위 사례의 미국 학생들이 했던 것은 무엇일까? 그들은 ‘내가 안다. 내가 옳다’가 목적이 아니었다. ‘제대로 된 결론, 선택, 정답’을 함께 찾고 만드는 것이 목적임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는 데 있어 타인의 앎과 생각을 이용할지혜가 있었다. 여기에는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힘’도 있지만 그에 더해서‘내가 모르는 것, 나와 다른 것까지도 기꺼이 받아들이고 이용하는 힘’도 포함된다. 무엇보다도 ‘최종적인 답’을 이끌어 냄에 있어 충분한 과정과 자료, 시간과 노력을 기꺼이 들이고자다.
우리, 너무 급하게 ‘내가 옳다’와 ‘최종적 옳음’를 가지려 하고 주장하려 하지 말자. 굳이 그런 거 필요 없다. 게다가 그건 고작 작은 심리적 만족만 줄뿐 실제로는 나와 타인 모두에게 손해를 끼 끼친다.
그때 그때 자신이 생각하고 주장할 수 있는 ‘옮은 것’을 서로가 자유롭게 말하고 소통하자. 나의 자유로운 표현을 나도 허락하고 또 상대의 자유로운 표현도 허락하자. 그렇게 계속 서로에게 말하고, 서로의 말을 들으며 자신의 생각을 수정해 나가다 보면 저절로 서서히 중심이 잡히게 된다. 그렇게 충분한 과정을 통해 잡힌 중심을 함께 공유하는 이다. 그러면 또 그다음 더 온전한 중심이 새롭게 잡힌다. 이 과정이 계속 상승, 반복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각자 ‘중간 과정에서 옳다고 여기는 것’을 최선을 다해 주장하자. 그래야 나와 상대에게도 도움이 된다. 과정의 중간이라고 어물어물 생각하거나 주저주저 말할 필요 없다. 그 순간, 그 단계에서 맞다고 여겨진다면 선명하게 말하면 된다.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라고. 그래야 그 단계에서 가장 적절한 중심이 형성된다. 그리고 급한 일, 우선순위가 필요한 일은 또 그 상황에 맞추어하면 된다. 꼭 ‘최종적 옳음, 마지막 정답’이 아니더라도 각 상황에 가장 최선이 되는 ‘그 상황, 그 단계에서의 작은 최종적 정답과 옳음’을 만들고 이용하자. 할 건 다 하자.
다만, 그러는 와중에 그게 최종이 아님을 항상 인지하자. 절대와 전부가 아님을 자각하자. 굳이 그것을 전부로, 마지막으로 삼지 말자. 그러면 계속 더 나은 정답, 더 적절한 선택, 더 좋은 결론을 찾을 수 있다. 이러한 흐름을 함께 하고, 서로 신뢰하고 믿자. 자신과 모두에게 이익이 된다. 모든 건 흐르고, 모든 건 변하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