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저기서 들려오는 각종 ‘개념녀’에 관한 이야기들을 들으며 이 수많은 개념녀들은 어디에서 왔는지, 개념녀 VS. 무개념녀에 관한 수많은 이야기들은 어떤 욕망들을 담고 있는 것인지에 대해 궁금증이 도졌다. 부족하지만 직업병을 발휘, 사회심리학의 관점을 따라 굽이굽이 궁금증을 풀어보기로 했다. 사견이 많이 담긴 글임을 미리 일러둔다.
변화의 고통: 인간의 기본적 보수성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변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변화로 인해 지금까지 ‘당연히 그러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달라지면 그간 익숙했던 방식에서 탈피, 새 기준에 맞춰 사고하고 행동해야 한다. 그런데 이런 ‘적응’ 과정에는 심리적으로 상당한 비용이 수반되기 마련이다.
- 우선 새 상황에 적응적으로 행동하기 위해 열심히 머리를 굴려야 한다.
- 또한 기존의 익숙하고 편한 사고와 행동을 억누르고 새 방향으로 자신을 조절해야 한다. 이렇게 되면 게임에서 고급기술이 MP를 많이 소모하는 것 같이 에너지를 상당히 많이 소모하는 고급 기술인 ‘자기통제’를 시전해야 한다.
- 마지막으로 변화는 그간 쉽게 예측 가능했던 것들을 더 이상 예측 가능하지 않게 만들기도 한다는 점에서 ‘불확실성’과 그로 인한 불안, 짜증 또한 높인다.
사람들 마음속 깊은 곳에 ‘변화 개새끼론’이 자리 잡고 있어도 이상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변화를 기피하곤 한다. 연구에 의하면 상황이 불확실할 때는 변화를 불러올 것 같은 새로운 아이디어들조차 싫어하게 된다고 한다(Mueller et al., 2012). 그런데 만약 ‘밥그릇’ 같이 엄청나게 중요한 것이라면 사람들은 더더욱 변화에 신중해질 것이다. 상황이 중요한 만큼 변화의 ‘파장’이 클 테니.
현 상태 유지를 위한 피해자 비난하기&위로
이렇게 변화가 힘들기 때문에 권력관계 같은 아주 굵직한 사회 구조들이 변하려 할 때, 기존 사회에서 별 불편 없이 살아온 사람들(소위 기득권)은 가급적 현 상태를 유지하려는 경향을 보이게 된다(Hafer & Begue, 2005).
변화를 저지하고 현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우선 ‘체제 정당화’라는 물밑 작업이 필요해진다. 연구들에 의하면 이런 체제 정당화 작업은 현 체제 안에서 불편을 겪는 사람들에 대해
- ‘사회가 나쁜 게 아니야! 순전히 니들이 못나서 그런 거라고’라는 피해자 비난하기(victim blaming, van den Bos & Maas, 2009)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 ‘굳이 변하려고 하지 마. 사실 지금 이대로가 젤 좋은 거야’라는 우리나라 좋은나라 식의 믿음을 설파(kay & Jost, 2003)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후자의 경우 예컨대 경제가 어려워져 사회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의 불만이 높아지면 사회적으로 다음과 같은 메시지가 자주 나타나게 된다고 한다.
‘일이 힘드십니까? 하지만 그만큼 보람차지 않나요? 가진 건 없어도 난 아직 젊고 행복하니까 그걸로 된 겁니다.’
‘가난하지만 그래도 가족들과 단란하게 살 수 있지 않나요? 얼마나 좋습니까? 부자라고 다 행복한 건 아닙니다.’
이런 생각들을 사회심리학 용어로 ‘상보적인 믿음‘이라 한다(kay & Jost, 2003). 보통 ‘가난하지만 행복하다’ 또는 ‘부자지만 불행하다’ ‘힘들지만 보람차다’ 같이 반대되지만 상호보완적인 내용을 쌍으로 가진 형태를 띈다.
이렇게 사회 구조보다 구성원 개인을 비난하는 메시지는 사람들에게 ‘그래… 다 내 잘못이다….’ 식의 체념을 가져다준다. 반면 상보적 메시지는 불만이 있는 사람들을 위로를 주는 데 탁월한 효과를 발휘한다. 둘이 합쳐 ‘우왕, 지금 많이 힘들지만 그래도 난 젊고 행복한 거라잖아. 그리고 사회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다 내 탓이라는 데 뭐 어쩌겠어….’ 이렇게 되는 거라고나 할까.
연구들에 의하면 이런 다양한 메시지들은 실제로 우리가 변화를 (은연중에) 피하고 현 상태를 유지하도록 하는 데 기여한다(물론 살면서 힘을 내기 위해 적당히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 있게 도와주는 상보적 믿음들이 필요할 때가 있다. 여기서는 이 상보적 믿음 자체가 ‘좋다/나쁘다’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상보적 믿음이 ‘이런 작용’을 하기도 한다는 것. 또한 사람들은 이런 메시지를 ‘의도적으로’ 이렇게 사용한다기보다, 자신도 모르는 새 그렇게 하고 있는 것에 가깝다).
