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직장의 신’은 매회 화제였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문제가 어제오늘 일은 아니지만, 누구나 볼 수 있는 드라마에서 다뤄주는 것 자체로 가슴이 뻥 뚫린다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직장의 신’ 속 회사에는 두 계급이 있다. 장규직(오지호 분)을 필두로 한 정규직 사원과 정주리(정유미 분)가 상징하는 계약직 사원이다. 정주리가 아무리 고생을 해도 그의 공은 언제나 정규직의 공이 된다. 치사해도 소용없다. 아무리 무정한(이희준 분)이 “이건 정주리의 이름으로 나가야 한다”라고 외쳐도 소용없다. 정주리는 단지 말단 계약직 사원일 뿐이니까.
정주리가 그토록 우러러보는 사람은 미스 김(김혜수 분). 미스 김은 못하는 것이 없는 만능 계약직이다. 회사를 고를 수 있고 계약은 딱 3개월만. 연장은 없다. 게다가 추가 업무로 인한 비용까지 꼼꼼히 받아낸다. 이를 요구할 능력이 분명 출중한 사람. 정주리는 그녀를 우러러보지만 결코 될 수는 없다. 세상에 없을 사람이니까.
상근 프리랜서… 상근인가, 프리랜서인가?
같은 계약직이라도 이렇게 천차만별인데 계약직이라 보기 민망한 계약직도 있다. 신문, 방송, 잡지를 포함한 언론이나 출판 및 IT 업계에서 심심찮게 볼 수 있는 말 중 하나가 ‘상근 프리랜서‘다. 이 말에는 모순이 있다.
두산백과에 따르면 프리랜서란 “특정한 사항에 관하여 그때그때 계약을 맺고 일을 하는 자유계약 기자나 배우, 그리고 무소속의 정치가 등 집단이나 조직의 구속을받지 않고 자기 자신의 판단에 따라 독자적으로 일을 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즉 조직에 소속되지 않는, 봉급을 받는 정식 직원도 아닌 자유계약직인 것이다. 잡지 쪽에서는 바이라인에 자유기고가나 프리랜서 혹은 객원기자라고 표기한다.
그런데 상근 프리랜서는 무엇일까? 이들은 실질적으로 비상근 근로자가 아닌 상근 근로자다. 나 또한 상근 프리랜서로 첫 사회생활을 시작했고, 이 생활이 싫어서 때려치우고 안정적으로 정규직 생활을 하던 중 갑작스럽게 콜을 받고 다시 상근 프리랜서로 살고 있다(호구네 호구). 그래서 뭐냐고 물으면 나도 사실 잘 모르겠다. 내 처지를 이야기 해도 아래 대화처럼 쳇바퀴를 돌 뿐이니까.
“너 지금 다니는 회사 정규직이야?”
“아뇨… 저 상근프리랜선데요.”
“상근 프리는 또 뭐야?”
“어… 회사에서 일하는데, 그 회사 정식 소속은 아니에요.”
“출퇴근 자유야?”
“아뇨, 출퇴근 시간 정해져 있고 일도 똑같이 하죠.”
“어 그럼 단기계약직 아녀?”
“그게… 딱히 언제부터 언제까지 일하라고 하진 않았고요, 회사에서 4대보험을 안 들어주는 걸요…”
“뭐야 그건 또. 그러면서 출퇴근해?”
“네.”
“그게 계약직 아니야?”
“저… 프리랜서 계약이라 4대보험 안 들어준다고요!!!!!!!!!!!!!!!!! 회사 소속으로 일하는데 실제로 그 회사에 고용된 건 아니라고요!!!!!!!!!!!!!!”
“그게 뭐야!!!!!!”
상근 프리랜서 A 씨의 막막한 현실
함께 상근 프리랜서로 일하고 있는 지인 중 한 사람은 ‘고용노동부’에 전화하다 비슷한 대화를 나눴다고 한다. 그쪽에서는 “그게 어딜 봐서 프리랜서냐. 확실히 말해라”고 반복해 대답했다고 한다. 고용노동부도 모르는 고용형태라니. 좀 웃기지 않나. 전혀 감이 안 잡힌다면 가상의 인물 A 씨의 사례를 보자.
모 패션 잡지사에 ‘상근 프리랜서’로 고용돼 올해로 2년 차가 된 A. 뷰티 에디터인 A는 다른 정규직 기자들과 함께 똑같이 근무하고, 또 편집장의 진두지휘하에 매달 치열히 마감 일정을 치른다. 휴가도 정규직 기자들과 비슷하게 간다. 그는 매달 200만 원에서 3.3%를 세금으로 뗀 193.4만 원. 2년 간 연봉 인상은 없었다. 12개월 합산해보면 대략 연봉은 2,400만 원. A는 똑같은 연봉을 받는 친구들보다 실수령액이 많다는 것을 기뻐했다.
