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으로 호흡이 긴 드라마를 끝까지 다 보지 못하는 편입니다. 3~4회쯤 되면 앞으로의 전개가 대충 예상되면서 지루해지기 때문입니다. 하도 많은 영화를 봐서 생긴 직업병인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2시간만 버티면 되는 영화와 달리 드라마는 10~20회를 보는 게 어떤 때는 고역처럼 느껴집니다. 이건 한국드라마건 미국드라마건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최근 제가 처음부터 끝까지 몰아보기에 성공한 드라마가 있습니다. 넷플릭스가 제작해 작년 8월부터 서비스 시작한 <나르코스>입니다. 지난달 넷플릭스가 한국에 진출하면서 넷플릭스 자체 제작 드라마들을 한국에서 볼 길이 본격적으로 열렸는데요. 처음엔 <센스8>을 보다가 1회만에 중단해버렸고, 두번째로 선택한 <나르코스>는 주말 동안 정주행 했습니다.
<나르코스>는 1970~1990년대 콜롬비아를 배경으로 마약왕 파블로 에스코바르의 온갖 기행을 담은 드라마입니다. 미국 마약단속국 DEA 요원과 콜롬비아 대통령, 그리고 에스코바르 사이에 기묘한 삼각관계가 드라마를 파괴력 있게 끌고 갑니다. 이 드라마를 보고 있으면 콜롬비아의 현대사와 에스코바르의 ‘메데인 카르텔(Medellin Cartel)’ 조직을 강제로 알게 되는 장점(?)이 있습니다.
<나르코스>의 총감독은 브라질 출신 호세 파디야로 그는 경찰마저 부패한 브라질 슬럼가에서 갱단에 맞서 싸우는 특수경찰팀을 다룬 <엘리트 스쿼드>로 일약 명성을 얻은 바 있습니다. 이 영화에서 용감무쌍한 군경찰 BOPE 대장을 연기한 와그너 모라가 <나르코스>에선 극악무도한 에스코바르 역할을 맡아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외 주요 배역을 맡은 배우들이 모두 콜롬비아, 브라질 출신이라는 점도 이 드라마의 사실성을 높여줍니다.
<나르코스>를 보실 분들은 이 드라마가 보여주는 폭력과 성에 대한 수위가 꽤 높다는 것을 고려하시기 바랍니다. 참, ‘나르코스(Narcos)’는 마약 거래상을 뜻하는 스페인어에서 가져온 단어입니다.
이 드라마를 보면서 인상 깊었던 다섯 장면을 꼽아봤습니다.
1. 선한 자들이 복면 뒤에 숨었다.
메데인 카르텔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범죄인을 미국으로 송환하는 것입니다. 콜롬비아에서는 감옥에 갇혀도 법원과 교도소 등에 전방위적으로 뿌려진 뇌물 때문에 매춘, 파티 등 자유롭게 생활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나르코스들은 수감되는 것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미국으로 송환돼 재판을 받게 되면 평생 미국 감옥에서 노동해야 합니다. 실제로 미국의 마이애미 법정은 한 콜롬비아 마약 거래상에게 135년형을 내렸는데 에스코바르는 이에 충격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콜롬비아의 범죄인 미국 송환법을 무력화하기 위해 정부와의 전쟁을 선포합니다.
4화에서는 에스코바르가 어떻게 법정을 비웃는지를 보여주고 있는데요. 판사들도 나르코들의 보복이 두려워 복면을 하고 법정에 나타납니다. 이 장면이 암시하는 것은, 복면 뒤에 숨은 자는 해치려는 자가 아니라 더 약한 자라는 것입니다. 법정에서 피고가 아니라 판사가 더 약한 자일 때 복면을 쓰는 사람은 피고가 아니라 판사가 될 수도 있습니다.
드라마에서 한 판사는 복면을 쓰고 용감하게 한 마약 거래상의 미국 송환 판결을 내립니다. 하지만 그는 이내 자동차 테러로 죽고 맙니다. 에스코바르라는 한 야심만만하고 폭력에 둔감한 개인이 군대를 능가하는 권력을 갖게 되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그는 CIA가 모은 자신에 대한 정보를 없애기 위해 공산주의자들을 부추겨 사법부 건물에 테러를 일으키고 불을 지르기까지 합니다. 이 과정에서 많은 판사와 검사들이 사망합니다.
