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향교길 전주한옥마을을 걷다 보면 유달리 사람들의 발길이 잦은 곳이 있다. 바로 ‘종이정원’이다.
“그냥 마르지 않게 물만 주시면 됩니다. 3~7일이 지나면 종이를 뚫고 싹이 올라올 거예요. 여기 오돌토돌 튀어나온 부분이 보이죠? 이 안에 바로 씨앗이 들어있어요”
친절한 직원의 설명을 듣던 손님들이 여기저기서 소곤대기 시작한다.
“정말 신기하다. 저기 싹이 돋아난 카드 좀 봐!”
가게 정면에는 카드를 화분 삼아 피어난 식물들이 한눈에 들어오고 새 생명을 기다리는 카드들이 진열대에 빽빽이 꽂혀있다. 카드에는 축하와 위로의 말을 건네는 따뜻한 글과 그림들이 수 놓여 있다.
세계 유일의 업사이클링 씨앗 수제카드 ‘종이정원’
‘종이정원’은 협동조합 온리(http://www.cooponre.com/ )의 업사이클링 브랜드다. 씨앗을 품은 카드의 모티브는 씨앗종이(Seed paper)나 네덜란드의 ‘키움카드(Grow card)’ 그리고 영국의 ‘씨앗 폭탄(Seed bomb)’에서 따왔다. 하지만 이들과 달리 ‘온리’는 버려지는 파쇄 종이를 한지 제작 방식과 씨앗 수경재배기술로 되살려 발아율이 99%에 이르는 세계 유일의 업사이클링 씨앗 수제카드로 탈바꿈시켰다.
씨앗은 자운영 꽃과 알팔파·청경채·비타민 등 4종류이다. 지난해부터는 전북대 농과대학과 산학협력을 통해 허브랑 자생종 그리고 멸종 위기종을 중심으로 100여 종의 종자연구개발을 마쳤다. 이 씨앗들은 육종과 발아테스트를 거쳐 상품화될 전망이다.
협동조합 ‘온리’는 온 고을의 되살림이란 뜻을 품고 있다. 사회적 미션은 지역공동체와 함께 하는 기업 활동으로 지역의 고유한 가치와 환경·전통을 보존하고 이웃을 돌보는 것이다.
종이정원은 일자리를 찾아 한때 고향을 등져야만 했던 전주 사나이의 지역사랑에서 출발했다. 김명진 협동조합 온리 이사장은 서울의 한 게임회사에 다니다 희망제작소와 아름다운가게를 거치면서 환경과 지역공동체의 중요성에 눈을 떴다. 김 이사장은 지난 2012년 고향인 전주에 내려왔다가 귀촌을 결심하게 됐다고 말한다.
“전주한옥마을에서 문화상품으로 국적불명의 테디베어가 판매되는 걸 보고 깜짝 놀랐어요.풍부한 전통과 지역자원이 있음에도 이를 살리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웠어요. 지역을 기반으로 한 업사이클링 사업을 통해 도시로 떠나려는 청년들을 붙잡고 그동안 비영리단체에서 일하며 터득한 친환경· 윤리적 소비를 확산시키고 싶었습니다.”
환경을 보호하고 지역 경제도 살리고
수제카드의 재료는 사무실 등지에서 파쇄기로 잘게 부서져 재활용되지 못하고 쓰레기봉투에 버려지는 폐지이다. 카드 1장에 들어가는 폐지의 양은 약 2g. 연간 20만 장 정도를 생산하는 데 약 2톤의 폐지가 쓰인다. 수거된 폐지들은 물에 불려 죽처럼 만들어지고 여기에 신문지나 한지의 자투리 종이를 더해 색상과 무늬를 만든다. 그다음 종이를 틀에 넣어 한 장씩 얇게 떠낸 뒤 한 모퉁이에 씨앗을 넣고 평평하게 눌러 건조한다.
종이가 완성되면 그 위에 작가의 작품이 인쇄된다. 인쇄되는 글씨와 그림은 오스트리아에서 수입한 친환경 잉크로 독성이 거의 없다. 카드는 특수한 인쇄기법을 이용해서 씨앗을 틔우는 과정에서도 글씨나 그림들이 번지거나 지워지지 않는다. 모든 공정은 수작업으로 이뤄진다.
