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이후의 일본에서 음악을 소재로 삼은 애니메이션 작품들은 100편 이상 제작되었다.
그 종류도 상당히 다양한 편이다. 록밴드를 소재로 한 작품(가령 <BECK>이라든가 <Detroit Metal City>라든가) 재즈를 테마로 삼은 작품, 중고등학생들의 동아리 활동을 소재로 한 작품이라든가 클래식을 주 장르로 삼은 작품, 음악이라는 테마를 소재로 한 판타지물도 존재하며 심지어 SF를 가미한 작품들도 존재한다.
SF를 가미한 가장 최근작은 동명의 만화를 토대로 제작되고 있는 <기동전사 건담 썬더볼트>와 올 4월부터 방영 예정인 <마크로스 델타>가 있겠다. <마크로스 델타>의 경우 4월 방영 예정이고 선행방송으로 1화가 공개됬지만, 벌써부터 망작의 스멜이 물씬 풍긴다. 유투브의 반다이 공식 채널을 통하여 1화가 공개된 <건담 썬더볼트>의 경우 미친놈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긴 하지만 선곡이 아주 탁월하다.
작년에는 뮤지컬을 테마로 한 작품이 두 편 등장했는데, 하나는 애니메이션의 진행 방식 자체가 뮤지컬이었고, 다른 하나는 뮤지컬 배우 지망생들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K-ON>처럼 밴드 부활동을 가장한 일상물이 있는가 하면, 노래방을 테마로 전대물을 엮은 괴랄한 작품도 있다. 상당히 마이너 하지만 일본 전통가요인 엔카를 테마로 한 작품도 있다. 가라오케를 소재로 한 그 작품의 경우, 메이저 아티스트들의 곡을 피처링하고 실제로 메이저 레이블에서 활동하는 가수들이 제작에 동참했음에도 불구하고 흥행에는 대참패를 기록했다. ㅎㅎ
이 중에서 주목할 만한 ‘음악을 이야깃거리로 삼은’ 3개 작품을 소개해볼까 한다.
이미 잘 알려진 <노다메 칸타빌레>나 <Beck>같은 작품들은 제외했다. 지난 번에 다룬 <4월은 너의 거짓말>이나 원작 만화의 극히 일부분만을 소재로 삼은 <피아노의 숲>, 역시 원작 소설의 일부분만을 다룬 <울려라! 유포니엄>도 이번 추천글에서 제외하니 양해 바란다. 물론 제외된 작품들 또한 매우 추천하는 바이다. (<울려라! 유포니엄>의 경우, 부활동을 소재로 한 애니메이션을 소개할 때 따로 올리도록 하겠다)
1. PIANO
<PIANO>는 2002년에 방영된 아동용 애니메이션이다. 총 10화로 제작하고 방영되었으며, 일본의 아동용 컨텐츠 전문 채널인 Kids Station에서 방영된 애니메이션이다. 부제는 ‘어린 소녀의 마음의 멜로디’.
<PIANO>는 성격이 정반대이지만 사이는 좋은 소녀 두 명의 일상적인 이야기를 다룬 애니메이션이다. 특히 주인공인 ‘노무라 미우’라는 피아노를 공부하는 소녀를 통하여 가족과 친구의 소중함, 그리고 감수성 깊은 사춘기 소녀들의 고민과 성장을 그렸다. 이 작품에서 피아노는 어린 소녀 미우가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일종의 매개체로 등장한다. 음악을 소재로 하는 다른 애니메이션들과 달리, 극 중에 사용되는 곡 대부분이 작품을 위해 작곡된 오리지널 곡이라는 게 특징.