그런데 이 장면이 인상적인 또 하나의 이유가 있습니다. OECD는 회원국 간 정부, 사법기관 등의 신뢰지수를 해마다 발표합니다. 2014년 공개한 사법부 신뢰지수를 보면 한국의 순위는 콜롬비아 바로 위에 있습니다. 부패경찰로 악명 높은 브라질, 멕시코 등도 한국보다 한참 위에 있습니다. OECD 평균 수준인 인도네시아, 벨기에와 비교해도 한국은 거의 바닥권입니다. 한 마디로 사법부에 대한 신뢰로 따지면 한국이나 콜롬비아나 별다르지 않다는 거죠. 마약 거래 갱단들이 원하는 대로 주무를 수 있는 콜롬비아 법정과 한국 법정의 신뢰도가 비슷하다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물론 한국의 법정에서 총격과 납치사건이 발생하지는 않습니다. 한국인들이 법원을 신뢰하지 못하는 이유는 고무줄처럼 들쭉날쭉한 재판 결과 때문일 것입니다. 한국 법정은 재벌 수장들에게는 마음대로 들락날락할 수 있는 곳이지만 서민들에게는 문턱이 높고 가혹한 곳이니까요. 북한 대치 특수상황이라는 이유로 사상범에 대한 이현령 비현령 판결도 많고요. 씁쓸하지만 한국의 사법부는 점잖은 방식의 콜롬비아 사법부라고 이해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그러면 <나르코스>가 아주 먼 나라 일처럼 느껴지지 않습니다.
2. 에스코바르는 감옥에 갇혀도 승리했다.
8화에서 에스코바르는 감옥에 갇힙니다. 마침내 콜롬비아 정부가 승리해 그를 감옥에 가뒀냐고요? 그게 아닙니다. 법원 방화, 대선후보 살해, 비행기 폭파, 빌딩 폭파, 유명인사 인질극 등 메데인 카르텔의 계속되는 테러에 지친 콜롬비아 대통령이 에스코바르의 제안을 받아들인 겁니다. 에스코바르의 제안은 이렇습니다.
첫째, 자신에게 씌워진 여러 죄목 중 마약 거래만 인정한다. 둘째, 마약 거래상을 미국으로 송환하는 법을 국회 상정해 폐기한다. 셋째, 교도소를 직접 지어서 그곳에 갇힌다. 이를 요약하면 자신이 산속에 새로 짓는 건물을 교도소라고 지칭하고 거기에서 몇 년 사는 것으로 면죄부를 받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황당한 제안을 콜롬비아의 새 대통령은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드라마는 대통령의 고뇌를 보여주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합니다. 콜롬비아 수도 보고타 시민들은 계속되는 납치와 테러로 인해 두려움에 떨고 있습니다. 마치 배트맨이 없는 고담시처럼 범죄가 만연한 곳이 보고타입니다. 갱단과 경찰들이 서로 죽고 죽이는 일이 반복됩니다. 악당을 쓸어버리는 슈퍼히어로 배트맨은 현실엔 없습니다. 그렇다고 미국에 마냥 손을 내밀 수도 없습니다. 자기 나라의 안보는 스스로 지켜야지 미국의 첩보기관이나 군대가 들어오도록 용납하면 당장은 편할 수 있지만 결국 더 큰 짐으로 남을 우려가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대통령은 에스코바르의 말도 안 되는 세 가지 제안을 받아들입니다.
에스코바르는 자신이 지은 교도소에서 법적으로 죄를 사면받으며 황제 같은 삶을 계속 살아가고, 그동안 보고타에는 테러가 사라져 평화가 찾아옵니다. 에스코바르는 이렇게 말합니다.
“폭탄은 사람들이 평화를 원하도록 만들었어.”
이 장면은 무척 아이러니합니다. 평화란 악을 소탕할 때가 아니라 정부와 갱단이라는 두 개의 절대권력이 힘의 균형을 이룰 때 찾아온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거든요.