수제카드는 한지의 제조공법과 유사하게 만들어지는 까닭에 본래 두께의 4배까지 물을 머금을 수 있다. 종이를 뚫고 나온 새싹은 그대로 놓고 즐겨도 되지만 수경재배하면 석 달은 충분히 싱싱한 잎을 즐길 수 있다. 흙에 옮겨 심으면 더 크게 키울 수도 있다. 수제카드 한 장의 가격은 3,000원대이다.
카드의 디자인 개발에는 전북지역의 영세한 작가 11명이 참여하고 있다.
“이분들은 자존감 하나로 버텨가는 분들입니다. 비록 적지만 저작권료를 드리고 작품을 통해 시민들과 소통하는 장을 마련해 침체한 지역의 문화시장을 살려내고 싶습니다. 또 지역 작가분들이야말로 전주만의 색깔과 느낌을 가장 잘 표현해줄 수 있기 때문에 충분한 시너지 효과가 나리라 기대합니다.”
지금까지 제작된 카드 디자인은 총 550종이다. 이 가운데 400종이 지역 작가의 작품이고 나머지는 명화와 한국 민속화 중 저작권이 풀린 것들이다. 캘리그래피 분야는 경력단절 여성들이 주축이 된 ‘글꼴 유랑단’과 함께 작업하고 있다. 온리는 이같은 방식으로 지출의 90% 이상을 지역 안에서 이뤄내고 있다.
취약계층에게 괜찮은 일자리 제공
온리는 사회적기업이자 직원조합이 주축을 이루고 있는 다중 이해관계자 협동조합이다. 조합원 수는 21명으로 정직원 15명 가운데 12명이 취약계층이다. 저소득층·시니어·새터민·다문화가정의 이주여성이 함께 일한다.
“ 어르신들은 경로당이나 마을회관에서 흔히 볼펜 심 끼워 넣기나 셔츠 깃에 심꽂기 등을 하시며 개당 10~20원을 받습니다. 폐지 줍는 어르신들도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아 월 10만 원을 벌기도 힘들죠. 저는 이분들께 더욱 나은 일자리를 마련해드리고 싶었어요.”
생산직으로 일하는 어르신들은 이곳에서 시급 7000-7500원을 받는다. ‘온리’에는 또 계약직 공동작업장이란 독특한 작업 형태가 있다.
“서류상으로는 취약계층이 아니지만, 가령 장애인 가족을 돌보는 분들은 주 40시간을 일하기 힘듭니다. 우리는 그런 분들에게 일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해주고 형편껏 작업한 만큼 임금을 드립니다.”
이같은 근무방식은 매출이 연중 고르게 발생하지 않는 회사의 특성상 변동사항에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고 정규직에 따른 고정비 상승의 부담을 던다는 장점이 있다. 지금까지 30여 명의 근로자가 거쳐 갔다.
협동조합을 위한 협동 기구… 작은몬드라곤프로젝트
협동조합 온리의 홈페이지는 ‘미디어콘텐츠 창작자 협동조합’이 제작했다. 해외 바이어를 위한 영문 서류 제작이 필요하면 온리는 ‘번역협동조합’에 의뢰한다. 이 밖에 이풀약초협동조합·잉쿱영어교육협동조합·돌아봄사회복지협동조합 등 6개 협동조합은 상생을 위해 뭉치기로 했다. 이른바 ‘작은몬드라곤프로젝트’이다.
이들은 2013년 ‘함께일하는재단’에서 처음 만났다. 각각이지만 1년 동안 부대끼며 얻은 결론은 연대의 필요성이다. 협동조합을 위한 협동조합으로 서로 협력해 더 큰 시너지 효과를 얻자는데 목표를 두고 있다. 김 이사장은 협동조합끼리의 연대의 중요성을 힘주어 말했다.
“내 물건만 팔 생각을 하지 말고 조합들 스스로가 좋은 윤리적 제품과 서비스를 서로 구매해야 합니다. 그래야 협동조합이 지속 가능합니다. 결국 내다 팔 수 있는 시장의 파이가 커집니다.”