주인공 미우의 성우를 담당한 카와스미 아야코의 경험담을 소재로 한 작품이라는 점에서도 특이하다. 이 애니메이션, 2화와 3화에서 잠시 소개되는 쇼팽의 곡을 제외하면 작중에서 미우가 연주하는 피아노 곡 전체를 모두 이 성우가 작곡하고 연주했다. 참고로 1976년생인 카와스미 아야코는 애니메이션과 게임 팬들에게는 <Fate> 시리즈의 세이버 역으로도 유명하다. (그녀의 다른 대표작으로는 성계의 문장 시리즈의 라피르, 마호로매틱의 안도우 마호로, 투 하트 시리즈의 카미기시 아카리, 제로의 사역마 시리즈의 앙리에타 드 트리스테인 등이 있다)
재미있게도 각 화의 제목이 모두 이탈리아어로 되어 있는데, 서양음악을 전공하신 분들이라면 쉽게 이해를 하거나 공감이 갈 부분이다. 모두 음악용어이고, 악보에서 작곡가가 연주자에게 요구하는 표현을 설명하는 문구로 되어 있다. 가령 1화의 제목은 〜con sentimento〜 인데, 이것은 ‘좀 더 감정을 살려서’ 라는 뜻이다. 8화의 경우에는 〜con melancolia〜 인데, 이것은 ‘슬픔으로 마음이 가라앉는 느낌으로’라는 요구다. 각 화의 제목에 맞추어 에피소드의 내용이 맞춰져 있고, 미우가 연주하는 곡들이 분위기를 한층 더 살리고 있다. 이런 연출기법은 TV드라마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기법이지만, 일본 애니메이션의 경우 90년대 중후반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주인공 미우의 성우를 담당한 카와스미 아야코에 대해서 조금 더 이야기하자면, <노다메 칸타빌레>의 애니메이션 판에서 노다 메구미 역을 맡은 성우가 바로 이 카와스미 아야코이다. 물론 노다메 칸타빌레에서 노다메의 연주를 맡은 것도 그녀. 재미있게도 노다메 칸타빌레의 한국판 라이센스 드라마인 <내일도 칸타빌레>의 일본어 더빙 버전에서도 주인공 설내일(심은경 분)의 더빙 또한 그녀가 맡았다. <내일도 칸타빌레>는 한국, 일본 양국에서 흑역사로 취급되지만. ㅎㅎ
<PIANO>는 기본 아동용 애니메이션인 관계로, 국내외 많은 애니메이션 덕후들에게 큰 주목을 받지 못한 작품이다. 같은 아동용 애니메이션인 <피아노의 숲>의 경우 사실 원작만화는 아동용 작품이 아니다. 1998년부터 2015년까지 총 17년간 연재된 작품으로, 단행본만 무려 26권에 달한다. <피아노의 숲>은 이치노세 카이라는 소년이 피아노 솔리스트로 성장하는 과정을 다룬 만화인데, 초등학교 시절부터 시작하여 청년기까지의 방대한 세월을 다루고 있다. 단지 2007년에 공개된 극장판 애니메이션이 주인공의 유년기만을 다루다보니 아동용 애니메이션이라는 인식이 생겨 버렸을 뿐.
또한 PIANO는 성우가 작곡에 연주를 담당했다는 점에서도 ‘음악을 소재로 한 애니메이션’을 선호하는 덕후들에게 외면받은 작품이기도 하다. 이건 ‘고작 성우 주제에’라는 편견으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사실 카와스미 아야코는 3살 때부터 피아노를 시작하였고 자신의 첫 메이져 데뷔 앨범인 Primary(1998)의 경우 자신이 작사한 곡 5개와 자신이 직접 연주한 피아노 곡 5개를 수록하기도 했다. 성우업 이외에도 싱어송 라이터로 활동하고 있는 인물이고, 노다메 칸타빌레의 경우, 드라마와 애니메이션에서 모두 사용된 ‘방구 체조’가 그녀의 작품이기도 하다. 그래서 고작 성우 주제에, 라는 편견을 들이대면서 노다메 칸타빌레는 다들 좋아했다는 점은 나로서 이해하기 힘든 구석이 있다)
여담이지만 <노다메 칸타빌레>의 경우, 드라마를 보신 분들께는 애니메이션을, 애니메이션을 보신 분들께는 원작 만화를 추천해드리고 싶다. 그리고 원작 만화까지 다 섭렵하신 분들께는, 베네수엘라의 El Sistema와 시몬 볼리바르 유소년 오케스트라, 그리고 Gustavo Dudamel에 대한 다큐멘터리나 그들의 연주 동영상을 찾아보시라고 권유해드리고 싶다. 노다메 칸타빌레에서 묘사되는 많은 연주들은 엘 시스테마의 연주 활동에서 그 모티브를 따온 것이 많기 때문이다.
