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28일 미국 LA 돌비극장에서 열린 아카데미 시상식은 흑인 배제 논란으로 시작해 디카프리오로 끝난 잔치였습니다. 오스카는 용감하게 ‘셀프디스’를 통해 위기를 정면돌파했습니다.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을 다섯 가지 포인트로 정리해보겠습니다.
첫째, 흑인 차별 논란 ‘셀프디스’
작년 닐 패트릭 해리스에 이어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의 사회는 흑인 코미디언 크리스 록이 맡았습니다. 그는 2005년에도 사회를 본 적 있었는데요. 당시 조지 부시 대통령을 맹비난해서 생방송을 중계하는 ABC가 홍역을 치르기도 했죠.
크리스 록은 평소 인종차별 문제에 대해 거침없이 발언하기로 유명합니다. 그는 자기 이름을 딴 ‘크리스 록 쇼’에서 자기가 살고 있는 부자 마을에는 흑인이 4명밖에 없다며 바로 옆집에는 백인 치과의사가 사는데 흑인은 이를 발명하지 않는 한 이사 오지 못할 거라는 뼈있는 농담을 하기도 했습니다.
아카데미 시상식이 크리스 록을 사회자로 택한 것은 올해 가장 논란이 된 흑인 배제 문제에 대해 정면으로 돌파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준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윌 스미스, 제이다 핀켓 스미스, 스파이크 리 등 많은 흑인 영화인들이 시상식을 보이콧하고, 뉴욕타임즈 등 주요 언론이 칼럼에서 아카데미의 선택을 비판할 정도로 올해 인종차별 논쟁의 수위는 어느 때보다 높았습니다. 아카데미 위원회는 이것이 더 큰 사회문제로 번지기 전에 ‘셀프디스’를 통해 불을 꺼야겠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크리스 록은 시상식이 시작하자마자 작심한 듯 발언을 쏟아냈습니다. “내가 만약 사회자가 아닌 후보였다면 이 자리에 오르지 못했을 겁니다. 사람들은 나보고 시상식 사회를 보이콧하라고 했는데 내가 보이콧해도 오스카는 열릴텐데 나는 실업자라 그만둘 수 없지요.”
또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연기는 훌륭하지만, 흑인은 그런 좋은 역할을 맡기조차 힘듭니다” 라고 말하며 주요 후보작들의 배역을 백인이 아닌 흑인이 연기하는 패러디 영상을 소개하기도 했습니다. 시상식 중간에는 그가 직접 리포터로 흑인 관객들을 인터뷰하는 클립이 나오기도 했고요. 퀸시 존스, 모건 프리먼 등 올해 시상식에는 유독 흑인 시상자가 많았습니다. 유색인종도 배려해 이병헌 역시 아시아인으로 시상자가 되었고요.
아카데미는 자신의 가장 큰 반대자 중 하나인 크리스 록을 택했고 그는 무대에 올라 마음껏 아카데미 시상식을 비판했습니다. 이런 솔직함은 위기를 돌파하는 효과적인 전술로 보입니다.
둘째, 골고루 안배한 수상 결과
시상식 초반은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의 독무대였습니다. 의상상, 미술상, 분장상, 편집상, 음향상, 음향 편집상 등 주요 기술상 6개를 싹쓸이하면서 이러다가 <매드맥스>가 감독상과 작품상까지 가져가는 것 아니냐는 말이 나올 정도였습니다. 그만큼 탁월한 성취를 이루어낸 영화이기 때문에 이견이 없는 수상결과입니다만 <스타워즈: 깨어난 포스> <신데렐라> 등 대작들은 헛물만 켠 셈이 됐습니다.
기술상에서 유일한 이변은 <엑스 마키나>의 시각효과상 수상이었습니다. 통상 시각효과상은 블록버스터 SF 영화가 가져가곤 했었기에 당연히 <스타워즈>나 <매드맥스>를 유력 수상작으로 점찍은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최근 아카데미의 경향은 현실과 동떨어진 판타지보다는 <인터스텔라> <그래비티> <라이프 오브 파이> <휴고>처럼 상상력의 산물도 현실에 기반해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작품의 손을 들어주고 있습니다. <엑스 마키나>의 인공지능 로봇 역시 이런 경향의 연장선에 있습니다.
기술상 이외의 상들은 주요 작품들이 골고루 나눠가졌습니다. <레버넌트>가 3개, <스포트라이트>가 2개, <룸> <스파이 브리지> <대니쉬 걸> <빅 쇼트>가 각각 1개씩 받았습니다. 후보에 오른 작품들이 우열을 가리기 어려울 만큼 완성도가 비슷했기 때문에 어느 한 작품에 몰아주지 않은 수상 결과는 꽤 타당해 보입니다. 각본상을 받은 영화가 작품상을 가져가고, 촬영상을 받은 영화가 감독상도 가져간다는 오스카의 법칙은 올해도 지켜졌습니다.
셋째, 진화하는 객석 이벤트
최근 오스카 시상식의 재미 중 하나는 객석 이벤트입니다. 2014년 사회자 엘렌 드 제너러스가 객석으로 내려와 배우들과 함께 셀카를 찍은 것이 유행의 시작입니다. 할리우드 스타들이 한 앵글에 담긴 이 사진은 트위터에서 리트윗 신기록을 세우며 ‘셀피’를 그해의 단어로 만든 계기가 됐습니다.