협동조합 온리의 매출은 급성장세를 보인다. 2013년 1,200만 원에 불과했던 매출은 2014년에는 1억2천만 원으로 10배 뛰었고 지난해에는 메르스로 대형 축제들이 전격 취소돼 직격탄을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2억 원의 매출을 달성했다. 그사이 공장 규모도 6.6㎡에서 165㎡로 확장됐다. 2013년 ‘순천만 국제정원박람회’와 ‘대한민국 친환경 대전’등 굵직한 행사에 기념엽서로 채택됐고 사회적기업 스타 상품으로도 이름을 올렸다.
김 이사장은 “손글씨가 적힌 수제카드는 아날로그적 감성을 가진 마음을 움직이는 연결 매체”라며 “식물을 정성스레 키우는 과정에서 카드를 자주 바라다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보다 더 좋은 고객 감성마케팅은 없다”고 강조했다. 덕분에 이 카드는 기업 홍보용으로 인기가 많다. 전체 매출의 70%가 B2B 형태로 이뤄지고 있다. 특별한 추억을 남기고 싶은 예비부부들한테는 청첩장으로도 인기 만점이다.
적정기술로 대량생산의 물꼬를 터
온리의 올해 목표는 해외 바이어들과의 교류 빈도를 높이기 위해 서울에 직매장을 설립하고 대량생산체제를 갖출 수 있도록 생산공정을 확보하는 일이다. 온리는 지난해 중국에서 300만 장의 주문 요청을 받았지만 거절할 수밖에 없었던 아픈 추억이 있다. 카드 한 장을 완성하는데 3주가 걸리는 현재 생산공정과 인원으로는 물량을 댈 수가 없기 때문이다.
김 이사장은 LG 소셜펀딩을 통해 LG전자 명장들의 도움을 받아 최근 시간을 단축하고 힘이 덜 들어가는 작업 도구를 개발했다. 이 도구들을 활용하면 기존의 생산량을 2배 이상 늘릴 수 있고 몸이 불편한 장애인들도 작업할 수 있으리란 전망이다.
아울러 강원도 정선군청의 요청에 따라 제 2생산 공장 설립을 추진 중이다. 정선군청은 폐광으로 일자리를 잃은 주민들의 일자리 창출과 도박중독자들의 재활의지를 심어주는데 온리의 사업 모델이 제격이라고 판단했다. 만일 제2공장이 완성되면 100만 장의 생산도 거뜬하리라는 전망이다.
씨앗을 품은 수제카드들은 온라인 판매뿐만 아니라 서울시민청과 동대문 디자인플라자·남산골 한옥마을· 광화문 한글누리아트샵· 제주시 국제전람회장 2층에서 만나 볼 수 있다. 올해에는 교보 핫트랙스에도 진출할 예정이다.
‘혼자’가 아니라 ‘함께’ 누리는 삶
폐지를 활용한 수제카드 제조 기술은 김 이사장이 귀향 후 골방에 틀어박혀 6개월 동안 인터넷과 씨름하며 독학으로 일궈낸 산물이다. 이 과정에서 무리가 와 인대와 손목이 지금도 불편하다. 많은 사람이 김 이사장에게 묻는다고 한다. 혼자서 힘겹게 일궈낸 성과물을 왜 협동조합을 통해 나누려고 하는지 말이다.
김 이사장은 ‘아름다운 가게’에서 자원봉사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삶의 전환점을 맞았다고 했다. 그는 “전문직으로 일하시는 분들이 토·일요일이면 자원봉사로 인형에 솜을 넣는 등 허름한 일들을 하면서도 얼굴이 밝고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면서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화두에 답을 얻었다” 고 한다.
“내가 혼자 소유해서 얻을 수 있는 성과가 10인데 공유와 나눔으로써 1000의 성과를 만들어 낸다면 훨씬 더 많은 사람이 행복해지지 않을까요?
인터뷰를 끝내고 나오는 데 다정하게 손을 잡고 매장을 둘러보는 엄마와 딸의 대화가 재미나다.
내가 너에게 해주고 싶었던 말이 여기 적혀있네?
엄마가 고른 카드 위에는 “내 인생의 봄날은 언제나 지금이다”라는 글귀가 적혀있었다.
너도 한 장 골라봐. 엄마에게 하고 싶었던 이야기로 말이야.
딸은 과연 어떤 카드를 골랐을까?
원문: 이로운넷 / 작성: 백선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