주목받지 못한 작품이지만 의외로 어둠의 경로를 통해 쉽게 구할 수 있는 작품이니, 즐기고 싶은 분들은 한 번 감상해보는 것도 좋을 듯.
2. 니타보 (NITABOH, 仁太坊-津軽三味線始祖外聞)
2004년에 상영된 극장판 애니메이션이다. 일본 전통악기 중에 하나인 샤미센(三味線)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애니메이션에서는 츠가루샤미센(津軽三味線)의 시조로 일컬어지는 仁太坊(니타보우)의 일대기를 다루고 있다.
츠가루 지방에서는 츠가루 샤미센을 완성시킨 인물로 알려져 있고, 그의 이름을 딴 레스토랑들도 상당히 많은 편. 아니, 츠가루시에 가보면 니타보우와 관련된 것들이 실제로 상당히 많은 편이다. 이 애니메이션은 일본의 역사소설가인 다이죠 카즈오의 츠가루샤미센에 대한 책을 베이스로 제작이 되었는데, 실제 츠가루샤미센의 역사와는 조금 다른, 픽션이 많이 가미된 연출을 보이고 있다. 그도 그럴것이 니타보우라는 인물에 대한 기록은 실제로 남아있는 것이 거의 없고, 츠가루 지방에서 구전되어 내려오는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 따라서 본 애니메이션을 역사물로 보기에는 조금 힘든 면이 있다. 약간의 ‘국뽕’이 섞인 작품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듯.
니타보우의 정확한 생몰년도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대략 에도 막부 말기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는 인물이다. 그는 8세 때 실명한 후 샤미센에 흥미를 가지게 되었으나 11세에 아버지를 잃고 유랑악단의 일원이 되어 하루벌이를 하는 신세가 되었다. 하지만 샤미센에 대한 흥미를 버리지 못하여 평생 수행을 하며 ‘사람들이 진심으로 즐길 수 있는 음악’을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평생을 악기 연주 및 연주 기법을 만드는데 바쳤고, 덕분에 츠가루샤미센의 시조가 되었다는 전설을 가진 인물.
3개의 현을 가진 일본의 전통악기인 샤미센은 사실 중동에서 발현된 악기이다. 그 악기가 인도를 거쳐 중국에 도래한 후 중국 남부 지방에서 3개의 현을 가진 악기로 발전하였고, 송/원 시대를 거쳐 오키나와로 유입된 뒤 다시 에도 시대에 이르러 일본 전국 각지로 퍼진 악기이다. 일설에 의하면 역시 중동에서 인도를 거쳐 당나라 말기에 한반도로 들어와 정착이 된 해금이 일본에 전래되어 그 모양과 쓰임새가 다소 변화한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해금과 샤미센의 모양이 비슷하기 때문일수도 있으나, 후자의 경우 조금 설득력이 부족하다. 해금은 2개의 현을 활로 켜는 찰현악기이고, 샤미센의 경우 채를 사용하여 현을 뜯어서 연주를 하는 발현악기인 만큼, 궁극적으로 다른 악기라는 것.
여하튼 샤미센은 대략적으로 송나라, 그러니까 고려 시대에 일본에 전래된 악기임은 틀림없다. 특히 에도 시대에 이르러 일본 전국 각지에서 여러 유파가 생기면서 다양한 연주법을 가진 대중적인 악기로 자리를 잡았다. 현재에도 일본에서 가장 대중적인 전통 악기 중에 하나로 손꼽힌다. 그리고 그 샤미센 중에서도 가장 연주 기법에 특색이 있고 인지도가 높은 악기가 바로 ‘츠가루샤미센’이다.
