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헤겔은 “자유는 필연의 인식이다”라고 했다. 적극 동의한다. 마찬가지 원리로 ‘전략적 사고’의 본질은 제약조건을 정확히 인식하는 것이다. 제약조건을 인식하고, 주어진 실제 선택지가 무엇인지를 탐색하고, 그 테두리 안에서 실천을 통해 새로운 가능성을 만드는 작업, 그것이 바로 전략적 사고에 기반한 ‘실천적 접근’이다.
2.
민주화 운동세력, 진보-운동권 출신들의 다수는 한국을 ‘기울어진 운동장’이라고 표현한다. 이는 최초 유시민의 표현이었지만 지금은 하나의 대명사가 되었다. 정말로 운동장이 오른쪽으로 기울어져 있다면, 그래서 나라를 팔아먹어도 새누리당을 찍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사실로 간주한다면, 우리의 실천적 선택지는 무엇이 되어야 할까?
하나는 세상을 비난하고 저주하며 ‘패배가 분명한’ 선택을 반복하며 정신승리에 만족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오른쪽’으로 같이 기울어져 오른쪽(세력)을 갈라치기하는 것이다. 그럼, 우린 51% 이상의 득표를 할 수 있다.
오른쪽 세력과 정치연합을 통해 ‘다수자 정치연합’을 결성하고, 연합세력 내부의 헤게모니를 유지하는 전략. 운동장이 기울어져 있는 게 사실이라면, 이게 정치적으로 가장 지혜로운 접근이다. 그게 바로 1997년 김대중-김종필의 DJP연합이었다. DJP연합이 없었다면, 우리는 지금도 정권교체를 경험해보지 못했을 것이며, 운동권-민주화 운동세력이 사회경제적 이슈에 대해 이렇게 형편 없고 무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는 기회도 갖지 못했을 것이다.
다수자 정치연합은, 내각제를 채택한 유럽에서는 흔한 일이다. 심지어 스웨덴 복지국가를 주도했던 스웨덴 사민당은 1932년 총선에서 압승했지만 과반에는 미달됐는데, 그때 우리로 치면 ‘자민련’같은 이념적으로 가장 오른쪽 세력인 중앙당(=농민당)과 연정을 했다. 그리고 당시 스웨덴 공산당과는 오히려 거리두기를 했다.
3.
진영 국회의원. 박근혜 정부 초대 보건복지부 장관을 했다. 박근혜가 기초연금 정책을 도입하되 국민연금과 ‘연계하여’ 국민연금 가입자에게는 불이익을 주려고 하자 (국민연금 제도의 취지를 훼손할 수 있어) “양심에 반한다”며 반대했다. 그 이후 모욕적인 상황을 겪으며 쫒겨났다. 진영, 채동욱, 유승민, 조응천. 이들은 박근혜 정부 하에서 자신의 소신을 지킨 댓가로 온갖 모욕을 당하며 쫒겨난 대표적인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근혜와 새누리당의 지지율은 언제나 민주당 지지율을 압도적으로 상회했다. 국민들은 민주당이 ‘더’ 싫었던 것이다. 왜? 반대만 하니까. 허구한날 지들끼리 자리싸움만 하니까. 경제에 대해 무능하니까. 근데 자신들과 생각이 조금만 다르면 저주를 퍼부으며 공격할 정도로 배타적이고 편협한 세력이니까.
진영 의원이 공천에서 컷-오프 되자마자 평소 친분이 두터웠던 김종인 대표가 영입 작업에 착수했다고 한다. 언론보도에 의하면 더민주 입당 가능성이 유력하다고 한다. 적극 환영한다. 전통적인(?) 민주당 지도부라면 상상하기 어렵고 실현되긴 더 어려웠을 것이다. 김종인 체제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진영 의원은 새누리당에서 넘어오는 것이지만, ‘정책적 맥락’으로 접근하면 더불어민주당의 정체성에 ‘소신-양심’ 수준에서 부합하는 사람이다.
4.
큰 싸움일수록 형세가 중요하다. 진영의 더민주 입당이 현실화되고, 조해진-이재오가 탈당하고 유승민이 컷-오프 이후 탈당 및 무소속으로 출마할 경우, 그래서 무소속연대 혹은 비박연대를 꾸릴 경우, 그때 형세는 ‘반 박근혜 통일전선’의 외양을 띄게 된다.
현재까지 총선 형세는 ‘박근혜 정부 심판론(=더민주 프레임)’과 ‘야당·국회 심판론(=박근혜 프레임)’, 그리고 안철수의 ‘동시 심판론’이 혼재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야당이 분열되어 새누리당의 어부지리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김종인 대표체제의 등장 이전까지만 해도 더민주는 60~70석도 어려울 것으로 전망됐었다.
2017년 대선을 이기고 싶은가? 정권교체를 하고 싶은가? 그럼 우리는 가치지향은 선명하되, 정책적으로는 창의적이면서도 논리적 정합성이 높아야 하고, 정치적으로는 유연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회경제적 구조개혁과 경제민주화를 전면에 내걸고, 그에 부합하는 총체성을 간직한 각론 차원의 정책을 제출하고, DJP연합처럼 ‘다수자정치연합’을 추구해야 한다.
특히나 2017년 대선 승리까지를 내다보는 포석의 일환으로 총선을 임한다면, 박근혜를 포위해야 한다. 정치적으로도 포위해야 하고, 인물의 배치에서도 포위해야 하고, 정책적으로도 포위해야 한다. 그것은 단순히 ‘오른쪽’으로 가는 것과는 다르다. 정치적 구도도 중요하고, (가치지향이 담긴) 정책적 지향도 매우 중요하다.
복지국가와 경제민주화(=좋은 경제성장)의 가치지향에 근거하되, 진영 의원같은 ‘중도-합리적 보수’를 포괄하는 담대한 그림을 그려야 한다. 총선승리를 위해서도, 대선승리를 위해서는 더더욱.
원문: 최병천님의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