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감았다 뜬다. 주먹을 쥐었다 편다. 머리카락과 얼굴, 목과 몸통, 팔과 다리 또 손과 발. 몸 이곳저곳의 신경과 근육들. 이것은 나의 몸이다. 내가 소유한 나의 몸. 그러나 어느 한순간도, 내 몸이 온전히 나의 것이었던 적은 없다. 소유권은 있되, 통제권은 없었다. 그러니까, 나는 내 몸의 바지사장이었던 셈이다.
내 몸을 대신 통제했던 것은 가정, 학교, 회사, 그리고 또 사회였다. 내가 이 몸의 통제권을 값싸게 후려치고 싶었던 적은 단 한 순간도 없었다. 그런데 그렇게 되었다. 근로계약서를 쓰며 스스로 통제권을 팔아넘겼다고 한들, 업무에서 ‘당연히’ 요하는 것 이상의 것까지 팔 생각이 있었을 리가. 이것은 일종의 불공정계약이었다. 어디까지 내 몸을 통제하라고 말할 권리가 애초에 나에게는 없었던 거다.
그렇게 끌려다니다 보니, 더 이상 몸은 나의 몸이 아니었다. 심지어 나로서 자유로울 수 있는 순간에조차, 몸의 통제권을 타인에게 위탁하게 되었다. 업무시간이 아니어도 내 몸은 노동을 위한 상태 그대로였고, 일하지 않을 때의 나는 일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상태였다. 그렇게 내 몸을 잃은 것은, 크게 두 가지 방식이었다.
얼굴을 잃다
가장 빠르게 빼앗긴 것은 겉모습이었다. 초등학생이던 나는, 중학교에 간다는 것이 그렇게 두려울 수 없었다. 머리를 깨끗이 밀어야 했고, 계절별로 나뉜 똑같은 옷을 입어야 했으니까. 나는 교칙에 충실했다. 문제아로 낙인 찍히고 싶지 않았으므로. 20mm가 채 안 되는 길이의 모발, 넓어서 바람이 숭숭 들어가는 바지통과 얇은 폴라티. 담임은 늘 내 머리를 가리키며, “이렇게 단정하게 치고” 오라고 했다. 고등학교까지, 나는 늘 짧은 머리 그대로였다.
그러나 실은 그 단정함이 영 낯선 것도 아니었다.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도, 어머니도 짧게 자른 스포츠머리만을 원하셨으니까. 그렇기에 나는 그 몇 밀리 단위로 떨어지는 반삭에 그토록 쉽게 적응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고등학교에 졸업할 때까지 나는 내 몸을 통제해 본 적이 없었다. 옷도, 머리도, 늘 주어지고 통제됐다.
대학교에 들어가 잠깐의 자유를 얻었다 싶었다. 염색도 했고, 기르기도 해봤다. 하지만 그것도 어느샌가 사회의 기준에 부합하는 무언가가 되었다. 하얗게 염색을 한다든가, 삭발을 한다든가. 꿈꿔봤지만 꿈일 뿐이었다. 사회의 시선이 내 뇌리 깊이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나는 돈을 벌어야 했기 때문이다.
맞다. 나는 돈을 벌어야 했다. 알바를 시작한 곳 어디든, 단정함을 원했다. 깔끔함을 원했다. 호감이 가는 상을 원했다. 구인공고 적혀 있는 뿔테안경 착용 금지. 렌즈를 새로 샀다. 면접을 마치고 일어서는 차에, 면접관은 내게 물었다. “머리, 자를 거죠?” 이곳에서도 나는 맞지 않는 유니폼에 몸을 끼워 맞췄다. 겨울이 되어도 반팔을 입고 덜덜 떨어야 했다. 불편한 구두에 물집이 잡혔다.
근무 전 이어지는 손톱 검사, 또 머리 검사. 직장은 내게 학창시절로 돌아간 듯한 아련함을 선사했다. 학생인권조례의 빛조차 누리지 못하고 졸업했지만, 이제 졸업했으니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 학교 바깥에서조차 똑같은 일들이 이어지니. 알바인권조례, 노동자인권조례라도 필요한 것일까.