에스코바르 역시 자신의 협상 제안이 받아들여지긴 했지만 스스로 만든 감옥에 갇혔으니 손발이 자유로운 상황은 아닙니다. 누구도 완벽하게 승리하지 않은 이 상황은 그러나 오래 가지 못할 겁니다. 어느 한쪽이 도발해 힘의 균형을 무너뜨리려고 하면 갑자기 붕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상대방이 가진 무기를 서로 잘 알고 있기에 섣불리 덤빌 수 없습니다. 그래서 명분을 갖게될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결국 대치국면은 누가 더 명분을 갖고 있느냐의 싸움으로 가게 됩니다.
3. DEA 요원 머피는 악마를 잡으려다 괴물이 됐다.
9화 초반부에 DEA 요원 머피는 부인과 함께 평화를 되찾은 보고타에서 즐거운 한때를 보냅니다. 그러다가 교통체증으로 꽉 막힌 도로를 만납니다. 그는 실수로 앞 차를 들이받습니다. 앞차의 운전자가 나와서 항의합니다. 머피는 그가 소리 지르는 걸 듣기가 싫어집니다. 그래서 총을 꺼내 그의 머리에 대고 겨눕니다. 그리고는 타이어를 쏴서 펑크내 버립니다. 운전자는 겁먹고 차 안으로 들어갑니다. 머피의 아내는 그런 머피를 보고 깜짝 놀랍니다. 세상에서 가장 악랄한 괴물을 쫓던 머피는 어느새 그 자신이 괴물이 되어 있습니다.
법과 상식이 통하지 않는 콜롬비아에서 정상적인 절차로는 악당을 잡을 수 없습니다. 요원 스스로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해야 합니다. 이는 영화 <시카리오>에서 주요 갈등요소로 다뤄지기도 했습니다. 법을 지키려는 여자와 법으로는 악당을 잡을 수 없다는 남자의 갈등이 영화를 더 긴박하게 만들었습니다.
<나르코스>에선 그런 갈등은 별로 없습니다. 애초부터 법을 지켜가면서는 놈을 잡을 수 없다는 것을 상정하고 있고 이를 설득하기 위해 에스코바르의 잔인한 면을 더 부각시켜 보여줍니다. DEA 요원 머피와 페냐는 메데인 카르텔을 잡기 위해 뇌물, 고문, 살해 등을 주저하지 않습니다. 급기야 그들은 에스코바르의 행동대장 포이즌의 행방을 알았을 때 그가 있던 술집을 향해 무차별 난사하기까지 합니다. 그 과정에서 페냐는 포이즌을 죽이는 성과를 올리지만 아무 죄없는 시민들이 죽고 이를 갱단의 소행으로 위장합니다.
<지옥의 묵시록>에서 어둠의 심장으로 들어간 윌라드 대위가 전쟁으로 이성을 잃고 은둔하는 커츠 대령의 광기를 마주하는 것처럼, <나르코스>의 머피 역시 악마와 싸우다 어느새 괴물이 되어 갑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광기를 보지 못합니다. 사실 <나르코스>에선 이 부분의 설득력이 약합니다. 머피의 갈등이 제대로 그려지고 있지 않습니다. 선과 악의 명백한 구도로 가기 위해서 일부러 그리지 않은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애초 절대 선이란 존재할 수도 없고 머피나 페냐가 그런 인물도 아니죠. 시즌2에선 머피의 광기가 조금 더 적나라하게 드러나기를 바랍니다.
4. 미국은 공산주의자와 싸우느라 마약상을 내버려뒀다.
1970년대 에스코바르는 마약이 뭔지도 몰랐습니다. 1화에는 그가 ‘바퀴벌레’라는 별명의 한 남자를 통해 마약을 운반하면 떼돈을 벌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과정이 나옵니다. 택시회사를 운영하며 사업수완을 익힌 에스코바르는 마약을 미국 마이애미로 보내면 더 큰돈을 벌 수 있겠다는 직감 하에 수하들을 운반책으로 쓰기 시작합니다. 당시만 해도 공항 검색이 허술해서 재킷 속에 넣은 마약이 무사 통과됐고 이에 나르코들은 떼돈을 법니다.