츠가루샤미센은 1960년대에 엔카가수들이 샤미센 연주가락을 모방한 창법을 구사하거나 혹은 엔카 공연 시에 샤미센을 등장시킨 것이 인기를 얻기 시작하면서 대중화가 이루어졌다. 다소 정형화된 관동지방이나 관서지방의 샤미센 연주와 달리 음색이 풍부하며 타악기를 연주하는 듯한 느낌도 자아낼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또한 샤미센 자체가 속주가 가능한 악기이기 때문에 현대에는 락이나 재즈 등을 새로운 장르를 접목시킨 샤미센 아티스트들이 꽤 많이 배출되었다. 대표적으로 요시다 브라더즈나 아가츠마 히로미츠 등이 있다.
다만 이 작품은 다소 ‘국뽕’스러운 내용과 신파스러운 연출이 가미되어있다. 물론 도입부에서 ‘이 작품은 다이죠 카즈오의 소설에 픽션 요소를 더 많이 가미하여 제작되었습니다’라는 설명으로 시작한다는 면에서 무조건 ‘국뽕’애니메이션으로 치부할 수 없기도 하다. 또한 여타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접하기 힘든 일본 전통악기들의 멜로디를 십분 접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음악적인 가치가 뛰어나다고 볼 수 있다.
샤미센 뿐만 아니라 일본의 다른 전통 악기들에 대한 묘사도 상당히 수준급이라, 일본의 전통악기를 소개하는 레퍼런스로 사용하기에도 좋은 애니메이션이다. 또한 막부 말기의 혼란한 상황이나 뚜렷한 계급이 존재했던 에도 시대 서민들의 생활상과 고충 등이 잘 묘사되어있는 애니메이션이기도 하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작품은 우리나라의 문화체육부와 교육부에 해당하는 일본의 문부과학성이 우수작품으로 선정했다는 사실이다. 또 일본의 학부모 단체들이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작품으로 꼽은 여러 애니메이션 작품 중 하나이며, 현재 일본의 초중고등학교의 시청각실 및 전국의 도서관에서 손쉽게 접할 수 있는 작품 중에 하나이기도 하다.
이런 부분은 사실 국악교육이 전문 학교에서 수학하지 않으면 수박 겉핥기 정도로만 이루어지고 있는 대한민국 주민으로서 상당히 부러운 부분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니타보>라는 작품은 현재 교육현장의 일선에 계시는 분들이나 국악 관련 단체에서 활동하시는 분들께 적극적으로 추천해드리고 있는 작품이다. 이런 작품이 극장에서 상영되고 또 초중고등학교에서도 교재로 활용되는 일본의 현실이 마냥 부럽다.
<니타보>는 국내 어둠의 경로 사이트에선 좀처럼 구해보기 힘든 작품이지만(물론 토렌트에는 있다), 다행히 영문 자막판이 유튜브에 게재되어있다. 교육용 애니메이션이라는 점도 있어 본래 츠가루 지방의 사투리가 아닌 표준어를 구사한다는 점은 다소 아쉽기도 하지만, 연출 자체는 꽤 가벼운 마음으로 볼만하다.
3. 언덕길의 아폴론 坂道のアポロン
1960년대 중반, 멀리 나가사키 사세보로 전학을 오게 된 소년 니시미 카오루는 엘리트 집안 출신으로 항상 상위권의 성적을 유지하고 어릴 적부터 배워온 피아노 실력 또한 수준급인 소년. 하지만 어릴 적부터 아버지의 잦은 전근으로 인하여 전학을 밥 먹듯해온 탓으로 인하여 소심하고 결벽적인 성격을 지닌 아이가 되었다. 어느날 카오루는 전학을 오게 된 사세보의 고등학교에서 그의 운명을 바꾸게 될 두 인물과 조우하고 재즈에 접하게 되는데……
<언덕길의 아폴론>은 2000년에 문단에 데뷔한 일본의 순정만화작가인 고다마 유키(小玉ユキ)의 다섯번째 작품이자 이를 애니메이션화한 작품이다. 원작만화는 2007년부터 2012년까지 연재되었고, 단행본은 총 9권 + 번외편 1편으로 완결이 되었다. 애니메이션의 경우 원작만화가 종결된 2012년 4월부터 방영이 시작되어 6월까지 총 12화의 짧은 편성으로 방영되었다. 애니메이션의 감독을 맡은 이는 <카우보이 비밥> 시리즈로 유명한 와타나베 신이치로. 전체적인 OST는 칸노 요코가 담당했다.