표정을 잃다
내 겉모습만 잃은 것은 아니었다. 내 몸의 자세 역시, 나 이외의 것들이 통제해 왔다. 아주 오랫동안. 중학교, 고등학교를 거칠수록 내 수면시간은 줄어들었다. 맘 편히 잠을 잘 시간이 없었다. 그래야 입시에 성공한다고 가르쳤다. 나아가 인생에 성공할 수 있다 배웠다. 수업시간에 쏟아지는 졸업은 뒤에서 날아온 손바닥이 깨웠다. 매웠다.
여섯 시 반에 일어나 학교에 갈 준비를 했고, 온종일 책에 치이다 학원으로 향했다. 나는 새벽 두 시까지 구남친마냥 깨어 있다 겨우 잠들었다. 나는 잠을 잘 때를 제외하면, 늘 공부를 위해 깨어 있는 몸이어야 했다. 핫식스 같은 에너지 드링크에 절어서.
그 역시도 학교에서 끝나지 않았다. 앉을 자리 없이 꼿꼿이 편 허리와 입가에 띈 미소는 일하지 않을 때는 허리를 부여잡고, 인상을 쓰게 만들었다. 죄송할 일이 뭐 그리도 많은지 입에 붙어버린 그 말은, 퇴근길 버스 안에서 부딪힌 이에게까지 해버리게 되었다. “죄송합니다. 고객님” 아차 했지만 내 몸이 내 통제를 벗어났다는 걸 절절하게 깨달았을 뿐이다.
언제나 죄송할 준비, 언제나 미소 지을 준비, 언제나- 일터로 나갈 준비. 그렇게 일하지 않을 때의 몸도, 일을 위해 준비되어 있어야 했다. 일하지 않는 시간도, 일을 할지 모르는 시간이었다. 주말이 되어서야 나오는 유동적인 그 다음주의 스케줄은, 일 이외의 일정을 거의 대부분 포기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내 몸의 자세는 언제나 내 몸의 통제권을 쥐고 있는 이들이 원하는 자세를 취했다. 때론 모범생, 때론 우수사원 같은 이름으로. 마음 편히 자세를 취할 수 있을 때는 오직 잠을 잘 때뿐이었다. 일하는 악몽을 꾼다면 말짱 도루묵이었지만.
그러나 이것은 나의 몸이다
나는 이따금 마음대로 몸을 움직일 수 없는 병을 앓아 왔다. 일종의 불수의(不隨意). 내 몸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은 꽤 큰 고통이었다. 그러나 실은 내 마음대로 온전히 몸을 움직일 수 있었던 적이야말로 실은 거의 없던 게 아닐까. 공부를 위한 준비에서 해방된 내 몸은, 노동을 위해 준비된 몸이 되었을 뿐이다. 학교와 직장, 군대와 가정이 통제하는 몸을 과연 내 몸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러나 이것은 나의 몸이다. 내가 가지고 있고,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사용할 수 있는. 학교와 회사, 때로는 사회가 아니라 내가 원하는 대로 꾸미고, 내가 웃고 싶을 때만 웃을 수 있는. 내가 하고 싶은 머리를 하고, 내가 입고 싶은 옷을 입을 수 있는, 이것은 나의 몸이다. 나의 몸이어야 한다.
회사에 나의 노동력을 제공한 적은 있어도, 나의 몸을 판 적은 없다. 물건을 팔기 위해 단정해질 필요는 없다. 물건을 팔기 위해 웃음마저 팔 이유는 없다. 값싸게 나의 자세부터 습관까지 팔아 넘길 이유 따윈 하등 없다는 것이다. 내 몸은 오직 그 일을 위한 합리적인 선에서만 제공될 뿐이다. 내 몸과 내 몸의 자세는, 거래대상이 아니다. 이유는 단순하다. 왜냐하면 이것은-
나의 몸이기 때문이다. 그냥 나의 몸이기 때문이다.
그 외에 다른 이유는 필요하지 않다.
원문: lupinnut.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