기가 센 여성을 금한다: 변화에의 저항
흔한_기득권의_체제_유지 이야기를 한 이유는 우리 사회(뿐 아니라 외국에서도)에서 힘의 이동이 일어나고 있는 대표적인 예, ‘여성의 사회 진출’에 있어서도 ‘요런 변화, 모 야메롱다!’류의 시도들이 있다.
사회적으로 잘 나가는 여성들에 대해 종종 ‘다 좋은데 기가 세서 좀…’이라는 말이 나오곤 한다. ‘남자가 기가 세서 ㅉㅉ’라는 말은 거의 들어보지 못했는데, 이 말은 왜 유독 여자에게 붙어 바람직하지 않은 여성의 모습을 지칭하는 걸로 쓰이는 걸까?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결국 이 말은 자기주장이 강하거나 권력을 가진 여성은 별로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듯 보인다.
왜 힘이 있는 여성들을 꺼리게 될까? 역시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권력의 이동을 꺼리게 되는 한 원인에는 그간 약육강식의 질서에서 안정적으로 밑을 깔아주고 있던 사람들이 어느 순간 갑자기 경쟁상대 또는 그 이상이 되는 것에 대한 불편함과 두려움이 있을 거라 생각한다. 같은 맥락에서 ‘기가 센 여성’을 기피하는 데에도 그간 별로 큰 소리를 내지 않았던 무리가 갑자기 무시할 수 없는, 새로운 권력으로 등장한다는 데 대한 경계심이 일면 작용하는 듯하다.
‘계속해서 바닥을 깔아주면 좋을 텐데!’
이런 류의 경계심이 실제로 나타나는지는 불확실하나, 여성이 힘을 갖게 되면서 남성이 큰 정신적 피로를 겪게 된다는 것은 다양한 연구들을 통해 확인된 바 있다. 예컨대 부인이 남편보다 더 소득이 높은 가정의 경우 그렇지 않은 가정에 비해 남편들이 더 높은 스트레스를 보이며 ‘발기부전’이 나타날 확률도 더 높았다(Pierce et al., 2013). 부인이 더 잘 나가는 것은 기존의 권력관계를 뒤바꾸는 큰 변화이니 만큼 적응하기 힘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렇게 기존의 권력 관계가 변화하는 데 대한 반응으로 앞서 언급한 여러 현상 유지 & 변화 방지 시도들이 고스란히 나타나는 듯 보인다.
- victim blaming과 비슷하게 ‘여자들은 이래서 문제야’ 식의, 여성의 사회진출을 가로막는 구조적 문제의 해결보다 여성들의 능력 자체를 깎아내리는 이야기들(자매품 ‘사회 진출이 어려운 건 순전히 니 탓이야’)이나
- ‘여전히 변두리에서 자신을 희생하며 조용히 살지만, 행복한 여성들이 있다’ 같은 상보적 메시지들이 한 예가 될 것 같다.
‘부족하니 그냥 가만히 있으렴.’이라는 누르기와 ‘변두리에서 계속 살아도 행복할 수 있어. 굳이 좋은 자리를 꿰차고 알파걸이 되어야겠니?’라는 회유가 동시에 나타나는 느낌이랄까. 그리고 이 회유는 은연중에 기존의 역할대로 ‘자신의 욕망을 내세우기보다는 타인을 위해 희생하는’ 여성들에 대한 찬양으로도 나타난다(Glick & Fiske, 2011).
이제 이 글의 가장 중요한 질문으로 넘어가 보자. 이렇게 상보적인 메시지를 통한 회유에서 더 나아가 ‘잘 나가는 여성들’을 낮추고 반대 개념으로 이런저런 개념녀들을 내세우는 현상에는 또 어떤 마음들이 숨어 있을까?
여성에 대한 경멸과 찬양이 혼재하는 이곳: 통제의 욕망
여성에 대해 차별적인 국가일수록 여성에 대한 ‘경멸’과 동시에 ‘찬양’이 함께 존재한다는 연구가 있었다(Glick & Fiske, 2011). 여성의 인권 수준이 낮은 사회일수록 ‘바람직한 여성상 또는 각종 개념녀(주로 순응, 희생적인)’들이 존재하며 이 틀에 속하는 여성일 경우 당근을 던져주지만 이 틀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날 때 가혹한 비난을 서슴지 않는다는 것이다.