수하들이 비행기 타는 횟수를 늘려가던 에스코바르는 점점 더 대담해져서 나중에는 보고타에서 직접 경비행기를 띄웁니다. 마이애미까지 한 번에 갈 수 없었기에 바하마 제도의 섬을 통째로 사서 중간 급유지로 쓰기도 합니다.
마이애미는 콜롬비아에서 날아온 코카인에 중독된 사람들로 몸살을 앓습니다. 하지만 1980년대 레이건 행정부는 별다른 조처를 하지 않았는데요. 공산주의와의 전쟁에 전력을 다하느라 마약에까지 신경쓸 여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는 사이 미국 남동부 지역의 달러는 에스코바르의 요새로 자석처럼 빨려들어갑니다. 그가 벌어들인 돈은 공식적으로 확인된 것만 300억 달러에 달합니다. 그가 산에 갔을 때 체온이 떨어진 딸에게 장작불을 쐬어주려 200만달러어치의 지폐를 태웠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그가 번 돈은 역대 범죄자 중에서도 압도적입니다.
2화에서 콜롬비아에 암약하던 급진 공산주의자들의 조직 M-19은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에스코바르 조직원 오초아의 딸을 납치합니다. 하지만 이 사건은 에스코바르가 갱 두목으로 조직을 꾸리는 계기가 됩니다. 에스코바르는 콜롬비아 나르코들을 죄다 불러모아 자기가 두목이라고 선언하고 인질범들에게 죽음을 선포합니다. 공산주의자 테러리스트들로선 잠자는 호랑이를 건드린 셈이었습니다.
5. 악마에 맞서 싸운 진짜 영웅을 기리다.
<나르코스>에는 에스코바르에 맞서 싸운 사람들이 나옵니다. 경찰, 군인, 관료, 정치인, 판사, 기자 등 돈에 매수당한 자들이 활개칠 때 꿋꿋이 유혹을 뿌리친 사람들은 에스코바르에 맞서 정의를 외쳤습니다.
에스코바르가 국회의원이 됐을 때 과거 그의 범죄 경력을 폭로하며 사퇴를 종용한 법무부 장관, 당선되면 에스코바르를 반드시 잡겠다고 공언한 대통령 후보, 정직한 군인들만 모아 특별부대를 설립해 지휘한 대위, 납치당한 상태에서도 에스코바르에게 다른 인질범 석방을 요구한 방송국 앵커 등이 <나르코스>에 등장하는 진짜 영웅들입니다. 이들은 모두 비극적인 최후를 맞지만, 이들이 콜롬비아에 남긴 유산은 이후 에스코바르의 힘이 약해지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합니다.
한때 에스코바르는 빈민들에게 로빈 후드처럼 추앙받았습니다. 현금이 너무 많은 나머지 보관할 곳이 없어서 빈민들에게 나누어 주고 공짜로 집을 지어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국회의원에도 당선될 수 있었죠. 이 기세를 몰아 대통령이 되겠다는 꿈을 꾸던 에스코바르는 국회 등원 첫날 법무부 장관에게 모욕을 당한 뒤 국회의원에서 사퇴하며 그를 제거해버리라고 지시합니다. 악마의 본성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는 정치인과 공무원을 돈으로 매수한 뒤 그의 동업자이자 사촌인 구스타보 가비리아와 함께 이렇게 조롱합니다.
“정치인들은 대중 따위는 안중에도 없어.”
이 장면 역시 아이러니한 장면입니다. 스스로 부패한 자들을 양산해놓고 그 때문에 고통받는 대중을 비웃고 있으니까요. 이 장면을 보면서 또다시 한국의 현실이 떠올랐습니다. 영화 <내부자들>에서 논설위원 이강희는 재벌 총수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어차피 대중은 개, 돼지입니다.”
결국, 한국에 나르코스가 있다면 그들은 영화 <내부자들>이 지칭한 대로 재벌-언론-정치인 카르텔일 것입니다.
<나르코스>를 보기 위해서는 이 끔찍한 살육전이 모두 현실에 기반을 뒀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위해 마음의 준비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드라마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본 후 에스코바르가 행한 온갖 악행의 기본적인 원리가 한국의 상황과 아주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면 새삼스럽게 섬뜩한 기분이 듭니다.
원문: 유창의 창작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