감독을 수행한 와타나베 신이치로에 대해서 몇가지 이야기를 더 하자면, 이 사람의 데뷔작은 <마크로스 플러스>이다. 이미 데뷔작에서부터 음악과 연관이 깊은 작품을 담당했다. 이후에 그가 메가폰을 잡은 작품들 역시 음악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거나 OST를 신중히 선별하여 작중 분위기를 확 휘어잡는 경향이 강하다. <카우보이 비밥>이 그러했고 <사무라이 참프루> 또한 그러했다. 2007년에 그가 참여한 옴니버스 작품인 <지니어스 파티>의 7번째 작품인 <베이비 블루> 역시 와타나베 신이치로다운 연출과 와타나베 신이치로다운 멋진 OST로 가득 채워져있다.그리고 언덕길의 아폴론과 그의 최신작인 잔향의 테러 또한 그러하다,
자신의 만화에서 출신지인 나가사키를 배경으로 삼는 경우가 많은 고다마 유키답게, <언덕길의 아폴론> 역시 나가사키를 배경으로 삼고 있다. 단 그녀의 다른 작품들과 달리 시대적 배경이 1960년대로 설정되어 있다. 특히 <언덕길의 아폴론>은 1960년대의 나가사키 사세보(佐世保)를 배경으로 삼고 있는데, 사세보는 전후 일본을 대표하는 군항 중에 하나이고, 미 해군이 주둔하고 있는 지역이기도 한 만큼 미군을 상대로 한 클럽이나 바가 상당히 밀집해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특히 재즈바가 많이 밀집되어 있다.
일본의 군항들 중 ‘요코스카’나 ‘쿠레’가 상당히 현대화된 지역이라면, 사세보는 여전히 196-70년대의 모습을 간직한 곳이 많다. 원작 만화 뿐만 아니라 애니메이션에서도 이런 부분에 대한 연출 및 묘사가 상당히 잘 되어 있다.
애니메이션의 경우 고증 면이 원작만화보다 훨씬 철저한데, 요코스카에서 사세보로 전학을 온 카오루를 제외하면 등장인물들 대부분이 나가사키, 특히 사세보 지역의 방언을 사용한다. 심지어 제작 과정에서 성우들에게 일일히 사세보 방언의 스페셜리스트가 개인지도를 했을 정도로 지역 색이 물씬 풍기도록 배려한 연출이 돋보인다. (사세보는 나가사키현 내에서도 지역특색이 아주 강한 방언을 구사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다만 원작만화와 마찬가지로 <언덕길의 아폴론>은 초보자들에게는 한없이 불친절한 작품이다. 재즈 장르에 대한 입문용이라기보다는 재즈에 상당히 심취해 있는 독자층, 혹은 시청자들을 위한 작품이다. 평소에 마일즈 데이비스, 존 콜트레인, 쳇 베이커, 아트 블레이키, 글렌 굴드, B.Y.포스터, 사라 본, 빌리 할리우드 같은 재즈 아티스트들의 연주를 즐겨 듣는 분들에게는 강추하고 싶은 작품이지만, 재즈라는 장르에 대해 다소 이해가 부족하신 분들의 경우에는 “뭐지 중2병스러운 녀석들의 이 먼치킨스러운 향연은?”이라고 느낄 수도 있겠다.