‘개념녀’라는 것, 즉 ‘바람직한 여성 가이드라인’에 얼마나 잘 맞춰 사느냐에 따라 해당 여성에 대한 비난 또는 찬양의 여부가 결정된다는 점이 참 흥미롭다. 이는 ‘잘 나가는 여성’에 대한 반감에는 밥그릇을 걱정하는 것 외의 다른 의미가 있다는 걸 시사하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다른 의미란 바로 ‘여성을 통제하고 싶은 욕망’인 듯 보인다.
사람 또는 동물을 길들이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의 하나는 계속하길 원하는 행동에 대해서는 칭찬을, 그만뒀음 하는 행동에 대해서는 벌을 주는 것이다. 우리는 칭찬을 받은 행동은 계속해서 하게 되고 벌을 받은 행동은 그만두게 된다. 이는 어떤 대상이 특정 방향으로 행동하도록 만드는 ‘행동 수정’의 가장 기본 원칙이다.
개념녀의 기준에 맞는 여성의 행동에는 칭찬을, 그렇지 않은 행동에 대해서는 비난을 하는 데에도 일면 이런 행동 수정의 원리가 들어가 있다고 느껴지는 것은 단순히 기분 탓일까? 아니면 혹시 각종 ‘개념녀’가 존재하는 데에는 여성의 행동을 원하는 방향으로 구체적으로 조절하고자 하는 여러 의도들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담겨 있는 것은 아닐까? 즉 유독 여성에게 ‘내가 원하는 모양의 인간으로 살아줘’라는 사회적 요구(라 쓰고 오지랖이라 한다)들이 많은 것이 아닐까?
결국, 다양한 개념녀와 무개념녀가 나뉘어 여성에 대한 비난과 칭찬이 동시에 시끌시끌 이야기되는 데에는 ‘여성들이 이전에 비해 뜻대로 다뤄지지 않는다는 것에 대한 신경질 + 그래도 계속해서 통제하고 싶다는 마음’이 함께 담겨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다. ‘자 보세요. 여러분도 이렇게 저렇게 행동해서 (내가 바라는) 개념녀가 되어야 하지 않겠어요?’라는 끊임없는 권유와 ‘왜 그렇게(내가 바라는 대로) 행동하지 않니!!’라는 화풀이가 같이 나타나는 느낌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특히 남의 말보다 자신이 원하는 바를 따라 사는 여성들에 대해 무개념이다, 기가 세다, 이기적이다 등의 수식어가 붙는 듯한 것 역시 기분 탓일까?
끝으로: 개념이라는 오지랖을 걷어라
결국 개념녀에 대한 수많은 이야기가 넘쳐나는 현상의 더 궁극적인 원인은 마치 타인의 삶이 공공재라도 되듯 숟가락을 얹으려 하고 ‘이렇게 사는 게 개념 인생, 바른 인생임’이라며 오지랖 부리고 싶어 하는 모습들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학자들은 개인을 하나의 인간으로 존중하기보다는 집단의 ‘부품’으로 보고 개인들이 좋은 부품인지 나쁜 부품인지 끊임없이 평가하곤 하는 양상들을 집단주의 문화권의 가장 큰 특징으로 보고 있다(Triandis, 1995). 이는 우리 사회의 흔한 ‘타인의 삶에 대해 오지랖 부리기’로 잘 나타난다. 이런 문화가 변하지 않는 한 계속해서 신종 개념녀, 나아가 개념남, 개념젊은이, 개념사원 등의 각종 개념인간들이 등장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개념X’라는 표현의 남용, 타인의 삶에 대한 거칠고 단정적인 평가와 오지랖을 반대해 본다.
참고문헌
- Hafer, C. L., & Begue, L. (2005). Experimental research on just-world theory: problems, developments, and future challenges. Psychological bulletin, 131, 128.
- Mueller, J. S., Melwani, S., & Goncalo, J. A. (2012). The Bias Against Creativity Why People Desire but Reject Creative Ideas. Psychological science,23, 13-17.
- van den Bos, K., & Maas, M. (2009). On the psychology of the belief in a just world: Exploring experiential and rationalistic paths to victim blaming.Personality and Social Psychology Bulletin, 35, 1567-1578.
- Kay, A. C., & Jost, J. T. (2003). Complementary justice: Effects of” poor but happy” and” poor but honest” stereotype exemplars on system justification and implicit activation of the justice motive. Journal of personality and social psychology, 85, 823-837.
- Pierce, L., Dahl, M. S., & Nielsen, J. (2013). In Sickness and in Wealth Psychological and Sexual Costs of Income Comparison in Marriage.Personality and Social Psychology Bulletin, 39, 359-374.
- Glick, P., & Fiske, S. T. (2011). Ambivalent sexism revisited. Psychology of Women Quarterly, 35, 530-535.
- Triandis, H. C. (1995). Individualism & collectivism (Vol. 5). Boulder, CO: Westview Press.[/bo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