작년 사회자 해리스는 객석의 영화인들을 위해 즉석에서 피자를 주문했습니다. 생방송 도중 피자 배달원이 등장해 스타들로부터 팁을 받아갔는데 이 때문에 작은 피자가게가 전 세계의 주목을 받기도 했습니다.
올해 크리스 록은 쿠키 이벤트를 준비했습니다. 자신의 딸이 만든 쿠키가 잘 안 팔려서 가져왔다며 걸스카우트 소녀들을 객석으로 보내 쿠키를 팔도록 한 것입니다. 순식간에 6만5000달러를 모았습니다. 이 돈은 미국 걸스카우트 활동에 쓰일 예정입니다.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흑인 이슈와 함께 또 하나의 중요한 이슈가 바로 여성 이슈였습니다. 크리스 록이 딸에게 걸스카우트를 돕는 쿠키를 팔게 한 것과 더불어 또 하나의 여성을 위한 이벤트가 있었습니다. 조 바이든 부통령이 직접 등장해 레이디 가가를 소개한 것이었습니다. 어릴적 성폭행을 당한 경험이 있는 가가는 영화 <헌팅 그라운드>의 주제곡을 불러 주제가상 후보에 올랐는데 이 영화는 미국 대학 내 만연한 여학생 성폭력을 고발한 다큐멘터리입니다.
앞으로도 객석 이벤트는 오스카 시상식의 볼거리 중 하나로 계속 진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객석에서 4시간 동안 쇼를 지켜봐야 하는 스타들은 지루하지 않아서 좋고, 시청자는 독특해서 재미있습니다. 무엇보다 이야깃거리를 남기기 때문에 마케팅 측면에서 도움이 되는 이벤트가 아닌가 싶습니다.
넷째, 저널리즘과 금융, 전문영역 콘텐츠의 승리
오스카 주요 부문 후보에 오르는 작품들은 대개 실화를 바탕으로 하는 영화들이 많습니다. 올해도 작품상 후보 8편 중 실화가 아닌 영화는 <매드맥스> <마션> <브루클린> 3편에 불과했습니다.
나머지 5편의 실화 바탕 영화 중 <스포트라이트>와 <빅 쇼트>가 나란히 각본상과 각색상을 받았습니다. 두 작품은 시상식 전부터 작품상의 강력한 후보로 거론된 영화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두 영화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전문영역을 깊이 있게 파고들어 간 작품이라는 것입니다.
<스포트라이트>는 탐사보도 저널리즘을 정공법으로 다뤘고, <빅 쇼트>는 펀드매니저의 이야기를 블랙코미디로 비틀었습니다. 두 영화 모두 한눈 팔지 않고 언론과 금융의 세계를 꼼꼼하게 취재해 쓴 각본입니다. 전자에는 기자들의 취재과정이 세밀하게 등장하고, 후자에는 월스트리트에서 서브프라임을 사고파는 과정이 다양한 비유로 묘사됩니다. 우리가 흔히 어렵다고 치부해 설명하지 않고 넘어가거나 한없이 딱딱하게만 설명하는 것들을 두 작품은 과감하게 소재로 삼아 뛰어난 각본으로 완성했습니다. 두 영화는 전문가의 업무 과정도 제대로 다루기만 하면 폭발력 있는 콘텐츠가 될 수 있음을 입증했고 오스카는 이를 인정했습니다.
다섯째, 마침내 디카프리오에게 오스카
많은 사람이 예상했던대로 디카프리오가 다섯 번째 노미네이트 끝에 남우주연상 트로피를 거머쥐었습니다. 그가 수상자로 호명되어 무대에 오르자 관객들은 기립박수를 쳤습니다. 엔니오 모리꼬네와 같은 거장을 향해 치는 기립박수를 디카프리오에게 친 것은 오스카를 향한 그의 불굴의 의지를 다들 높이 평가하고 있다는 방증 아닌가 싶습니다.
디카프리오는 다섯 번에 걸친 그의 오스카 도전사를 수상소감으로 말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는 자신이 연기하도록 이끌어준 이냐리투 감독과 마틴 스콜세지 감독을 비롯한 영화인들에게 감사를 표한 뒤 기후변화로 극지방이 사라지는 데 대한 경각심을 호소하는데 수상소감을 할애했습니다. 그는 아카데미 시상식 역사의 한 페이지를 이렇게 마무리했습니다. “자연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마세요. 저도 오늘 밤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겠습니다.”
PS) 필자의 오스카 수상 예측 채점표를 공개합니다. 예측이 어려웠던 만큼 점수가 낮군요. 19개 부문 중 10개를 맞혔습니다.
- 작품상 –
빅 쇼트, 스포트라이트 - 감독상 –
조지 밀러, 알레한드로 G 이냐리투 - 남우주연상 –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 여우주연상 – 브리 라슨
- 남우조연상 – 마크 라일런스
- 여우조연상 –
루니 마라, 알리시아 비칸데르 - 각본상 – 스파이 브릿지, 스포트라이트
- 각색상 – 빅 쇼트
- 촬영상 – 엠마누엘 루베츠키
- 음악상 – 엔니오 모리꼬네
- 미술상 –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
- 의상상 –
대니쉬 걸,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 - 편집상 –
빅 쇼트,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 - 음향상 –
스타워즈: 깨어난 포스,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 - 음향편집상 –
스타워즈: 깨어난 포스,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 - 시각효과상 –
스타워즈: 깨어난 포스, 엑스 마키나 - 분장상 –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
- 주제가상 – 007 스펙터
- 장편 애니메이션상 – 인사이드 아웃
원문: 유창의 창작이야기