실제로도 등장인물들의 연령이 고등학교 초년생들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카오루와 센타로의 연주 실력은 뭐 먼치킨도 사실 이런 먼치킨들이 따로 없다. 진정한 사기 캐릭터들의 전형이라고나 할까. ㅎㅎ
원작만화의 경우 작중 등장하는 곡이나 아티스트들에 대해 그나마 애니메이션보다 조금 더 자세한 설명이 가미되어 있는 편이기에, 이 글을 접하시는 분들께는 먼저 원작만화를 읽어보시는 것을 추천해드린다. 다행히 국내에 정식번역판이 출간되어있다.
그러나 애니메이션 작품으로서 <언덕길의 아폴론>이 갖는 가장 큰 강점은 바로 ‘연주 장면의 훌륭한 묘사’에 있다. 만화에서는 표현하기 다소 힘들었던 부분을 실제 재즈 뮤지션들의 연주장면을 촬영한 후 그 영상과 사진을 바탕으로 애니메이션으로 재구성하였는데, 이렇게 생생한 재현 덕분에 연주장면들의 퀄리티가 가히 압권이다. 특히 애니메이션 7화에 등장하는, 센타로와 카오루의 ‘학교 축제 연주’ 씬은 애니메이션 사상 길이 남을 명장면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
이 장면은 특히 제작에 참여한 연주자들에게 원작만화의 내용 및 애니메이션의 대본을 보여준 후 연주자들이 즉흥으로 연주 및 레코딩을 진행하여 완성되었다. 그 후 일본 TV 애니메이션 오프레코딩의 전설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당시 레코딩에 참여한 관계자들 뿐 아니라, 일본의 한 저명한 음악 평론가가 ‘4분 30초의 기적’이라고 표현했을 정도다.
마츠나가 타카시, 난리 유카, 테시마 아오이, 루이케 신페이 등 21세기의 일본을 대표하는 재즈 뮤지션들의 연주 및 노래를 간접적으로 감상할 수 있다는 것도 <언덕길의 아폴론>의 애니메이션 버전이 갖고 있는 강점 중에 하나이다. 재즈를 좋아하시는 분들, 풋풋한 소년 소녀들의 사랑 이야기를 원하시는 분들, 그리고 레트로한 느낌을 좋아히시는 분들께 강력하게 추천해드리는 작품이다.
여담이지만 난 이 작품에 대한 사전지식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애니메이션을 먼저 접하게 되었는데, 이 애니메이션을 보기로 한 이유는 사실 오프닝 곡을 부른 이가 왕년에 잘 나가던 J-POP 밴드 ‘JUDY & MARY’의 메인 보컬리스트였던 YUKI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애니메이션에 푹 빠져서 결국 원작만화까지 모두 섭렵하게 되었다.
ps. 사실 여기에 포함을 시킬까 말까 무지 망설였던 작품이 있다. 바로 <기동전사 건담 썬더볼트>이다. 이 작품은 <문라이트 마일>로 유명한 오타가키 야스오의 원작만화를 베이스로 2015년 12월 25일부터 시작한 OVA 작품이다. 음악 그 자체가 테마인 작품은 아닌지라 빼긴 했지만, 음악감독이 현재 일본에서 활동 중인 재즈 아티스트 중에선 Top 5에 든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의 거물인 키쿠치 나루요시였던지라 크게 고민했다.
이 아티스트는 단순히 음악감독만 맡은게 아니라 직접 연주에도 참여했다. 마치 와타나베 신이치로가 연출을 맡은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재즈와 전투 씬의 싱크로가 절묘한 작품. <썬더볼트>의 경우 유투브에 현재 1, 2화가 모두 공개되어 있으니 안 보신 분들은 함 보시라. 건담 팬이시라면 절대 후회하지 않으실 거고, 우주세기 팬들이라면 더더욱 후회하지 않으실거고, 재즈 팬이라면 진짜 몰입하고 보실 수 있을거라고 본다.
이상 성년월드 흑과장이었습니다.
원문: 성년월드 흑과장의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