A는 저축도 잘했다. 2년 간 보증금 1,000만 원을 모아 월 35만 원의 작은 원룸을 얻었다. 아무래도 집이 멀어 출퇴근이 힘들다는 생각에서였다. 앞으로 더 잘 아끼며 살겠다고 다짐한 그에게 날아온 것은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보낸 지역의료보험료 관련 고지서였다. 얼마 뒤에는 국민연금공단에서도 국민연금을 내라고 독촉했다. 돈을 모아 간신히 얻은 월셋집도 고스란히 재산으로 잡혔다. 매달 보험료와 연금으로 20만 원 이상이 빠져나갔다. 병원도 1년에 한두 번 갈 만큼 무쇠체력인 A는 다소 억울했다.
그러던 중 A에게 청천벽력같은 소식이 들려왔다. 회사가 광고 수주를 더 이상 하지 못해 인원 감축에 들어간 것이다. 2년 간 꼬박 근무했으니 A는 회사에 ‘퇴직금’을 요구했다. 회사는 “A씨는 ‘프리랜서’가 아니었냐?”며 지급 근거가 없다고 거절했다.
앞선 대화와 사례를 보면 뭐 이런 호구가 다 있나 할지도 모르겠지만 이게 상근 프리랜서의 현실이다. 실제로 알면서 온 사람들보다는 모르고 발목 잡힌 사람도 많다. 게다가 제대로 된 계약서 한 장 못 쓰고 근무하는 이들도 많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뒤 도망가는 사람들도 왕왕 있지만 그래도 ‘언젠가는 TO가 나면 저 자리는 내 자리가 될 수 있을 거야’라는 꿈이나 ‘경력을 인정받으려면 어쨌든 버텨야 해’ 라고 믿고 버티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일하다 보면 ‘상근 프리랜서’ → ‘정규직 에디터’ 테크를 충실히 밟은 경우도 있다. 없는 일이 아니니 꿈꾸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 결국 이를 악용하는 회사에 대놓고 착취를 당하는 셈이다. 회사 측은 비용 측면에서 확실히 절감할 수 있다는 점에서 선호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이들의 급여는 ‘원고료’로 처리된다. 비용처리 되니 이래저래 유용한 것이다.
실제로 일하던 회사를 그만두게 돼 회사에 ‘퇴직금’을 요구했던 한 상근 프리랜서는 회사에서 지급할 이유가 없다고 거절하자 노무사와 함께 회사에 퇴직금 지급을 요구했다. 회사 쪽에서는 퇴직금이 아니라 합의금 선에서 끝내자고 했다. 합의금이 퇴직금보다 저렴하기 때문이다. 더 이상 끌고 가기에는 좁은 업종이라 불이익이 있을 것 같다 생각한 그는 결국 더 이상의 액션을 취하는 것을 포기했다. 원체 바닥이 좁다 보니 좋지 않은 소문이 날 경우 다른 회사에서 일할 확률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재능기부는 회사 좋으라고 하는 게 아니다, 나 좋으려고 하는 거지
어쨌든 일을 하면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데 돈만 본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상근 프리랜서’들은 ‘재능기부’하러 회사에 다니는 게 아니다. 정당하게 노동을 했고, 정당한 대가를 받을 수 있는 근거도 충분히 있다. 이래저래 써먹기 좋으니 프리랜서라고 붙인 건 상근 프리랜서들이 아니다. 이들을 사용하는 사용자가 편의상 붙인 이름일 뿐이다. 그들의 편의 때문에 ‘프리랜서’라는 타이틀 하나만으로 이들이 법률에 의해 보호받지 못하다는 것은 이상하지 않은가.
노동자는 무엇일까? 근로기준법 제1장 총칙 제2조 2항에 따르면 ‘근로자’란 직업의 종류와 관계없이 임금을 목적으로 사업이나 사업장에 근로를 제공하는 자를 말한다. 그렇다면 정규직과 계약직의 차이는 무엇일까? 법률상에서는 따로 ‘정규직’이라는 단어는 없지만 이 말은 계약된 기간 없이 일하는 근로자를 칭한다. ‘계약직 노동자’이란 정해진 기간 동안 일하는 근로자를 뜻한다. 비정규직은 근로 방식 및 기간, 고용의 지속성 등에서 정규직과 달리 보장을 받지 못하는 직위나 직무, 계약직, 임시직, 일용직을 뜻한다.
‘상근 프리랜서’는 무기 계약직처럼 일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다. 고용이 불안한 상황에서 이렇게라도 일할 수 있는 것은 분명 내(주머니에)게 고마운 일이지만 그렇다고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덜 받는 이유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대학 졸업 후 5년 중에 약 3년 반 넘는 시간 동안 상근 프리랜서로 살면서 스스로에게 실망한 적도 적지 않았다. 왜 적극적으로 내 의견을 피력하지 못했나. 왜 불의를 참지 못하고 요구하지 않았나. 별별 생각은 다 들었지만, 그때마다 결론은 “조금만 더 버텨서 경력을 충분히 쌓아야 한다”로 귀결됐다. 밥은 먹고 살아야 하니 일단 영혼부터 팔고 보자는 것.
하지만 그러면서도 마음은 영 씁쓸하다. 이대로 있다가 내 처지는 앞으로도 계속 바뀔 가망이 없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